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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12월호 | 해외 ]

연대순으로 보는 로얄 코펜하겐의 역사와 덴마크 산업도자디자인 양식 변천사
  • 편집부
  • 등록 2003-07-15 15:25:45
  • 수정 2018-02-21 17:2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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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로얄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그룹의 산업도자 디자인과 예술유리(13)

연대순으로 보는 로얄 코펜하겐의 역사와

덴마크 산업도자디자인 양식 변천사

- 제1기 1700년대, 로얄 코펜하겐의 탄생과 ‘하얀 금´(2)

글/김정아 스웨덴리포터 사진/로얄 코펜하겐 제공

1. 1600년대의 중국자기수입

 유럽에 수입된 첫 동양자기는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1600년대를 통해 유럽은 중국과 정기적인 무역관계를 확립했으며, 중국자기는 쉴새없이 유럽으로 수입되어 들어왔다. 가장 중국자기가 많이 수입된 곳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영국의 런던, 스웨덴의 욧데보리이었으며 1644년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배 한 척에 실린 중국자기의 양은 36만개에 달했다. 유럽인들은 수입한 중국자기를 식기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장식용으로도 사용했다. 중국과 아랍, 멕시코로부터 녹차와 커피와 코코아 등 따뜻한 음료들이 새롭게 유럽에 수입되었을 때, 유럽인들은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금속제 또는 은제 식기류가 이러한 따뜻한 음료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와 함께 중국제 자기 찻잔을 사용하게 되었다. (맨 처음 수입된 중국제 자기찻잔들은 손잡이가 없는 중국식 찻잔이었다.)

2. 태양왕의 식탁에 놓인 자기

 1600년대의 유럽상류층은 주석(Tin), 은, 화이앙스(Fiance), 그리고 중국에서 수입된 자기식기들을 사용했다. 태양왕(The Sun King)이라고 불려졌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순은으로 만들어진 식기를 특별 주문하여 사용하였으며, 왕 자신은 순금으로 제작된 식기류를 사용하였다. 부유한 귀족들과 왕자들은 태양왕의 은제 식기를 모방한 식기들을 사용하는 것을 즐겨했다. 그러나 1708년 겨울부터 1709년까지 프랑스가 전쟁과 기근에 의해 전 국토가 황폐화되자, 루이 14세는 모든 프랑스 국민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제 식기류 일체를 국방비로 사용할 은화제작을 위해 국가에 헌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은제품을 헌납한 국민들에게는 그에 해당하는 새로운 식기류 세트를 전쟁이 끝난 뒤 보상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귀족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그들이 가진 은제 식기들을 국가에 헌납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실제로는 자신들이 가진 모든 은제품을 헌납하는 대신 많은 양의 은제품을 비밀 장소에 숨겨놓고, 그 대신 자신들의 비밀이 탄로 나지 않도록 도자기회사에 도자기 식기제품을 주문했다. 프랑스 전국의 왕족, 귀족, 상류층, 부유층들이 주문한 도자기식기의 양은 엄청났으며 이 덕분에 중국제 자기의 값은 천장으로 치솟아 올랐다. 자기제품들이 천장 값인데도 불구하고 불과 일주일 이내로 파리시가지내의 모든 상점에서 중국제 자기는 완전히 동이나버렸다. 이와 반면에 프랑스궁정에서는 중국제 자기대신 화이앙스 또는 연질자기(Soft porcelain)로 제작된 프랑스제 도자식기들을 선택했다. 중국제 자기대신 프랑스제 도자기를 선택한 루이 14세의 속셈은 진 자기(True genuine porcelain)이라고 후에 불리게된 고온소성된 경질유럽자기(Hard paste porcelain)의 전 단계인 연질자기를 국왕 스스로가 사용함으로써, 왕의 식기를 모방하기 좋아하는 귀족들을 부채질하여 아직까지 개발이 안된 경질유럽자기를 빠른 시일 내에 개발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루이 14세의 계획은 프랑스인들의 상업정신의 한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루이 14세는 당시 유럽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중의 하나였으며, 다른 나라의 국왕들은 끊임없이 그와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중국에서 수입한 자기대신 프랑스제 도자기식기를 사용한다는 소문은 빠른 속도로 전 유럽에 퍼졌으며, 이 결과 국가가 안정된 상태에 있는 다른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까지 자기식기를 사용하는 대유행을 낳게 되었다. 유럽의 왕자들은 이제 더 이상 중국으로부터 자기를 수입하는 부담을 갖는 대신, 자국내의 도자기공장과 도공들을 북돋아 루이 14세의 식기보다 더 훌륭한 진짜 경질 자기를 개발하는데 신경을 썼다. 이와 함께 많은 유럽의 도자기공장들은 ‘하얀 금(White gold)’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진 눈부시게 하얀 중국자기의 신비를 알아내기 위한 격렬한 경쟁에 들어갔다.

