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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월호 | 뉴스단신 ]

구름雲이 용龍을 따르고
  • 편집부
  • 등록 2018-01-10 16:4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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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자기 속 그림, 그림 속 도자기 ②

「백자청화동화운룡문호
白磁靑畵銅畵雲龍文壺」 19세기, 높이 28cm, 개인소장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갱신했던 한국 도자기의 대명사인 「백자철화운룡문호白磁鐵畵雲龍文壺」는 1996년 10월 크리스티 뉴욕에서 765만달러(한화 약 63억 4천만원)에 낙찰되었다.1) 구연이 살짝 안으로 직립해 있고 그 아래 풍만하게 벌어진 어깨 아래로 동체가 사선으로 좁아들다 살짝 벌어지는 완만한 S자 형태이다. 용의 얼굴에는 쌀알만한 점이 장식되었고, 갈기는 뒤로 살짝 넘기다 앞으로 넘어오는 듯한 형태로 그려졌으며, 긴 수염은 앞쪽으로 물결치는 모양이다. 구연부에는 당초문唐草文과 그 아래 변형된 연판문蓮瓣文이, 하단에는 수파문水波文이 장식됐다.

백자 항아리에 철화로 용을 그려 넣은 용준龍樽 중에서도 용의 표현이 이와 같이 섬세하고 비늘이나 구름 내부를 채색하는 것은 상품上品에 해당한다. 표현상의 특징이나 보조문양대의 양상으로 보아 경기도 광주 상림리(1629-1640) 또는 선동리(1640-1649) 출토 자기편磁器片에 시문된 운룡문과 유사하며, 기형은 약간 다르지만 이와 가장 유사한 문양 및 구도의 운룡문호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연 및 하부에는 동일한 보조문양대가 장식되었고 용의 얼굴이나 몸통의 묘사 및 구도, 구름의 형태와 채색 방식으로 보아 같은 양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크리스티에 출품된 운룡문호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에서 눈에 띄는 차이점은 크리스티 출품작에 시문된 용의 몸통과 팔 사이를 가리고 있는 한 무리의 구름이다. 흔히 용준龍樽이라 지칭되는 고급 자기에서는 보기 드문 표현방식으로, 왕실에서 소용된 기물로서 용이 강조되는 만큼 보통 용을 중심으로 구름이 주변에 장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는 조선 후기 진연의궤 등에 기록된 화준畵樽 도상에 한결같이 나타난다. 이처럼 용과 구름을 따로 그리지 않고 용의 동체를 가리는 형태의 운룡문이 시문된 자기는 대개 철화로 그려졌으며, 일부 청화로 장식된 예가 있다.

도자기 속 운룡문
용의 몸통을 가리는 구름을 하나의 문양으로써 장식한 이러한 「백자철화운룡문호」는 여러 점이 전세되고 있어 상당히 많은 수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철화로 운룡문을 그린 항아리는 광주 신대리(1665-1677)와 이어 금사리(1721-1751)에서도 비늘 및 구름 등이 그려진 도편이 확인되어, 세밀함이 떨어지기는 하나 17-18세기에 걸쳐 계속 생산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가평 하판리 등에서 발굴된 여러 점의 철화 운룡문호는 용의 몸통 중간중간 구름을 그려 마치 절단된 것처럼 보이는 거친 형태로 장식된 것이 확인되었다.

