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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월호 | 칼럼/학술 ]

[소소담화⑧] 공예와 ´적정 기술´
  • 홍지수 공예평론가
  • 등록 2022-09-05 11:08:54
  • 수정 2024-07-05 12: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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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담화⑧ | CRITIC IN CONVERSATION]

공예와 ´적정 기술´

글. 홍지수 미술평론, 미술학 박사 


중간기술은 대량 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에 봉사한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훌륭한 것이다. 거대함을 추구하는 일은 자기 파괴로 통한다.
_에른스트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1911~1977)

 

보편적 번영이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근대화를 관통하던 신념이다. 기술의 진보가 끝도 없이 나아가고 인류의 번영을 가져올 것 같았지만, 그 여파로 환경은 무자비하게 파괴되었고 인간은 기업의 부품에 불과해졌다. 무엇보다 성장 지상주의 경제로 인해 현대인이 누리는 생활수준은 이제 지구의 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성장과 진보를 외쳐온 시대. 우리가 추구했던 성장과 진보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성장일까? 얼마만큼 성장하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까?

근대 이후 기술과 규모의 문제는 인도 간디의 물레부터 슈마허의 사상까지 이어져 왔다. 이들은 기술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인간소외, 자본만능주의, 환경파괴 등 인류의 문제는 기술이 불필요하게 인간적인 규모 이상을 넘어 발생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즉, 비대해진 생산을 작은 규모로 되돌리는 것을 해결 방법으로 삼는다. 슈마허는 주장의 근거로 인간의 생산이 인간의 삶의 양태를 좌지우지하기에 결국 기술이라는 토대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 삶에 어떤 변화도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개념이다.

인간 생산의 규모와 노동을 제어하고 자본에 맞서 약자들이 스스로 자족생산 가능한 새로운 형태의 생산 유형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슈마허의 입장은 거대생산을 주도해온 기계생산에 작은 노동으로 맞서온 공예가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이다. 그는 기술과 규모의 성장에 제동을 거는 힘이 개인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작은 협력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저서『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1973)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름답다’는 인간 친화적이고, 자연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제를 의미한다. 첫째, ‘인간 친화적’ 생산은 기계가 아닌 인간의 노동을 가리킨다. 인간의 노동으로 만드는 생산방식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노동의 혜택이 다수에게 돌아간다. 둘째, ‘자연친화적’이란 말은 자연에서 얻어지는 자원을 사용하는 소규모 생산을 의미한다. 소규모 생산은 부산물로 배출되는 쓰레기의 양이 적다. 부산물들이 자연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자연환경이나 생태계 파괴가 적어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셋째, 과도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가 파괴되면 지구환경에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다.

슈마허는 기술의 본질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나 기술의 과도한 사용은 절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과학기술에 의한 문명의 발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슈마허의 ‘작은 것’에 대한 선호는 간디가 원류다. 간디는 영국산업 혁명 초기, 방직공업으로 대량의 의복을 생산하던 시대, 방직산업의 대량생산으로 인해 사람들이 직장을 잃는 것을 보았다. 기계생산으로 의복이 대량생산, 보급되면서 더 이상 시간과 노동이 많이 드는 물레를 돌릴 필요가 없어졌다. 인도는 이 과정을 거쳐 당시 최고의 면직물 생산지에서 영국의 식민지이자 소비처로 전락했다. 간디 역시 기계에 의존하는 대량생산 산업기술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기계공업과 소도시나 농촌의 수공업이 함께 공존하기를 바랐으나 그는 결국 산업화가 농촌의 산업을 피폐화시키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는 여기에 맞서 물레가 시간이 많이 들고 생산성이 낮지만, 이 고전적인 생산 방식이 기계생산에 맞서 인류 생존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간디를 지지하며 그와 함께 물레를 돌렸다. 이들에게 물레는 생산수단이 아니라, 사람들과 사람이 함께 시간과 일을 공유하고 노동으로 인해 창출된 수익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생산 가치이자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의 수단이었다. 아마도 공예 도구가 처음으로 경제와 정치사회적 상징이자 도구가 된 순간이 아니었을까?   

간디 그리고 슈마허가 이어 발전시킨 ‘인간 중심의 적정기술’은 노동의 가치, 이웃에 대한 배려, 공동체에서의 협력과 같은 건강한 정신이 담겨 있다. 슈마허가 말하는 적정기술의 수준은 “약자들이 다시 자기 것을 만들어 외부의 위압적인 기술의 공략에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자립의 정도”를 가리킨다. 이들의 주장을 현 공예생산에 대입해보자. 상대가 산업혁명 시대의 기계에서 4차 혁명의 시대 로봇, 컴퓨터, 3D프린터, 인공지능 등으로 빠르게 대체되었을 뿐 공예가 처한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만만치 않다. 오히려 모더니티 이후 공예가 예술, 디자인과 교집합을 크게 이루면서 오히려 공예가 차츰 아트 오브제, 문화 디자인 상품, 사치품으로 변색되고, 그 사이가 인간 본연의 모습과 생산 가치를 지키는 보루이자 저항선으로서 공예의 정체성과 가치는 더욱 모호해졌다할까?

2000년대 초, 3D프린터가 출시되었을 때, 다수 업계와 공예계 사람들은 수공에 의지하는 영세한 규모의 공예가들이 엄청난 위기와 도태에 빠질까 걱정했다. 얼마 후, 이세돌 9단이 알파고AI와 맞붙어 패배하였을 때, 가뜩이나 자동화된 기계생산, 유통 글로벌화에 맞서 공예생산이 물량과 가격 면에서 경쟁하기 어려운데 인공지능까지 자동화생산시스템과 결부되면 공예생산은 폐허화하지 않겠는가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러나 공예는 생각만큼 약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큰 만큼 공예인들이 대비도 잘했던 건지, 아님 각자의 역량이 큰 것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지금보다 공예의 수공과 장인정신에 대한 물레는 간디의 물레처럼 기계생산에 대한 해방과 지혜처럼도 간주되는 것 같다. 공예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줄 기술’이라고 믿으며, 공예의 작은 기술- 수공이 기계보다는 착하고 올바르며 좋다는 인식이 우리의 보편적 인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슈마허가 주장한 인간 친화적이고, 자연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제를 위한 수단으로 ‘공예’만큼 적절한 대안도 없다는 생각이다. 인도의 간디가 동료들과 협업하여 물레로 면직물을 손수 짜고 자족한 것도,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가 가족, 친구들과 함께 모리스사를 세워 기품 있는 수공의 물건을 제작·유통하려했던 것도 돈을 벌거나 예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예를 상품이 아닌 노동의 가치, 이웃에 대한 배려, 공동체에서의 협력과 같은 건강한 정신의 가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엇을 만들고 소비할 것인가?’라는 질문 대신 ‘인간은 무엇이며,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한 때다. 공예를 상품이나 예술로 볼 것이 아니라, 간디와 윌리엄 모리스, 민예운동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공예를 ‘우리가 함께, 오래, 같이 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위한 새로운 적정기술로서 어떻게 활용하고 미래 길을 모색할 것인지 최선을 궁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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