3. 유럽인들의 경질자기생산

 1709년 유럽에서는 최초로 드레스덴의 마이센(Meissen)에서 연금술사들이 경질자기의 제작기술을 발견해냈다. 마이센의 연금술사들은 강철왕(The Strong)이라고 불리었던 삭센(Sachsen)의 통치자이며 폴란드(Poland)의 왕이었던 아우구스트(August)에게 속해 있었다. 처음 공장의 규모가 작을 때는 주로 자기인형들을 생산했으나 곧 규모가 커지면서 차 서비스 세트 생산이 주 품목이 되었으나, 1729년까지는 완벽한 풀 디너서비스 세트를 제작하지 못했다. 173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정식만찬용 서비스세트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의 디자인들 중에서는 만찬식탁의 중앙에 놓이는 가장 중요한 장식적인 기능을 가진 뚜껑이 있는 아주 화려한 식탁용 수프나 야채를 담는 그릇들(Tureen)의 디자인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식만찬용 풀 서비스(Banquet full services)들은 엄청나게 비쌌을 뿐만 아니라, 세트 전체를 생산하는데는 몇 년씩이나 걸리고는 했다. 당시 강철왕 아우구스트는 마이센의 자기제작 비밀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의 자기공장에서 일하는 도공들을 사실상 감금한 상태에서 자기제작을 하도록 했다. 이러한 야비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아우구스트는 유럽 전체의 자기제작을 독점하려고 했으나, 불행하게도 그의 자기제작 독점권은 1730년대 중반에 많은 도공들이 탈출에 성공하면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4. 군주의 힘을 상징하는 자기회사의 소유권

 1700년대를 통해 왕실의 정식만찬용 서비스는 화려한 장식적인 기능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따로 있었다. 즉, 자기들은 정식만찬이 있을 때마다 사용되고, 장식으로도 사용되었으나, 또한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특별한 선물로 사용되었다. 한 나라의 왕실이 자기로 제작된 정식만찬용 서비스를 다른 왕실에 선물하는 것은 두 왕국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설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진보적인 왕이나 왕자들은 그들 스스로 개인 소유의 자기공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선물로 보내질 자기제품들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1700년대에 자기공장의 소유권을 가진 왕이나 왕자들은 유럽에서도 가장 정예의 왕족으로 대우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왕 자신이 계몽주의 시대의 화학 등 과학의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경제적 밑바탕을 확고히 할 수 있는 근대화된 논리적 사고를 조화시키는 군주로 인정받게 했다. 이에 더하여, 국왕소유의 자기 공장과 여기에서 생산되는 모든 생산량은 국왕에게 재정적인 여유와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다른 왕국과 선물을 교환하는 정치적으로 현명한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국왕은 자신의 자기공장을 소유함으로써 수입하는 중국자기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당시 유럽왕족들의 첨단 유행에 발맞추어 자신의 왕궁에 필요한 모든 자기제품을 언제든지 생산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익이라면, 국왕소유의 자기공장에서 생산된 자기제품들을 국내외의 귀족들이나 상류층들에게 팔아 국고를 튼튼히 함으로써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5. 로코코 양식의 등장

 1700년대 중반부터 자기제품들은 확실히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 받는 양식은 화려한 장식을 한 로코코(Rococo) 양식이었다. 로코코 양식이 처음 유럽에 선보인 것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지나친 바로크(Baroque) 양식에 대응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루이 14세 때의 프랑스는 특혜승진사회였으며 귀족들은 그들의 특혜권과 승진권을 왕에게 아첨을 함으로서 지켜나갈 수 있었다. 귀족들이 이러한 특혜권을 얻는 것은 루이 14세가 차갑고 과장된 양식의 장식이 가득한 왕궁의 홀에서 수도 없이 열었던 거대한 만찬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를 받는 것이 첫 관문이었다. 가볍고 여유 있는 로코코양식은 이러한 엄격한 일상생활에 대한 저항적 반응이었다. 당시 루이 14세의 다음 계승자는 불과 다섯 살짜리 아이였던 루이 15세 이었으며, 프랑스는 오를레옹(Orelean)의 왕족(Filip)에 의해 사실상 통치되고 있었다. 필립의 통치아래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번창해 나갔으며, 귀족들은 경박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했다. 프랑스의 모든 왕궁들과 귀족들의 집은 점점 대형정식만찬을 위한 장식보다는 사적인 공간과 안락함을 중요시하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장식으로 꾸며졌다. 이러한 유행에 따라 왕궁들과 귀족들의 집은 연회를 위한 거대한 방 대신, 밝고 명랑하고 비대칭적인 새로운 장식으로 꾸며진 많은 작은 방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로코코의 장식들은 대부분 S 또는 C 형의 문양들로 이루어졌거나 조각되었는데, S 또는 C 형의 문양들은 자연물 특히 아름다운 무늬의 달팽이 또는 조개껍질들, 산호와 진귀한 광석의 무늬에서 고안된 것이었다. 천장이나 벽을 치장하는 장식가들이나, 가구제작을 하는 장인들, 여러 공예품이나 생활용품을 만드는 장인들은 이러한 문양이나 선들을 인용하여 실내장식과 제품제작에 응용했다. 그러나 아직도 디자인 자체는 중국 공예품들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로코코 시대의 사람들은 익살스럽고, 명랑하고, 은밀하며, 교태가 가득한 장식을 좋아했는데, 그네를 타는 귀부인의 은밀한 치맛속과 이러한 장면들을 낭만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표현하기를 즐겨했다.