용의 몸통을 가리는 구름을 하나의 문양으로써 시문한 예는 청화백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청화운룡문호白磁靑畵雲龍文壺」를 들 수 있다. 이 유물은 구연이 살짝 벌어지고 완만하게 벌어진 어깨는 동체 중앙에서 최대경을 이루며 그 아래로 완만하게 좁아드는 원호圓壺이다. ‘달항아리’로 널리 알려진 이와 같은 기형은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생산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완전히 도식화되고 평면적인 형태의 용과 구름이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구연 근처의 구름을 헤치고 여의주를 향해 수염을 휘날리며 내려오는 듯한 용의 얼굴과 몸통에 이어 구름 사이사이로 팔다리 및 몸통이 기면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생산된 이 항아리들은 사용된 안료나 생산지에 따른 질적 완성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시문된 문양을 보았을 때는 몸통의 양 끝에 그려지는 구름의 형태나 구도 등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이르면 청화백자의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운룡문 또한 장식문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전세품을 보면 둥근 원호가 많이 생산된 조선 중기에 비해 입호立壺가 주로 만들어졌는데, 용의 몸통에는 뭉게구름과 같이 양감을 선으로 묘사한 구름을 함께 그려 넣고 주변에는 영지 형태의 채색된 구름을 장식하였다.
이후 19세기에는 청화백자의 대량 생산으로 문양의 완성도가 떨어지면서, 용의 묘사가 흐트러짐에 따라 구름도 소용돌이 형태 등으로 간략하게 묘사된 예가 확인된다. 경우에 따라 용 및 구름에 동화 안료 등을 사용하여 장식성을 더하거나 병 등 다른 기형에 장식된 예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그림 속 운룡도상
조선 후기 자기에 전문적으로 문양을 시문하는 화청장畵靑匠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화원畵員이 자기에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철화로 시문한 용준과 같은 양질의 자기에도 몸통과 팔을 잇는 경계에 구름이 그려졌다는 것은 기물에 용을 그려 넣기 전부터 구름과 용이 혼재된 도상을 인식하고, 자기의 문양으로 그렸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중기 유입된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수록된 「운룡도雲龍圖」를 보면 상당히 유사한 형태의 용과 구름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직선으로 그려진 용의 뿔이나 얼굴 주변의 갈기와 수염, 뭉게구름과 같은 곡선으로 이루어진 구름을 선묘로 묘사한 모습 등이 동시기 백자에 시문된 도상과 흡사하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고씨화보를 소장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에 영향을 받은 다양한 운룡도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 윤덕희尹德熙(1685-1776)가 1719년 편찬한 『윤씨가보尹氏家寶』 및 『가전보회家傳寶繪』에는 고씨화보에 수록된 용과 유사한 구도의 「격룡도擊龍圖」, 먹구름 속의 용을 묘사한 「희룡행우도戱龍行雨圖」 등이 실려 있다. 감상용 그림에서 용은 영물의 대표격인 용은 주로 신선과 같이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와 함께 등장하여 신통력을 높이는 존재로 그려지는 한편, 민간에서는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해준다고 여겨 먹구름을 감싼 용을 많이 그렸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2)
윤덕희 또한 아버지 윤두서에 이어 용 그림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듯 여러 점의 운룡도를 남겼는데, 녹우당에 소장된 「목각운룡도木刻雲龍圖」는 윤두서의 「희룡행우도戱龍行雨圖」를 참고하여 제작한 것처럼 용의 형상이 매우 유사하다.3) 동일하게 고씨화보를 모본으로 하는 듯 양각陽刻으로 새긴 용의 눈썹과 수염, 갈기와 같은 얼굴 묘사 및 몸통의 주름과 비늘 표현, 용의 몸통을 감싼 여러 겹의 선으로 표현된 뭉게구름과 그 아래 수파문의 묘사까지 일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회화 속의 운룡문에서는 농담을 사용해 먹으로 채색한 구름을 목공예에서는 여러 겹의 선으로 파내 양감을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이후에도 18-19세기에는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나 이인문李寅文(1745-1821)과 같은 화가들이 여러 점의 「운룡도雲龍圖」를 남겼는데, 먹구름 속에 군데군데 드러난 용의 얼굴과 팔다리, 몸통을 묘사한 것은 고씨화보의 구도 및 표현과 동일하다. 19세기에는 민화의 유행에 따라 구름에 감싸인 용 도상이 단독으로 그림의 소재로 사용되거나 또는 화훼영모도花卉翎毛圖와 함께 그려지는 등 널리 애호되었으며, 책가도冊架圖에서조차도 용이 구름과 함께 꾸준히 묘사되고 있어 이와 같은 운룡도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8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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