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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1월호 | 해외 ]

아프리카 콩고공화국 문화원정대 기행문
  • 편집부
  • 등록 2008-03-05 17:39:34
  • 수정 2008-12-24 17: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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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콩고공화국

문화원정대 기행문

<아프리카 콩고공화국 문화원정대>의 목적은 아프라카 땅에 한국 전통 옹기기법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도예문화를 전수하고 한국전통옹기가마를 축조해 기증함으로써 축요기술 및 번조기술 등 우리전통도예가 지속적으로 아프리카 전역에 보급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는 것에 있다. 또한 옹기그릇의 사용으로 콩고인들의 비위생적인 식생활을 개선하는데 조력하고 한국과의 문화교류를 바탕으로 경제교류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과 함께 참여한 한국 도예전공 대학생들에게 한국 전통도예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봉사정신을 함양하고자 한다.
글·사진 정동훈 원광대학교 도예과 교수 

 

콩고공화국 문화원정대 참가자 명단
정동훈 (원광대학교 도예과 교수, 단장)
임세라 (원광대학교 강사, 한국어 강좌담당)
박성철 (원광대학교 도예과 졸업, 중국 심양 로신 미술대학 대학원생, 가마짓기 및 번조 담당)
성보성 (원광대학교 도예과 졸업, 교육대학원 재학생, 한국전통옹기물레 담당)
이채원 (원광대학교 도예과 4학년 재학생, 전기물레 담당)
박재형 (강원대학교 영상디자인과 3학년 재학생,  비디오 및 사진촬영과 자료정리담당)
임준형 (원광대학교 도예과 3학년 재학생, 손 성형 담당)
황우찬 (원광대학교 도예과 1학년 재학생, 가마짓기 보조 및 번조 담당)


<아프리카 콩고 공화국 문화원정대>

일  시: 2007년 7월 5일- 8월 19일(45일간)
장  소: 아프리카 콩고공화국 수도 브라자빌
대  상: 콩고공화국 대학생 및 도예 관련 인력 87명
후  원: (주) EMKC(콩고공화국내 1500km       철도건설을 계약 한 국내 기업)


2007년 7월 5일 17시 35분 인천공항을 출국하여 방콕으로 향하는 8명의 문화원정대는 출국수속에서부터 문제점이 발생했다. 현지에서 사용하게 될 짐들을 꾸릴 때부터 무게를 재가며 꼭 필요한 물품만 챙겼지만 출국 수속을 하는 과정에서 목물레, 전기물레, 점토, 유약재료, 그리고 가마짓기를 위한 기자재와 한국 음식 등의 중량이 초과되어 700만원의 과태료를 지불하게 된 것이다. 45일간의 아프리카 대장정의 어려움은 일찍이 시작되었다. 아프리카로 한국전통도예문화를 전수시켜 보겠다는 계획을 3년 전부터 염원했던 일이 성사되어 한편으로 기쁜 마음이기도 하였지만, 출국 수속부터 많은 우려와 걱정 속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지역의 풍토병인 황열병과 말라리아를 예방하기 위하여 부득 서울의 국립병원으로 가야하는 절차를 겪으면서 아프리카 오지로 떠난다는 사실을 출국 전의 준비 단계에서 이미 절감했다. 갑작스런 출국 결정으로 인하여 선박 편으로 화물을 운송하지 못하고 부득 항공편을 이용하게 되어 과중한 화물비를 지불하게 되었고, 말라리아를 사전 예방해야겠다는 신념에 준비한 스프레이식 모기약은 모두 압수당하였다. 한국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정보에 준비한 고추장은 공항에서 화물을 정리하는 사이 이미 플라스틱 포장이 터져 공항 바닥에 고추장 범벅을 하는 헤프닝을 겪었다. 가까스로 출국 수속을 마친 일행들은 비행기가 이륙함과 동시에 미지의 환경에 부적응할지도 모른다는 겁 아닌 겁을 먹고 미리 자두어야한다는 생리적 욕구의 유혹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첫 번째 관문은 방콕 시간  밤 11시경에 방콕공항 도착, 아프리카로 향하는 비행은 방콕에서 새벽 1시경에 출발할 예정임으로 그리 세련되지 않은 분위기의 몇몇 카페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이 닫힌 공항에서 무료함을 달래야 했다. 