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OF THE MONTH
혼동의 장을 손쉽게 구조화, 변형하는 ‘유전자 조작법’
엄성도의 <석고틀의 유전자 조작>
글. 홍지수 미술평론, 미술학박사
물질, 노동 그리고 공정의 간소화
석고성형은 손성형이나 물레성형과는 달리 거푸집을 이용해 형태를 만든다. 석고성형으로 추출한 흙의 형태는 거푸집 내부의 네거티브와 정확히 일치한다. 엄성도는 오랫 동안 석고틀에 자기슬립을 붓는 석고성형을 주기법으로 삼아 작업해 왔다. 그러나 그는 이번 <석고틀의 유전자 조작> (갤러리 일상)에서 원형과 거푸집 제작으로 이어지는 기존 석고성형 공정의 복잡함과 단점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다양한 형태를 만들었다.
자기슬립을 이용한 석고성형은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사물을 대량복제 하려는 이들에게 유용한 제작방법이다. 원형과 거푸집만 제작하면 같은 형태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방식이 가장 효율적인 성형 방식인가에 대해서는 나는 다소 회의적이다. 원형의 종류가 복잡, 다양할수록 제작해야할 석고틀의 구성과 조합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또한 창의를 발휘해야하는 원형 제작 못지않게 여러 피스가 맞물리며 그룹을 이루는 석고틀 제작 역시 노동과 물질, 시간의 투입이 녹록치 않다. 작가가 조금이라도 원형에 변화를 주고 싶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원형과 석고틀 제작이 뒤따르는 것이 기존 석고성형의 룰이다. 따라서 석고성형을 주 기법 삼는 작가들의 노동 강도, 물질과 시간의 총 소요는 결과물에 비해 가히 도자예술의 타 작업과 견줄 수 없이 중하고 지난할 때가 많다.
엄성도의 새로운 방식은 원형을 변경할 때마다 석고틀을 다시 제작해야하는 번거로움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킨다. 작업이 중한 노동으로 변질되고 반복된 행위로 지난해질수록 작가는 창의를 잃고 매너리즘에 빠져 들거나 흥미를 잃기 쉽다. 이를 피하기 위한 작가의 아이디어와 기술적 진보에 대한 노력이 <유전자 조작전>이다. 작업 중 작가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발상이 출현하고 변이하는 속도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구체적 물질을 다뤄야하는 손의 수행 속도보다 빠르다. 특히 질료의 무게가 무겁고 중력, 수분의 증발 같은 자연법칙에 순응해 실존적 사물을 만드는 도자 작업은 이러한 속도의 괴리가 더 큰 편이다. 더구나 석고성형은 흙의 결과물을 보기까지 원형과 석고틀 제작이라는 특수한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때문에 작가가 머릿속에 수시로 떠오르고 진격하는 발상과 창의의 속도에 맞춰 흙의 형태, 질감, 크 기를 변화하고 결과물을 즐겁게 만들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일은 석고성형을 주기법으로 삼아온 작가가 오랫동안 품었을 고민이었을 것으로 본다.
작업의 시작 즉, 작가가 형태 변화의 단위를 만드는 것은 원형을 깍고 그에 기준해 석고틀을 만드는 기존 방식과 동일하다. 그러나 엄성도의 ‘유전자 조작 방식’은 기본의 형태에서 변화를 도모하고자 할 때 효용의 진가를 드러낸다. 과거의 방식대로라면 형태가 바뀌었으니 원형을 다시 깎고 그에 맞춰 석고틀을 다시 제작해야 할 것이고 노동의 수고로움과 물질과 시간의 낭비가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석고틀의 내부에 모듈을 간단히 원하는 위치로 이동시키고 슬립을 접착제 삼아 고정해 간단히 해결했다. 기본틀의 내부에 어떤 모듈을 부착하고 위치를 이동할 것인지에 따라 내부 구조가 달라진다. 작가는 간단히 석고틀의 내부를 다양한 모듈의 결합으로 바꾸고 종류가 다른 석고틀과 석고틀을 결합하여 원형과 거푸집 제작이라는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생략할 뿐 아니라 조합의 수와 크기를 다변화한다.
작가는 이러한 형태의 변이를 ‘유전자 조작’ 즉,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세포의 유전자 교정Genome Editing에 비유한다. 유전자 가위는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 세포의 특정 염기서열DNA 구간을 절단한 후 다른 유전자를 빼거나 더해 새로운 초유전체를 만드는 과학 기술이다. 작가는 형태, 텍스처, 모듈 조합의 특이성에 따라 A타입부 터 I타입에 이르기까지 8가지의 유형을 구분하고 있다. 바다생물체의 생명력과 형태의 기이함을 생명 존중과 경외로 연관시켜 오브제를 작업해온 그의 전작들을 고려했을 때, <유전자 조작>이라고 명명한 이 연작의 발상이 전작에 근거하거나 확장된 것이 아닌가 연관지으려 할 수 도 있겠다. 그러나 나로선 이번 연작은 작가가 전작에서 다뤘던 작가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나 과학적 관심의 발로와는 무관해 보인다. (‘유전자+○(알파벳)타입’이라는 명명은 작품의 형태와 알파벳의 생김새와도 무관하다.) 나는 이러한 명명命名이 석고성형에 있어 그가 도모한 새로운 방식이 갖고 있는 이점과 발상이 유전자가위의 개념만큼이나 자유롭고 편리하다는 것을 알파벳 서열을 전용해 설명하려는 작가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혼돈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그러나 정작 제작 기술의 진보나 혁신 이면에 우리가 엄성도의 <유전자 조작>에서 놓치지 않고 주목해야 할 것 은 작가가 간단한 형태들-직육면체, 타원기둥 등을 어떻게 형태 전환하고 있는가에 있다. 기본단위를 다양한 질 감과 크기의 묘듈의 위치를 변경하여 새로운 변이를 출몰시키는 조작 방식은 개체 간 유사성과 사건의 연속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의 형태는 무엇보다 ‘일어 남-발생-사건’의 개념과 관계한다. 여기서 각각의 개체 속에서 사건은 단일하며, 그 나름의 특이성을 가진다. 따라서 엄성도의 구조물이 품은 사건은 서로 파생된 관계 이지만, 먼저 어떤 것이 ‘일어난다’는 순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먼저 일어난 게 ‘무엇’이고,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다. 각 유전자타입의 그룹은 작가가 수시로 단위 형태의 변화를 파생하고 새로운 면모를 궁구하며 발생시킨 시각적 변화의 추이를 노출하지만 서열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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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0년 12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