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다시 보는 분청
Part I. <옛 분청을 다시 읽는 현대도예의 눈과 정신>
글_홍지수 공예평론가
윤광조 「혼돈Chaos」 h.28cm | 2007
현대 분청의 시작 그리고 선택의 이유
한국 도예가들이 처음부터 전통 도자의 유산을 새로운 전통을 만들기 위해 참조해야 할 표본이자 원형으로
응대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 말 관광상품 및 사업 아이템을 개발할 목적으로 한국조형문화연구소(韓國造形文化硏究所, 성북동가마), 한국미술품연구소(韓國美術品硏究所, 대방동 가마) 등에서 전통도자를 연구, 생산했다. 이후 본격적인 전승 도예의 생산은 1960년대 초 양대 가마 출신 전승 도예가들이 여주, 이천에 내려가 도예촌을 형성하면서부터다.1 1970년대 일본인들을 상대로 전승 도예가 전성기를 누렸지만,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품질을 우선하기보다 생산량과 판매 증대에만 중점을 두면서, 1980년대 들어 품질저하와 수요급감의 악순환을 이기지 못하고 급격히 하락세를 탔다.
한국도예가 상업주의와 비밀주의로 야기한 전통의 오역 그리고 서구로부터 밀려온 것들을 추종하며 점점 우리만의 것을 잃어갈 때, 작가들이 다시금 비판적 자세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범본 역시 결국 ‘전통’이었다. 1980년 국전현재 대한민국미술대전 폐막을 기점으로 우후죽순 등장한 민간주도의 공모전들 그리고 학연, 지연 위주의 동문전 및 소규모 전시그룹의 확산을 바탕으로 한국 도예의 표현은 급격히 도조(陶彫)로 기울었다. 이에 대한 반향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차츰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에 시선을 돌리는 작가들이 생겨났다.2 이들이 생각한 전통에 대한 접근은 옛 재료, 기법, 기형, 문양 등을 되살리거나 향토미술 등으로 스스로 입지를 좁히는 것이 아닌, 국내외를 아울러 통용 가능한 동시대 미술 및 공예의 표현을 찾는 것이었다. 이들은 전통의 재탐색 그리고 다시 읽기의 과정에서 한국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설명할 무언가를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의 표현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경쟁력, 자생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1990년대는 작가들이 한국 현대도예의 자생성과 경쟁력을 위해 선택한 소재는 주로 분청이 많았다. 다수가 분청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분청의 재료와 기법, 제작과정이 청자나 백자보다 규범이나 기대치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상대적으로 다양한 표현에 대한 관용도가 컸기 때문이다.
둘째, 1970년대 이후 연이은 해외 전통분청 전시의 성공으로 작가들뿐 아니라 전문가, 언론에 이르기까지 전통 분청이 지닌 추상성이 당시 현대미술에 유행했던 추상표현과 일맥상통한다고 보는 공감대, 경쟁력에 대한 자신감, 고무의식 등이 형성되었다. 당시 한국 도예의 재료와 기술 등의 수준이 지금과 비교해 열악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온도 범위가 낮고 예민하며 비색(翡色)이라는 까다로운 기준을 요구하는 청자, 잡티 하나 허락지 않는 자토(磁土)만을 사용하고 고온으로 번조해야 하며 작가의 기술력과 미적 안목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백자 등에 작가가 새롭게 도전했을 때 감당해야 할 위험과 부담은 분청을 선택했을 때보다 컸으리라 짐작된다. 실용성과 오랜 시간에 걸친 숙련도, 높은 수준의 기술 등 공예적 요구에 매력을 느끼기보다는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지향하고 이를 짧은 시간 안에 구현하려는 젊은 작가들에게 분청의 격이 없고 열린 표현은 무척 매력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정부와 문화계가 한국예술의 나아갈 방향으로 민중성, 향토성, 한국성을 강조하던 시기였기에 작가들이 다른 소재보다 분청이이에 더 부합하다고 여겼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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