또한, 어느 나라에선가 비행기 추락사고가 있었던 까닭에 굶주림과 질병이 만연하는 아프리카국가에서 운영되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함이 또 하나의 긴장증을 낳았다. 인간의 두려움 앞에서 여행자보험이 최소의 위한이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동반자들과 함께한 우스갯소리에서 발견하면서 우리는 긴장이완을 숙달해갔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아디다스 아바바 공항까지는 대략 11시간정도 소요돼 현지시각 새벽 5시 45분에 도착하였다. 공항 밖의 팜나무와 고무나무 등의 가로수를 확인하면서 비로소 아프리카에 도착하였음을 실감하였다. 에디오피아 공항인 아디다스 아바바를 새벽에 출발하여 오전 11:55분에 콩고의 수도인 브라자빌에 도착하였다. 계속 바뀌는 시간을 헤아려 보는데 그리 신경쓰지 않았던 것도 예술인의 특성이겠지만 어쨌든 지금도 정확히 몇 시간을 경유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꼬박 만 하루가 넘은 일정인 듯싶었다. 모두가 몸은 지쳤지만 아프리카 대륙에 첫발을 디디었다는 설레임과 45일간의 대장정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한국의 도예를 전수하겠다는 자부심 등이 교차되는 시간이었다.
마야마야 공항의 규모는 우리나라의 60-70년대 지방 공항규모였고 콩고공화국 교통부차관이 직접 영접해 주어 VIP실에서 입국수속을 할 수 있었다. 반바지를 입었던 두 남학생은 따로 분리되어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공항을 통해 입국소속을 마쳐야했으나, VIP실을 통과했던 우리들은 또한번 웃고 말았다. 프랑스의 문화가 식민지문화 틈바구니로 잠입한 탓에 에티켓에 비중을 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VIP를 위한 공항의 면적은 너무도 협소하고 누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VIP접대에 관한 기준은 어쩌면 화려한 공항의 규모가 아닌 에티켓의 정도로 가늠할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잠시 해보며 필자 자신이 아프리카에 발을 디디고자했던 시점부터 본인 안에 그들과 비교하고자하는 못난 도시인의 고질병, 쾌쾌한 냄새를 풍기는 거적때기같이 추려한 우월감의 병이 내 속내에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한국도예를 전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에는 호텔은 커녕 아마도 오두막에서 기거하리라 생각하였으나 (주)EMKC (콩고공화국내의 1500km 철도건설을 계약 한 국내 기업)의 배려로 브라자빌의 초고급 호텔에서 기거하게 됐다. 최고급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모텔 정도 수준이었고 그래도 침대도 있고 TV와 풀장도 겸비된 호텔이었다. 여장을 풀고 도착한 짐을 풀어보니 라면은 부셔져서 라면땅이 되어있고, 또 다른 고추장은 터져있으며, 간장은 흘러서 짐은 간장과 고추장 냄새로 뒤범벅이었고 대부분의 박스는 뜯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전기가마와 물레 등의 기자재는 무사히 도착되었다. 짐정리를 하고 교통부장관이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맛있는 프랑스식으로 콩고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과일이나 먹고 라면이나 먹을 것으로 예상하였던 생각이 많이 빗나간 행운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상상은 바로 다음날부터 예언이 되어 돌아왔다. 가마를 지어주기로 한 공예센터를 방문한 다음날 아침, 비로소 아프리카의 빈민국인 콩고를 실감하게 되었다. 공예센터에 도착하여 보니 우선적으로 물이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화장실도 없었다. 화장실은 노천에 거적때기를 쳐놓은 것이었고 문은 아예 없었으며 변기는 자동차 타이어 안의 휠을 하나 뒤집어 놓은 것으로 그 위에서 볼 일을 보아야 했다.
