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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11월호 | 해외 ]

연대순으로 보는 로얄 코펜하겐의 역사와 덴마크 산업도자기디자인 양식 변천사
  • 편집부
  • 등록 2003-07-11 12:35:32
  • 수정 2018-02-20 17: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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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로얄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그룹의 산업도자 디자인과 예술유리(12)

연대순으로 보는 로얄 코펜하겐의 역사와

덴마크 산업도자디자인 양식 변천사

- 제1기 1700년대, 로얄 코펜하겐의 탄생과 ‘하얀 금´(1)

글/김정아 스웨덴리포터 사진/로얄 코펜하겐 제공

 로얄 코펜하겐 자기회사와 이들의 산업도자 디자인 양식의 변천사는 덴마크라는 한 국가의 문화사와 그들의 삶에 대한 철학, 전통, 관습, 그리고 자연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덴마크인들의 태도, 예술의 양식, 식생활의 습관과 고유의 식탁 예절, 성 역할의 변화, 정치, 과학과 기술의 발전, 세기를 통해 변화한 덴마크 사회의 역사와 그 맥락을 함께 하며, 그동안 생산된 제품들의 생산 배경과 재료와 기술의 개발, 또한 형태, 색채, 장식 디자인을 통해 이들의 역사를 두 배로 풍부하게 해준다. 이번 호부터는, 로얄 코펜하겐의 역사와 변천을 통해 덴마크 산업도자 디자인 양식의 변천을 알아보고 어떻게 한 화학자가 설립한 자기회사가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1. 로얄 코펜하겐의 탄생과 그 배경

로얄 코펜하겐 자기 회사는 1775년 5월 1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설립되었다. 이 회사가 당시 덴마크의 황태후 율리안네 마리 (Juliane Marie)의 강력한 후원아래 설립되었을 때는, 중국으로부터 유럽으로 전래된 중국자기제작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100년이 넘는 제작기술의 연구가 끊임없이 집요하게 진행된 후였다. 1709년 드레스덴(Dresden)의 연금술사(alchemist) 요한 후리에드리히 뵈트게르 (Johann Friedrich Bottger)는 드레스덴의 국왕 아우구스트(August)의 열성적인 지원으로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자기(Porcelain)를 생산하였으며 그의 자기제작기술과 방법은 국왕의 명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었다. 이후, 많은 유럽의 국가들은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그들 자체의 자기제작회사를 설립하였으며, ‘하얀 금(The white gold)’라고 불려졌던 백색의 투명한 유럽식 자기 제작생산에 성공하였다. 덴마크에서 자기를 제작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1731년부터였으며, 연질자기(Soft paste porcelain)의 생산은 1760년부터 개시되었다. 덴마크의 연금술사이며 화학자이고 약학자였던 후란츠 헨리히 뮐러(Frants Henrich Muller)는 전 재산을 털어 공장을 설립하고, 고화도용 장석질 진 경질자기 (True feldspar hard paste porcelain for through the high temperature firing)의 제조 기술과 소지 조합비를 연구하였다. 그의 실험실과 연구의 과정, 공장의 관리 등은 극소수의 내막을 잘 알고있는 사람들로 한정되어 비밀로 지켜졌다.

이후 2년여에 걸친 실험 끝에 1772년 소지에 고령토를 조합하여 모든 유럽인들이 탐을 내는 고화도 경질자기제작에 성공하였다. 당시의 덴마크 황태후 율리안네 마리와 다음 계승자로 예정된 그녀의 아들 후레데릭(Frederik)은 이러한 뮐러의 연구에 대한 가장 열렬한 옹호자들이었다. 당시의 왕이었던 크리스티안(Christian VII)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새 어머니인 황태후가 실질적인 주권을 가진 군주로 모든 중요한 국가 대소사를 행사, 결정하고 있었다. 뮐러는 자기제작성공과 함께 덴마크 왕실의 후원을 받게되었으며, 그의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을 기반으로 1775년 로얄 코펜하겐이 설립되었다. 설립자인 뮐러는 공장의 모든 관리, 경영, 기획, 자기소지와 유약, 색채 조합, 직원들의 훈련, 자기의 전 생산 과정과 기술 개발까지 단독 책임자가 되었다.

1775년 설립 당시의 이름은 ‘덴마크 자기제작소 (Danish porcelain manufactory)’ 이었으며, 주식회사로 등록하여 왕족과 상류층들이 주주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로얄 코펜하겐의 본사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의 첫 공장은 코펜하겐의 중심가인 쾨브마게르가데 (Kobmagergade)에 설립되었다. 1779년부터는 국왕이 로얄 코펜하겐의 전 소유권을 이양 받아 회사는 공식적으로 국왕의 단독소유재산이 되고 회사명을 ‘왕립 덴마크 자기제작소 (Royal Danish porcelain manufactory)’로 바꾸었다. 왕의 명에 의해 회사는 독일 마이센 자기회사의 직원들과 휘르스텐버그(Furstenberg)의 모델 기술진들을 픽업하여 특채 고용하는 등 새로운 직원들을 보충하였는데, 이 일로 코펜하겐주재의 삭센(Sachsen) 대사로부터 공식적인 항의를 받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로얄 코펜하겐의 상표인 3개의 코발트 블루 색 곡선들은, 덴마크의 국가 지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3개의 해협들인 외레순드(Oresund), 스토레 벨트(Store Balt), 릴레 벨트(Lille Balt)를 상징하는 것으로 도입되었다. 한나라의 국왕이 자기회사를 단독 소유하는 일은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덴마크 국왕은 덴마크뿐만이 아니라, 노르웨이와 심지어 독일의 대다수 공국(公國)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유럽은 국왕이 자기회사를 직접 소유하는 일이 국내 및 외교정책의 중요한 일부로 받아들여졌으며 자기는 부와 권위의 상징으로서 반드시 획득해야하는 일이기도 했다.

