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②
대한제국기의 한국 근대도자
글.엄승희 한국 근대 도자사 전공, 미술사학자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의 체결과 분원 민영체제 전 환 이후의 한국 근대 도자 흐름은 대한제국의 개국을 통 해 한때 변혁의 시기를 거쳤다. 대한제국은 자주성을 강 조한 국가였다. 전반적으로 전통성을 상실한 백자 생산 은 근대화를 향한 도전을 갈망했고, 대한제국 황실에서 도 대외적인 국가관계 유지를 위해 질 좋은 자기 제작에 한발 다가가면서 전승공예의 보전保全을 지향하였다. 특히 대한제국의 자주적 표현은 문장紋章인 이화李花오 얏꽃에서 잘 드러나며, 그 영향으로 당대 황실자기에는 이 화문이 근대의 상징적 이미지로서 표현되었다(도 1).1 국 내에서 생산된 이화문 자기들 대부분은 황실의 품격과 위상을 견고히 할 만큼 질이 높지 못했으나, 황실 구성원 스스로 소속 의식과 자긍심을 발현할만한 존재감이 있었 다. 또한 황실의 공예 전승에 대한 남다른 의지는 대한제 국 말기 한성미술품제작소(이후 이왕직미술품제작소)를 설립하여 공예의 복원과 회생을 도모하면서 한차례 새로운 도전과 마주했다.2 일제 강점을 불과 2여 년 앞두고 전개된 복원 사업은 설립취지에 크게 다가가지 못했지만 황실의 공예 의지를 단적으로 표명하는 남다른 계기였다.
대한제국기 황실의 식사 공급과 식기들은 1895년(고종 32 년) 궁내부 산하 전선사典膳司에서 관련 업무를 관장하게 되면서,3 궁중의 연향가례宴饗嘉禮는 물론 서양 각국 귀 빈들 접대에 쓰일 어용기물을 구비하는데 주력했다. 그 러나 황실과 고급 수요층에서는 이미 분원백자 보다 수 입자기에 경도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즉 조선백자 가 미처 메꾸지 못하는 부분은 수입자기가 대신하는 형 국이었다. 특히 고종의 대내외 정세 인식과 대한제국의 외교적 상황에 따라 서양자기의 유입은 불가피한 선택이 었다. 예컨대 대한제국의 선포 및 광무황제의 즉위기념 일인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과 고종의 탄신일인 만수성 절萬壽聖節 등 국가의 중요 기념연회와 축하연에 각국 외교사절단을 초청할 시, 서양요리를 서양식기에 담아 접대하는 경우가 빈번했고(도 2), 황실의 실생활문화에 도 서양자기들이 종종 사용되었다(도 3).4
대중적으로 사용된 도자들 역시 이에 못지않은 변화를 겪었다. 이전에 비해 다양한 도자의 유통과 소비 성향이 생겨나면서 기존 백자 생산의 변화는 물론 새로운 도자 와 기술을 수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외세로부터 수용된 도자문화가 실제 요업활동에 적용되 는 과정은 다난했으며, 오히려 전환점을 찾지 못하는 실 정이었다. 반면 근대화로의 진입을 목전에 두고 근대형 공장을 새롭게 설립한 전직 관료, 자본가들은 국익을 도 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기계 반수공 백자들을 자력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1908년 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와 평양의 자본가인 이승훈 등이 결탁하여 평양 자기제조주식회사를 설립한 예를 들 수 있다.5 다만 이외 대다수 영세 공방들은 신설 이후 운영이 순탄하지 못했 으며, 방향성을 상실한 국가의 공예정책은 이들의 복구 와 지원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백자의 가파른 쇠락은 외세자기의 침투를 가속화하였 다.6 특히 조선시장을 점유하기 시작한 일본 생활자기들 은 염가에 질이 우수하여 도시민들의 소비를 자극했다 (도 4). 이러한 현실을 개탄한 개화세력들은 도자기 생산 을 ‘국가의 산업혁명을 일으킬 주요 산업’으로 간주하며 혁신을 요구하였다. 이들이 주창했던 요업의 혁신은 실 제 반영되는 과정에서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서구열강 으로부터 도입한 각종 기기를 통해 일부 공인들의 기술 력 향상과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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