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엄밀히 말하면 공예工藝가 산업화시기에 낳은 늦둥이이다. 공예의 모태에서 배태되어 자본주의와 산업화라는 20세기 생산환경을 자양분으로 훌쩍 자랐다. 1960~70년대 초기 디자이너들 중에는 공예를 전공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공예관련 공모전에 단골로 출품해 추천작가나 초대작가로 활동하던 디자이너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1)
공예와 디자인의 역학관계는 마치 영화와 연극의 관계에 비견된다. 일품 또는 제한적인 복제가 가능한 공예는 배우가 직접 등장하는 연극에 가깝다면, 무한복제가 가능한 디자인은 영화의 속성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영화산업이 활황되고 TV와 더불어 다양하고 새로운 영상매체가 속속 등장하면서 한때 연극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연극이 생명을 다할 것이라는 예측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오히려 연극의 참다운 가치와 진정성이 유사 복제수단의 발달을 통해 더욱 확연하게 확인되고 부각된 것이다. 실제로 탄탄한 연기력과 독특한 개성으로 전성기를 맞고 있는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이같은 사실이 뒷받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충무로 최고의 흥행보증수표라 불리는 배우 송강호, 황정민, 유해진, 박해일, 정재영, 김윤석 등은 모두 연극으로 연기 인생을 시작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인공의 힘(?)으로 잘 다듬어진 조각같은 외모보다는 흡인력 있는 연기력으로 극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단역은 물론 연기의 밑바닥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들이 스크린에 데뷔해서도 롱런long run 할 수 있는 이유는 안정된 연기력과 긴 호흡이 고스란히 보여지기 때문이다.
과거 도예계에도 ‘대학까지 나와 그릇붙이나 만드는 것으로 자존심이 허락 되겠나’라는 의식이 팽배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참신한 아이디어의 세라믹 생활소품디자인이 MOMA뉴욕현대미술관,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에 진출하기에 이르렀고, 내노라하는 생활디자인 잡지에는 어김없이 세라믹디자인 제품들이 대부분의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정통수련을 밟아온 도예가라면 단역과 연기의 밑바닥을 경험한 기본기가 탄탄한 배우일 수 있는 것이다. 녹록지 않은 작업 과정 속에서 흙이라는 재료의 한계를 경험하고 가마 속 불과 씨름해온 내공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대 생활문화라는 극중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해보자. 생활공간 속에서 유기적으로 적용되는 수공예적 손맛은 기본 실력으로 충분히 안정적일 것이고, 흡인력 있는 디자인의 제안은 생활문화라는 무대에 에너지를 불어 넣을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 도자문화의 진보이고 더불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요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김태완 월간도예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