2. 1700년대의 유럽 전제군주(Absolute monarchs)왕정과 ‘하얀 금’

로얄 코펜하겐이 설립된 시기에 자기는 유럽의 왕족들에게 최고의 유행이었다. 르네상스 (Renaissance)이래 유럽의 왕족들은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가 된 것이든 자연의 산물이던 무엇이든 희귀한 것 또는 이국풍의 진귀한 것들을 수집하고 그러한 것들을 소유할 수 있는 자신들의 권위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의 진기한 진열장에는 절묘한 모양과 색채의 조개 껍데기들이나, 처음 보는 기묘한 해골들, 불가사의한 동물들의 박제, 아름답게 조각된 상아, 특이하고 신기한 물건들이 전시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을 갖기 위해 명령을 내려 아주 먼 다른 나라까지 가서 색다른 것이나 두드러진 것들을 찾아오게 했다. 160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 수입된 자기들이 이들의 진열장에 수집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자기를 생산하는 기술이나 지식이 없었던 유럽인들에게 중국자기는 그야말로 인간이 창조해낸 굉장한 재료였으며, 중국에서 수입되는 자기는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중국자기를 실은 배 한 척의 화물 적재량은 1600년대의 화폐로 5백만 네덜란드 길더를 초과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며, 선주(船主)는 단 한번의 자기 수입으로 갑부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인 이유만으로도 자기는 단지 왕실의 진열장을 채우기 위한 호기심의 대상으로서만 오래 남아있을 수가 없었으며, 시대의 유행에 따라 왕족의 진열장도 그 유행을 달리해서 이제 자기(磁器)는 단독 수집 대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1700년대에 시작된 계몽운동시대(The Age of Enlightenment)는, 종교가 아니라 이성과 과학이 인류의 진보를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 시대의 시작과 함께 특정한 한 지역이나 시대의 자연 식물군(植物群) 또는 동물군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각종 광물, 동물의 뼈, 식물종의 채집 등은 인간이 만든 예술적인 창조물들과는 따로따로 분리되어 수집되고 진열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당연히 사회의 유행 또한 변화되었으며, 중국자기는 이제 더 이상 조물주가 창조한 다른 자연의 창조물들, 즉 뼈, 광물, 금속, 신기한 식물 등과는 동등하게 취급될 수 없었다. 이러한 중에 유럽의 왕족 중에서는 최초로 독일의 왕실이 그들의 왕궁에 중국자기만을 진열한 ‘자기의 방’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실내장식은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의 다른 왕실과 귀족들에게 퍼져갔다.

3. 계몽주의 시대와 중상주의 (The Age of Enlightenment and Mercantilism)

유럽의 왕족들이 단지 중국자기를 수집하는 일에만 여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그 시대의 과학적, 철학적인 새로운 문제와 논쟁들에 열중하고있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훌륭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을 다른 나라에서 자신의 나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하곤 하였다.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시대에 적합한 현명하고, 빈틈없이 책략 적인, 이 시기의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천연자원들, 즉 각종 광물들이나 금속, 식물 등에는 숨겨진 재정적 잠재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제군주왕정으로 통치하고있는 많은 유럽국가들의 군주들은 그들의 국가통치기반을 중상주의적 이상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왕국들의 천연자원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연구되어지고 개척되어 상업적 무역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요소로 이용해야했기 때문이다. 국고(國庫)는 되도록 언제든지 재정을 충당할 수 있는 금으로 넘치기를 원했고, 이러한 비상재원은 전쟁시의 국방비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물건이든 국내의 자원을 이용하여 자국 내에서 생산하는 것이 비싼 가격을 치르고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항상 이익이 있었으며, 또한 강력히 권유되었다.

 중국자기는 수입되는 상품으로 가격이 매우 비쌌으며 또한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중국자기는 또한 과학적인 흥미의 대상이었다. 많은 과학자들은 도대체 중국인들이 어떤 천연의 자연물질들을 이용하여 이렇게 투명하고 눈부시게 흰색이며 단단한 자기를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중국자기는 중상주의적 상업 정책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만일 국왕이 그의 왕국 내에서 자기를 생산할 수 있다면, 그의 왕국은 비싼 자기를 수입해야할 필요가 없으며, 이에 더하여 왕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자기를 국내외의 귀족계급과 부유한 상공업자들에게 팔아 국고를 기름지게 할 수 있었다. 중국인들로부터 자기제작기술의 제공을 거절당한 후, 많은 유럽의 왕실들은 연금술사들을 고용하여 그들이 ‘하얀 금’이라고 부르는 자기의 신비를 연구하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필자약력 이화여대 및 동 대학원 도예과 졸업 스웨덴 국립 욧데보리대학교 대학원 석사(MFA) 핀란드 헬싱키산업미술대학교 대학원 박사(Doctor of Art) 개인전 2회(스웨덴) 국제학술대회 논문발표 3회 핀란드 UIAH 도자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도예과 전임강사 역임 현재, 스웨덴 욧데보리대학교 전임강사(공예학부) 및 전임연구원(디자인학부) 로얄 코펜하겐 자기회사의 창설 당시 모습 로얄 코펜하겐 자기회사의 창설 당시 덴마크 여왕 ‘율리안테 마리’ 생선요리 서비스 세트 차 서비스 세트 계란형 디자인 사진틀 펀치 그릇 잉크 말리는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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