돌맹이 세 개 위에 찌그러진 냄비를 걸쳐놓고 고구마나 옥수수 등을 넣어 끓여 먹고 있는 장면이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심심찮게 보였다. 콩고는 100여 년 동안 프랑스 통치를 받아왔고, 3차례의 긴 내전을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UN의 원조물자에 의존해 왔다. 자체 생산되는 생필품이 거의 없어 많은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물가는 한국의 3~4배 정도로 비싸고 인건비는 월 평균 10만원대에 머물러 있으니 서민들의 생활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빈곤하였다. 땔감이 없어 여자들이 머리에 몇 가닥의 나무를 이고 가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고 아이들은 대부분 맨발이거나 바닥이 해진 슬리퍼 종류를 신고 다녔고, 옷을 입기는 했지만 삶의 때 자국이 찌든 허름한 티셔츠를 걸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한국어를 가르쳐야 할 직업학교에 도착해 보니 우선 칠판이 없어서 합판에 검정 페인트를 칠해 놓은 임시 칠판을 사용해야 했고 학교주변에는 온통 쓰레기였다.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모여든 40여명의 학생들은 주로 대학생을 포함한 직업훈련생들이었는데 노트도 없고 연필도 없고 교재를 복사 할 데도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 측의 협조를 얻어 교재를 복사하는데 1주일이 소요되었다. 급한 대로 노트와 볼펜을 구매해(한국가격의 3배정도) 나누어 주고 기본적인 한국어 강좌가 시작되었다.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열성은 대단했다. 밥은 굶어도 한국어는 배워야겠다는 투지가 보였다. 그 이유는 한국어를 배우게 되면 (주)EMKC에 취업이 가능하고 취업이 되면 의식주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ㄱ’, ‘ㄴ’부터 시작한 한국어 강좌는 불과 10여일이 지나면서 한국어 인사를 정중하게 하고 안부를 묻는 등 급발전하였다. 귀국 즈음에는 한국어로 대화하는 내용을 어느 정도 감지하였고 종종 한국어로 의사표시를 하기도 하였다. 아마 3~4살 정도 아이들 수준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향상된 것이다. 한국어를 지속적으로 배우기를 희망하여 (주)E.M.K.C.측에 건의하여 상주하는 한국어 교사를 파견하게 되었고 항상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교제와 시청각 자료를 요청하여 보급해 주었다. 아마도 몇 년 내에 아프리카 전역에 한국어가 보편적인 언어로 사용되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성공적인 한국어 강좌에 비해 도예팀은 처음부터 시작이 원활하지 못했다. 우선 가마를 짓기 위한 고온용 벽돌을 살수가 없었다. 출국 전에 콩고 정부 측에 이미 문의하여 내화벽돌은 구할 수 없음을 알았지만, 최소 흙벽돌이라고 찍어서 건조하여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브라자빌의 형질이 대부분 사질이어서 점토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비포장 길로 2시간 남짓 외각으로 나가서야 흙벽돌 공장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나마도 돈을 주고도 살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3개월의 우기가 있는 콩고로서는 건기에 벽돌을 찍어서 건조하여 노천번조를 한 벽돌로 대부분의 주택을 짓고 있었기에 이미 1년 전에 벽돌을 주문한 양만을 생산하고 있었다. 3곳의 벽돌공장을 순회하였지만 한 장의 벽돌도 살수가 없었다.
