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터 발굴을 통한 도자사적 성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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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훈 경기도자박물관 학예연구실장
20세기 초, 우리나라 도자사 연구는 고려청자와 같이 무덤에서 출토되거나 전세傳世된 도자유물들에 대한 골동적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점차 인문학으로 확립된 도자사가 한 시대의 도자문화와 미의식의 변천을 탐구하고 요업기술의 발전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역사자료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 도자기는 예술품의 관점 보다는 수공업제품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일부 왕실 의례용기 등을 제외하면 고문헌에 언급된 예가 그리 많지 않다. 문헌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나라에 선사시대부터 도자기를 생산한 가마터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오늘날 도자사 연구는 이 가마터들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발굴조사의 기술도 향상되어 단순히 가마와 새로운 유물을 발견하는 수준을 벗어나 과학수사대가 범죄현장을 보존하고 증거를 수집․분석하듯이 가마터를 과학적으로 조사․연구함으로써 당시 가마터에서 이루어졌던 도자생산의 시기와 목적, 규모와 방법, 가마의 운영상황이나 생산품의 실체 등을 폭넓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청자 연구에서 주요성과
일제강점기부터 고려 도자공예의 진수인 청자를 생산한 가마에 대한 궁금증은 대단했다. 해방이후 1960년대, 고려청자의 주요 생산지인 강진 사당리를 시작으로 부안 유천리, 인천 경서동, 80년대 강진 용운리, 고창 용계리, 용인 서리, 90년대 해남 진산리, 배천 원산리, 시흥 방산동, 2000년대 강진 삼흥리 등지의 청자가마가 발굴조사되면서 이러한 궁금증을 상당히 해소해 주었는데, 특히 가마의 구조나 번조방식 등 제작기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지금까지도 고려도자 연구에서 가장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부분은 고려청자의 발생시기와 배경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1980~82년간 발굴조사된 강진 용운리 9, 10호 가마의 퇴적층에서는 8세기말~9세기전반 중국 당나라의 청자 옥벽저완玉璧底碗과 유사한 한국식 청자 해무리굽완이 발견되었고, 상층으로 갈수록 점차 퇴화되어 보편적인 윤형굽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확인되었다. 이후 발굴된 용인 서리(1984~88)와 배천 원산리(1989~90), 시흥 방산동(1997~98), 여주 중암리 가마터(2003)에서는 한국식에 앞서는 중국식 선先해무리굽완의 존재가 확인되었을 뿐 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점토를 쌓아 축조한 토축식土築式 자기가마가 아닌 점토벽돌을 길이 40m 가량의 터널모양으로 쌓아올려 만든 대형 전축식塼築式 가마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가마구조는 중국 월주요 청자가마와 같은 것으로 우리나라 초기청자가 월주요 청자와의 기술교류를 통해서 발생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특히, 1991년 발굴조사된 북한의 배천 원산리 가마터에서는 굽 안바닥에 “순화 3년”(992)의 연대가 음각된 청자제기편이 발견되어 전축식 가마의 운영이 10세기까지 이루어졌음을 알려줄 뿐 만 아니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청자 순화 4년명 항아리」(보물 237호)의 생산지 역시 원산리 가마터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용인 서리와 시흥 방산동 가마터에서는 청자 이외에도 백자와 상감청자, 상감기법의 흑유편 등이 함께 발견되어 고려초부터 고려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였음은 물론 그동안 12세기에 발생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상감청자 역시 고려초까지 그 상한을 올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도 고려청자 가마터의 발굴조사에서는 갑발과 갑발받침, 도범陶范, 도침 등 다양한 가마도구가 발견되어 청자의 생산방법이나 생산품의 품질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즉, 갑발을 사용하는 강진이나 부안의 고급청자와 달리 인천 경서동(1965~66), 해남 진산리(1991), 대전 구완동(1995), 용인 보정리(2002~03), 부산 녹산동 가마터(2010) 등지에서 발견되는 청자는 생산방법이 간소하고 대량생산의 흔적이 보이며 상대적으로 품질은 조질이었다. 이는 고려청자가 수요층에 따라 차별화된 제작방식과 기술을 적용해 생산․유통되었음을 알려주는 근거로 오늘날 고려시대 도자사연구가 시대와 지역, 생산과 수요계층에 따라 보다 다각적으로 접근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분청사기 연구에서 주요성과
조선도자의 주류는 분청사기와 백자이다. 이 가운데 분청사기는 일찍이 1927년 일본인들에 의해 공주 학봉리 가마터가 발굴된 바 있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는 분청사기의 다양한 표현방식과 명문, 백자로 이행과정에 대한 관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주요 성과로는 광주 충효동(1963, 1991), 공주 학봉리, 고창 용산리 가마터(2001~02) 등의 발굴조사가 대표적이다. 특히, 1991년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된 광주 충효동 가마의 퇴적층에서는 1457년경부터 인화․조화․박지분청사기와 함께 백자가 출토되었는데 1510년 층위까지 점차 귀얄분청사기와 함께 백자의 출토량이 증가하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이 발굴로 인해서 분청사기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멸되었다는 기존 일본학계의 주장과 달리 분청사기는 조선백자가 전국적으로 보편화됨에 따라 자연소멸하였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증명되었다.
