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쌓고 깎아내며 층층이 기억을 형상화하는 연리문連理紋. 김인식 작가는 주로 백색 소지를 활용한 ‘백연리白練理’ 기법으로 자연과 시간, 그리고 내면의 흔적을 도자에 담는다. 그를 만나, 서울과 교토를 오가며 쌓인 기억이 흙의 물성과 어떻게 얽히고, 장인의 손길로 어떻게 피어나는지 들었다. 그가 매진해온 백연리는 기억의 흐름을 품은 시간의 기록이다.
「器憶 2411-5」 ⵁ28×h36.5cm | 1250℃, RF, 무유, 연마
◎ 연리 작업을 통해 기억을 형상화하고 계시는데, 흙을 쌓고 깎아내는 과정이 작가님이 떠올리는 기억의 형성과 소멸 과정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삶이라는 과정 안에서 점점 잊히기도 하지만, 특정 장소나 음악, 어떠한 향기나 인물 등을 접하게 되며 망각하고 있던 기억이 다시 회상되기도 합니다. 한 작품 안에서 역시 특정 소지가 깎이는 과정을 통해 정형 전에는 명확히 눈에 보이던 소지의 색감이 희미해지다가 없어지기도, 또 깊은 곳에서 드러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던 소지의 색감이 오히려 선명히 드러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이 저의 기억의 흐름과도 유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백색 소지를 사용한 ‘백연리白練理’ 기법은 일반적인 연리 기법과는 차별화된 방식입니다. 이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와 이 기법이 작가님의 작업에서 가지는 의미를 듣고 싶습니다.
일본의 경우 소지의 종류가 입자별, 컬러별 등으로 정말 다양했습니다. 백색 소지의 종류 또한 다양했는데, 특히 백자의 경우 한국에서 사용 경험이 없던 탓에 사용해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제한된 소지로만 작업을 하다가 풍부한 원료 및 재료가 있는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소지를 사용해 보게 되면서 백색이어도 색감과 질감의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고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도예계는 현재 백자 소지 사용의 대중화에 따라 색소지를 사용한 연리문 기법 또한 많은 작가가 활용 중입니다. 하지만 유학 이전이었던 2000년대 한국에는 백색 소지가 다양하지 못했고, 연리문 작가 또한 지금처럼 많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일본은 비교적 연리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 생활을 하 면서 자연스럽게 연리 기법에 노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대다수의 연리 작가들은 컬러를 활용하였기에 차별화된 연리작업을 위해 오히려 색을 뺀 백색 소지만 사용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사용하는 기법을 ‘백연리’ 기법이라고 표현하며 본격적으로 백연리 기법의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비해 연리문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 중이던 일본으로의 유학은 다양한 소지에 노출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와 동시에 한국에서 잊혀져가던 연리문이라는 기법을 다시 시도하여 재해석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억이라는 작업 주제와 전통을 기반으로 한 현대적 연리문 기법을 발견하게 해주어 제것을 찾게 해 준 저의 작업인생에서 큰 의미를 갖는 기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痕跡 Kyoto-1」 ⵁ29×h62cm | 1250℃, OF, 무유, 연마
◎ 일반적인 연리문은 색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은 주로 백색 소지 만을 활용한 연리 작업을 하십니다. 색이 아니라 질감과 층을 통해 표현하는 백연리 기법의 독창성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소지가 가지는 본연의 물성 표현의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연리의 경우 시각적 효과만 있다면 저의 백연리 작업은 시각적 자극은 오히려 줄이고 표면의 다양한 질감과 표정들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수축률로 발생하는 흙의 미세한 뒤틀림과 소지별로 다르게 표현되는 질감 등을 통해 보다 풍부하면서도 입체적인 표현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 서로 다른 성질의 백색 소지를 사용하면서 겪는 기술적 난제(수축률 차이로 인한 균열, 파손 등)를 어떻게 극복하고 계신가요?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끊임없는 작업과 연구를 통해 그러한 난제들을 조금씩 줄여나가기 위하여 그저 한 번 더 신중히, 조심히 작업할 뿐, 극복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성을 컨트롤하고 극복한다기보다는 재료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제작자와 재료간의 합을 맞춰가는 과정의 연속인 듯합니다.
「器憶 2411-5」 ⵁ26×h35.6cm | 1250℃, RF, 무유, 연마
◎ 연리문 작업에서는 우연성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작가님은 작업 과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우연성을 허용 하시며, 어떤 방식으로 통제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잊고 싶다 하여 잊히지 않고, 기억하고 싶다 하여 영원히 기억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작업에 영감을 주는 자연이라는 것 또한 그렇구요. 우연성으로만 작업을 하지 않지만, 굳이 통제되지 않는 부분을 억지로, 인위적으로 통제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흙 조합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의 우연성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형 및 정형 과정에서는 원하는 형태와 선의 표현을 위하여 조금 덜 깎기도, 과하게 깎아내기도 하며 작품을 통제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통제한다고 하여 원하는 대로 완성되어 주는 것만이 아님을 알고 있고, 불에 들어갔다 나오면 작업 특성상 소지별 수축률 및 질감의 차이가 확연히 표현되기 때문에 이러한 영역은 저의 통제가 어려운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최선을 다해 통제했다면, 제가 통제한 영역 외에서는 과하게 휘었다거나, 균열이나 깨짐이 생겼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에 맡기기도 합니다. 우연성에만 맡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엄격히 통제하지 않으며 우연과 통제가 적절히 활용하여 조화를 이루도록 제작하고 있습니다.
◎ 작가님의 작업에서는 기억이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쌓이고 변화하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요?
결국 자연입니다. 자연은 흔적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그 변화에 따라 남겨지기도 소멸하기도 합니다. 기억 또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흔적으로 남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쌓여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의해 기억이 쌓이고, 쌓인 기억들은 잊히기도 선명하게 남아있기도 합니다. 저는 기억을 주제로 하여 작품에 자연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그러한 자연의 형상을 보며 회상된 저의 기억을 기器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자연으로부터 자극이 없다면 풍부한 표현이 불가능하게 되고, 결국 기억이라는 주제로 밀도 있는 작업을 하기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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