1주일의 시간을 소비하면서 벽돌을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성사되지 못해 할 수 없이 상공부 장관실에 들려서 하소연을 하게 되었고 집을 짓기 위해 예약되어 있는 흙벽돌을 장관의 힘으로 우선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벽돌을 구하는 동안 평지였던 현장을 25도 경사면으로 만들기 위해 트럭 6대의 흙과 트럭 3대의 돌을 구매하였으나, 이 또한 돈을 주고도 트럭이나 포크래인을 사용할 수 없었다. 사람의 힘으로 상하차해야 한다니 한정된 시간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또한 교육부 차관의 힘을 빌려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건축자재상의 도움으로 운반되어 왔다. 물론 흙 값이나 운반비도 한국경비의 3배였다. 원자재를 수급하는 일에만 다시 1주일의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가마터의 기초공사가 이루어지고 흙벽돌을 사용한 가마짓기가 시작되었다. 이미 선발된 10명의 콩고사람들(가마짓기와 번조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과 박성철, 황우찬이 가마짓기에 투여 됐으나 첫날부터 그들의 문제점은 배가 고파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더위에 밖에서 하는 일이어서 그들에게 점심을 제공하기로 하고 음료수와 담배 등을 지급해가며 가마짓기 일을 하도록 달래었다. 그들의 한 달 급료는 한국 돈 10만원 정도인데 변두리 식당에서 10명의 한끼 식사비가 보통 10여 만원 정도다. 몇 차례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하였으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음식을 주문하여 먹는 시간이 평균 2~3시간 소요되는 것이었다. 문제점을 알아보니 식당에서 주문하면 그때부터 음식재료를 구매해 오는 것이다. 시간절략과 경비 절감 차원에서 한 끼에 한국 돈 2만원을 주며 알아서 먹고 오라고 하였더니 주로 프랑스식 빵과 간단한 음료수로 10명이 충분히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식당의 음식은 그들 수준으로는 비싸서 먹을 수가 없고 서민들은 주로 빵이나 콩고 원주민들이 먹는 카사바라(우리나라 김밥 같은 종류로 빵 반죽과 나무뿌리를 갈아 넣은 음식)를 길에서 사먹는 것이었다. 많은 파리들이 앉아있는 음식으로 인해 위생적으로 조금 어려움이 있어 가지고 간 라면종류와 김치 그리고 전기밥솥으로 끼니를 때웠다. 대부분의 대원들은 설사를 몇 차례 경험해야 했고, 콩고가 더울 것으로 예측하여 주로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몇일 지낸 대원들은 모기와 피를 빨아먹는 진드기에 다리부분을 집중 공격 받아 피부과 병원에 걸려 있는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처참한 피부상태로 결국 긴바지를 사 입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호텔 이부자리에 서식하는 정체불명의 벌레들을 소탕하기 위해 가지고 간 모기향을 수십개 피워야 했고 결국은 팁을 주고 모든 이부자리를 교체하고 나서야 해결됐다. 화장실이 급하면 20여분 떨어져 있는 호텔로 돌아와야 한 것과 내전 종식 된지 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위험하다는 정부 측 사람들의 권고로 저녁 외출 삼가하고 호텔 내에서 고스톱으로 무료함을 달래야 하는 창살 없는 감옥소 생활이 따로 없었다.
이채원 학생이 담당했던 전기물레 강의는 전기가 없는 관계로(전기설비는 되어 있지만 변압기의 고장으로 기간 내내 공예센터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다) 이뤄지지 못하였다. 결국 2주 후에나 직업훈련소로 옮겨 수강생들을 분산시켜 전기물레를 배울 수 있도록 했고 옹기물레 두 대를 활용한 성보성 학생의 지도로 생활용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임준형이 담당한 손성형반은 다행이 별 문제가 없었으나 실내가 어두워 햇볕이 드는 낮 시간에는 그런대로 강의가 진행되었지만 구름이 많이 낀 날에는 진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10여명 씩 편성된 각 반에는 한국의 도예를 배워보려는 학생들의 성원으로 고통스러운 콩고생활에 활력소가 되었다.