그밖에도 여러 분청사기 가마터의 발굴조사에서는 연대나 관사명官司銘, 생산지명 등이 시문된 분청사기 명문편들이 발견되었는데, 공주 학봉리 가마터(1992~93, 2차 발굴)에서는 “성화 23년(1487)”, “홍치 3년(1490)”, “가정 15년(1536)” 등의 연대가 씌여진 상감 및 철화묘지편이 출토되어 요업시기와 함께 철화분청사기의 유행시기를 알려주었다. 또한 연기 송정리(1990)와 칠곡 학하리(2007)에서는 “사선司膳”, 보령 용수리․평나리(1995)에서는 “장흥長興”, 천안 내곡리(1996)와 부안 용수리(2001)에서는 “내섬內贍”, 대전 구완동(1995)에서는 “내자집용內資執用”, 합천 장대리(2009~2010)에서는 “삼가장흥고三加長興庫”와 “인수仁壽”, 기장 장안동(2009)에서는 “울산장흥고蔚山長興庫”의 관사명과 생산지명이 출토되어 고려말 분청사기의 발생과 조선초 분청사기의 공납과 관련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백자 연구에서 주요성과
조선백자는 왕실주도의 사옹원 분원司饔院 分院이 설치된 경기도 광주일대의 관요官窯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된 가운데 전국적으로 많은 지방백자 가마들이 발굴조사되면서 근래에는 관요와 지방요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 졌다. 먼저 관요는 광주 시장柴場 내에서 땔감이 무성한 곳을 따라 약 10여년마다 그 위치를 옮겨 설치했기 때문에 발굴이야말로 각 관요가마터의 운영시기와 백자의 양식변천을 밝히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964~65년간 발굴조사된 광주 도마리 1호 가마터에서는 매우 뛰어난 품질의 백자, 청화백자편과 함께 “을축 8월(1505)”명이 새겨진 토봉土棒이 출토되어 가마의 운영시기를 추정할 수 있었다. 또 광주 번천리 5호(1985)와 9호 가마터(1997~98)의 발굴조사에서는 각각 “가정 33년(1554)”명 묘지편과 “가정임자(1552)”명 묘지편이 출토되어 번천리 일대에서 1550년대에 분원 관요가 운영되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광주 우산리 9호 가마터(1992)의 발굴에서도 “임인(1482 혹은 1542)”명 묘지편이 수습되어 가마의 운영시기를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중기 가마로는 광주 선동리 2․3호 가마터(1986, 2011)에서 철화백자와 함께 1640~1648년간의 간지干支가 음각된 파편이 출토되었고 광주 송정동 5․6호 가마터(2004~06)에서도 1649~1653년간의 간지명 파편이 발견되어 그 운영시기를 알 수 있었다. 조선시대 마지막 관요인 광주 분원리 가마터(2001~02)도 발굴조사되어 가마와 작업장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퇴적층에서는 다양한 양식의 조선후기 청화백자편이 출토되어 조선후기 백자의 형태와 문양을 고찰하는데 기여하였다. 이처럼 광주일대의 분원관요 가마터에 대한 조사는 가마의 운영시기와 이동경로를 확정함으로써 조선백자 양식변천의 편년기준을 마련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조선백자 가마터 발굴에서 또한가지 주목되는 성과는 도자기 제작기술의 발전과정을 밝힐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직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분원 가마를 비롯한 다수의 지방가마의 발굴을 통해서 가마의 구조와 공방시설, 가마도구 등 요업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축적되었다.
지방에서는 군포 산본동(1990)과 안동 신양리(1991), 보령 용수리(1995), 산청 방목리 (1996), 경산 음양리(1999~2000), 하동 백련리 가마터(2001) 등지가 발굴되어 조선전기 백자가마의 구조가 밝혀졌다. 전기 백자가마는 고려청자나 분청사기 가마와 유사하게 내벽폭이 좁고 나란하며 번조실이 각 칸의 구별이 뚜렷치 않은 단실單室로서 몇 개의 불창기둥으로 공간을 구분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 가마인 승주 후곡리(1986~87), 곡성 송강리(1993~1994), 안성 화곡리(1999), 충주 하구암리(1999~2000), 부여 정각리(2000), 대전 장안동(2000), 울산 방리(2002), 순천 문길리(2002), 영동 노근리(2002~03), 원주 귀래리(2002), 무안 피서리 가마터(2001)에서는 기물에 모래를 받쳐 포개굽는 대량생산체제를 발달시켰으며 가마의 구조 역시 각 칸이 독립적으로 구분되어 생산성이 높은 연실連室 칸가마로 전환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발굴된 자료에 다르면 단실에서 연실로 가마구조가 변화되는 것은 16세기 말 대전 정생동 가마(1997)로부터 17세기 초 장성 대도리 가마(1992)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2012년 8월호 특집기사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