[문화재 돋보기⑥]
백자청화 초화칠보무늬 각병
글_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문화재 평론가
「백자청화 초화칠보무늬 각병 (白磁靑畵草花七寶文角甁)」
조선시대 17세기말. 높이 29.5cm. 입지름 5.5cm. 바닥지름 9cm
조선 21대 왕인 영조(1694년~1776년)대에 이르면 왜란과 호란의 피폐해진 경제를 어느 정도 추스르고 탕평책을 근간으로 조선 후기의 태평성대를 이루게 된다. 이 시기는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1720년~1751년)의 시기가 포함되는데 안정된 사회적 기반으로 조선 후기백자의 꽃을 피우는 단계를 맞게 된다. 금사리 가마에서 제작된 백자는 통칭하여 ‘금사리 백자’로 부르며 새로운 청화백자의 태동을 시작하게 된다. 조선 초기 청화백자의 문양은 중국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도자기의 문양과 형태까지도 비슷했지만 금사리 청화백자는 중국이나 일본에선 찾아보기 힘든 조선만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청렴한 선비정신처럼 간결하고 순수한 백자로 재탄생한다.
금사리 가마는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낮은 언덕 구릉지대에 있으며 생산된 제품을 한강 본류 나루터에서 선적하여 한양으로 운송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10년마다 가마를 옮기는데 이 시기에는 30년간 지속하게 된다. 오랫동안 금사리 가마가 존치될 수 있었던 것은 땔감과 고령토의 공급이 수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에도 중국에서 수입되는 청화안료는 값도 매우 높았고 국내에서 개발한 청화안료는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하기 전이라서 가능하면 청화안료를 아껴서 사용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래서 금사리 전기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발색이 여리고 간결하며 청초하고 후기에는 문양이 대담해지고 코발트색도 진해진다. 커다란 입호와 원호(일명 달항아리)의 제작에 있어서 대체로 원호에는 문양을 넣지 않고 입호에 문양을 장식하였으며 몸통의 상부와 하부를 따로 제작하여 붙였다. 질 좋은 고령토와 맑고 투명한 유약의 사용으로 도자기의 발색은 깨끗한 설백색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각병이나 각항아리가 창의적으로 제작되었는데 이 시기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금사리 청화백자의 문양은 초기에 몸통 밑부분에 땅 표시를 간결하게 긋고 초화무늬 (신선초, 난초, 패랭이, 쑥부쟁이)를 단독으로 그려 넣는 경우가 많지만 사군자와 같이 혼합하여 시문하는 경우도 있다. 초화무늬는 조선시대 독창적인 문양으로 야생에서 피어나는 들풀로서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이다. 사군자처럼 특별한 의미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것을 도자기에 심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한 심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자연의 소재를 담은 네 종류의 초화문은 경우에 따라서 기물의 몸통에 모두 시문하는 경우와 한 종류의 초화문을 대칭으로 두 곳만 시문하는 경우도 있으며, 땅을 뜻하는 한 줄 선은 한 바퀴 돌리기도 하고 짧게 그리기도 하며 아예 표시하지 않을 때도 있다.
칠보무늬는 원래 여덟 가지의 보물로서 전보錢寶, 서각보犀角寶, 방승보方勝寶, 화보畵寶, 서보書寶, 애엽보艾葉寶, 경보鏡寶, 특경보特磬寶이다. 포괄적인 뜻은 기복신앙의 일부로 자손번창과 풍요로운 삶과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금사리 백자의 칠보문은 주로 커다란 입호에 종속문양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호리병에도 나타며 초화문과 함께 시문되는 경우가 많고 대체로 하늘 위에 떠 있는 형상으로 자주 사용된다.
금사리 백자의 또 다른 특징으로 능형 창이나 원형의 창을 만들어 그 안에 청화로 문양을 넣는 기법이 생겨나는데 문자는 대부분 원형의 창에 길상어를 넣고 그림은 소상팔경문, 사군자문, 초화문 등을 그려 넣기도 한다.
사진1의 ‘백자청화 초화칠보무늬 각병’은 17세기 말에 제작된 관요 작품으로 몸통 하단에 지면을 표시하는 청화 선을 둘렀고 각 모서리를 중심으로 초화문(쑥부쟁이)과 칠보문(서각보, 서보)을 대칭으로 그려 넣었다.
서각보는 무소뿔인데, 누런빛이나 검은빛의 꽃무늬가 있고 결이 고와서 예로부터 풍요를 상징하는 각배로 신성하게 사용되어왔는데 다복을 상징하기도 하며 서보는 화첩이나 책 모양을 도안화하여 타고난 복과 벼슬의 녹을 의미한다. 잘 균형 잡힌 몸통의 중심부에는 초화문을 넣었고 어깨 부분에는 칠보문을 넣었다. 정선된 태토에 맑은 유약이 바닥 굽까지 골고루 시유되어 있고 청화의 발색은 금사리 백자 초기의 얇고 청초한 푸른 설백색을 띠고 있다. 바닥 굽은 안굽이며 가는 모래 받침으로 번조한 흔적이 남아있고 입 주변은 작은 턱이 나 있다. 병 속 목 부분에는 물레 자국이 남아있으며 팔각으로 제작하였다. 몸통을 물레로 둥글게 성형한 후에 일정 시간 그늘에서 건조 시킨 다음 대나무 칼 등으로 입구에서 바닥까지 단번에 면을 깎는다. 이때 깍이는 면이 일정하지 않거나 힘을 잘못 주면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각병의 제작은 특히 까다롭다. 잘 숙련된 장인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높아서 생산량 자체가 적고 현존하는 수량도 매우 희소하다.
이 작품은 넓고 흰 바탕 위에 청초한 풀꽃 몇 가닥으로 고요함과 순결함, 청빈함의 맞을 느끼게 해 주며 간결한 초화문(쑥부쟁이)과 칠보문이 함께 시문된 사례로 팔각 병에는 유일한 작품이다. 사진의
「백자청화 초화칠보문 각병」은 현재까지 알려진 금사리 초화문 각병 중에서 큰 편에 속하며 청화의 발색도 엷고 필치가 간결하여 군더더기가 없으며 안굽으로 제작되어 병의 무게 중심을 잘 잡아주고 능숙하게 깎은 몸통의 면들은 거침이 없다. 이 병의 형태나 문양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조선시대 청빈한 선비의 마음과 들에 핀 자연을 그대로 투영한 빼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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