필자가 담당한 유약반과 번조반에서는 기본적인 유약 지식을 가르쳤고,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유약재료를 활용하여 몇 가지의 재유를 만들어 한국식 전통 재유의 고온용 유약기법을 전수하였다. 모든 유약 재료는 수입에 의존하여 사용되었으며 그나마 몇 가지 재료밖에 구할 수가 없었다. 산화철은 녹슨 자동차 부품에서 수거해 사용하였고 동은 동파이프를 구해 불속에서 태워 산화동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가마짓기 반은 모든 일이 중노동이었다. 10여일 만에 16m(3칸) 장작 가마를 완성할 즈음 필자를 포함한 모든 수강생들은 지쳐있었다. 도착한지 3주 만에 첫 가마를 지피는 날, 시장에 나가 돼지머리와 다리 두 짝을 사고 맥주와 빵 그리고 아껴 먹던 김치와 한국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첫 고사를 준비하였다. 정부관련 사람들과 수강생들 50여명이 참여해 나름대로 성대한 고사를 치루고 가마번조에 들어갔으나 문제는 콩고의 나무들이 대부분 한국의 참나무와 같이 아주 단단한 나무들이어서 숯이 너무 많이 쌓여 온도가 오르지 않은 것이었다.  하루 밤을 지새고 나서야 문제점을 발견하고 강제 연소를 시키기 위하여 팬Fan을 구하려 했지만 하루 종일 전 시내를 돌아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용접공을 수배해 팬을 만들었지만 발전기를 빌려와 전기를 넣는 순간 용접하여 만든 팬이 공중 분해되어 버렸다. 팬의 중심이 잘 맞지 않아서 일어난 사고였다. 번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용접공을 설득해 밤샘작업(전기도 없는 현장에서 발전기를 이용한 용접) 끝에 다시 만든 팬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2박3일 예상하였던 번조가 4박5일만에 마무리 됐다.
다행히 첫 가마 번조로써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첫 칸은 무유번조로 재를 녹여 색상을 얻었고(참나무종류의 재가 금색으로 녹아내렸다) 2번과 3번은 식염유번조를 하였다. 유약재료가 없어 특별한 유약을 사용할 수가 없었기에 무유번조와 식염유번조를 시도한 것이 다행히 결과가 좋았다. 단지 점토가 철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색상이 너무 어두운 것이 아쉬웠다. 다음 가마에는 분장토 기법을 활용하기로 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는 백토를 찾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시간관계상 백토는 찾지 못했으나 두 번째 번조에서는 분장토 기법이 적용되어 아주 좋은 번조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식전통장작가마에서 번조된 작품은 8월 15일(콩고의 독립기념일은 한국과 같다) 상공회의소 전시실에 전시됐다. 문화원정대와 콩고학생들이 45일간 함께 우리도예를 배우고 작업하여 얻어진 결과물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개최된 전시회는 독립기념일에 맞추어 양국간의 문화 교류에 초석이 되는 자리였다.
콩고는 불어권이어서 필자 스스로도 언어소통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영어통역을 고용하였고, 한국어를 조금씩 가르쳐 가면서 서로의 몸짓과 눈짓으로 의사소통 하였다. 가난하면서도 항상 음악과 춤을 좋아하고 밝게 웃고 순진함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콩고사람들과 도예라는 매체를 통해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현재 콩고에서는 프랑스 통치하에서 전기가마를 사용하는 저온유약 기법을 전수받은 한 두 명의 도예가들이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 모두 한국장작가마번조결과에 놀라워하였고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가마짓기와 번조 그리고 유약기법 전수와 물레기법, 성형기법 등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었다는 결과에 대해 놀라워했다.
문화교류팀의 활동과 함께 원광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파견된 12명의 의료봉사팀이 8월 7일에 파견돼 2,500여명의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의료팀의 봉사활동과 도예팀의 문화원정대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좋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아마도 이번 콩고 원정대의 활동이 양국 간의 문화교류는 물론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국민소득 1,000달러 밖에 안되는 콩고공화국을 포함한 아프리카 전 대륙이 무한대의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한대의 개발여지가 남아있는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한국의 학생들과 기업인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끝으로 이번 문화교류 팀과 의료봉사 팀의 파견을 적극 협조해준 (주)EMKC의 정동완 사장과 관계직원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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