6. 로얄 코펜하겐 자기회사

 1775년 로얄 코펜하겐 자기회사가 창설된 직후부터 로얄 코펜하겐 역시 당시 유럽의 유행에 부응하여 로코코양식의 자기 인형, 장식물들, 화병들, 그리고 다양한 선물용품들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제품들은 왕실과 귀족들에 의해 주로 구매됐다. 1780년초 덴마크 국왕의 명령에 따라, 동인도회사에 의해 덴마크로 수상화물 운송된 수입외국자기상품전체가 잡다한 이외의 중국제 일상용품을 제외하고 완전몰수 되었다. 이러한 수입자기 통상정지 명령이 내려진지 얼마 안되어 1780년 3월 로얄 코펜하겐은 직판장을 오픈하였으며, 이 의미는 로얄 코펜하겐이 덴마크 국왕의 상업정책에 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즈음부터 청화자기 제품들이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가장 로코코 양식을 뚜렷이 하는 것은 고성형 또는 회전형의 형태와 문양들이 그려진 제품들이다. 아직까지도 일일이 손으로 그려져서 생산되고 있는 ‘파란 꽃(Blue flower)’은 이때부터 생산된 제품으로 곡선형의 선과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로코코 양식의 ‘파란 꽃’ 제품의 손잡이와 뚜껑 손잡이 부분들은 작은 아기 요정들이나, 아름다운 누드의 여신들, 작은 꽃들 같은 비대칭적인 조각 적인 형상들로 장식되었으며, 화초와 자연풍경의 채색은 후에 보다 근대화된 제품에 응용되었다. 로얄 코펜하겐 장식 1호로 불리는 ‘블루 훌루티드(Blue Fluted)’ 제품 또한 이 당시에 개발되었으며 전형적인 로코코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 제품은 중국 자기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제품으로, 세로로 홈을 판 표면 장식은 자기의 탄생지인 중국의 문양들을 유럽식으로 변형한 장식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제품들의 뚜껑이나 손잡이 부분들은 달팽이의 껍질 같은 명실상부한 로코코식 조각장식을 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필자약력

이화여대 및 동 대학원 도예과 졸업 스웨덴 국립 욧데보리대학교 대학원 석사(MFA) 핀란드 헬싱키산업미술대학교 대학원 박사(Doctor of Art) 개인전 2회(스웨덴) 국제학술대회 논문발표 3회 핀란드 UIAH 도자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도예과 전임강사 역임 현재, 스웨덴 욧데보리대학교 전임강사(공예학부) 및 전임연구원(디자인학부) 1775년 아르놀드 크로그에 의해 디자인 된 ´블루 훌루티드´ 촛대의 오리지널 디자인 ´블루 훌루티드´ 촛대, 높이 50cm, 로코코양식의 형태와 문양장식이 되어 있다. 투각기법이 함께 사용된 ´완전 장식(Full lace)´된 ´블루 훌루티드´ 컵과 접시들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장식법에 의한 블루 훌루티드 접시들. 왼쪽 : 접시의 가장자리에 레이스 장식이 없이 단순히 선으로 장식된 ‘단순장식(Plain)´ 접시. 중앙 : 가장자리에 레이스 장식이 그려진 ‘반 장식(Half Lace)´ 접시, 오른쪽 : 가장자리에 레이스 장식이 그려지고, 각 레이스마다 투각기법이 함께 사용된 ‘완전 장식(Full lace)´ 접시.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의 ´파란 꽃´ 제품으로 1780년부터 생산되었다. 귀여운 아기천사의 모습이 뚜껑 손잡이에 조각되어 있고, 자유로운 곡선으로 낭만적으로 처리된 로코코양식의 대표적인 제품이다. 1780년부터 생산된 로코코 양식의 단지, 접시, 그릇들로, ´파란 꽃´ 제품의 첫 장식 기법인 ´커브드(Curved)´로 장식 되어있다. 설탕용기와 접시. ´파란 꽃´ 제품의 두 번째 장식 기법인 ´브레이디드(Braided)´를 사용하였다. 이 기법은 테두리를 바구니를 짠 모양으로 장식한 것을 말한다. ´파란 꽃´ 디너 서비스 제품. 식탁 중앙에 있는 뚜껑 있는 냄비는, 로코코양식의 ´파란 꽃´ ´커브드 튜린(Curved tureen)´으로 매우 잘 알려진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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