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 도예가
변기-여성적인 것-도예
<변기: 이행과 통로의 장소>는 toilet에 대한 리서치 베이스의 작업으로서 변기와 여성적인 것, 도예의 연관성을 연구한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을 연구하고 도예작업을 하는 작가로서 나의 관심은 두 학문적 영역이 겹쳐지는, 혹은 두 영역을 흐리게 하는 것에 있다. 여성적인 것, 도예, 그리고 변기는 체계를 구성하는 구성적 외부로, 휘발하고 마는 토대로 존재해왔다는 점에서, 과정 중에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방식을 위한 통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서구담론이 간과해 온 사이개념in-between과 모성적/여성적인 것maternal/feminine에 근거해 ‘여성적인 것’을 상호주체성을 위한 통로로 재규정한 루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의 이론에 따라, 나는 변기를 몸에서 나온 배설물을 담는 고정적이고 수동적인 용기가 아닌 사이-공간, 혹은 통로로서 재규정한다.
여성은 없다? 여성과 몸1)
정신이 주체의 자리에 앉으면서 지워진 것은 여성으로 대변되는 육체였다. 나는 엄연히 육체로 존재하지만 육체는 주체담론에서 항상 배제되어왔다. 그나마 육체를 다시 담론의 장으로 가져 온 것은 정신분석학이지만 그들이 가져온 몸은 남성의 몸이며, 남성의 몸은 여성이라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일종의 기준역할을 하면서 지워진다.2) 남성들이 자신의 육체를 지우고 정신적 존재로 비상하고자 했다면, 페미니스트들의 여성육체의 재발견은 차이의 공존과 다원성의 논리를 보여주고 그것을 전략화하는 것이다.
이리가라이는 서구담론에서 여성의 재현은 불가능하며 성차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신/몸, 남성/여성 등의 이분법에 의해 여성은 비본질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폄하되어왔다는 기존의 주장과는 맥락을 달리 한다. 이리가라이의 주장에 따르면 이 땅에는 남성과 여성이 아닌, 단 하나의 성만이 존재해왔다. 남성/여성이 아닌 실상 남성이 이분법의 양편 모두를 점유해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은 오직 하나뿐인 남성주체를 되비쳐 주는 거울일 뿐이며, 서구담론이 자신을 생산해내기 위해 억압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것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조건, 근거, 토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리가라이는 “이제까지 주체에 관한 모든 담론은 ‘남성적인 것’에 대한 담론이었다”3)고 천명하고 이분법적 사고가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작동시키는 방식을 문제 삼는 동시에 휘발해버리고 만 여성 몸의 흔적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디에? 잊혀진 통로로서의 “여성적인 것the feminine”4)
이리가라이는 사라져버린 여성 몸의 자취를 밟기 위해 플라톤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 그리고 마침내 ‘여성’과 ‘사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더 정확하게는 어떠한 방식으로 ‘사라지는지를’ 더듬어낸다. 이리가라이는 플라톤에게는 진리를 위해 빠져 나와야만 하는 동굴을 ‘자궁hystera’으로, 플라톤에게는 아무 의미없던 동굴입구는 ‘통로’로, 플라톤에게는 유일한 진리인 태양은 상징적 아버지로 파악한다. 중요한 것은, 지식과 진리가 출산되는 과정을 묘사한 동굴의 비유에서 모성적/여성적 몸6)이 제거된다는 사실이다. 진리를 위해 동굴에서 나가는 것은 모성적 몸을 거부하는 것이고, 질료성을 거부하는 것이며, 동굴과 바깥세상 사이의 통로를 잊는 것이다. 즉, 재현의 미디움(모성적/여성적인 것)과 재현의 과정(버자이나로 상징되는 통로)을 잊는 것이다.
이렇게 이리가라이는 동굴의 비유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질료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연결하는 ‘잊혀진 통로’를 발견해 냄으로써 모성적 매개를 복원해 내었다. 몸에, 물질에 의존하는 것을 감추고 이성이 자신을 기원이라 할 때 잊혀진 것은 ‘통로’였다. 이리가라이는 동굴의 질료적 그림자로부터 이데아의 밝은 세계로 나가는 것을 두 영역을 연결하는 간격, 혹은 상호의존성을 지우는 것이라고 보았다. 질료와 이성을 연결하는 통로를 잊음으로써 질료적인 것은 이성의 질서에서는 재현불가능한 것이 되었고, 질료는 이성의 ‘구성적 외부constituitive outside’7) 로 전락한다. 그러나 질료와 이성을 연결해주는 잊혀진 통로를 회복해냄으로써 이리가라이는 개념과 주체성이 질료와 이성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안에서(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되지 않고) 일어날 수 있음을 밝혀내었다.
바로 이것이 이리가라이가 말하는 ‘여성적인 것’이다. 남근담론이 자신을 기원으로 만들기 위해, 자가발생적 존재로 만들기 위해 토대로서 사용하고 은폐해 버린 것, 그러나 그럼에도 흔적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가라이가 논의하는 ‘여성적인 것’은 전통적인 이분법적 구도에서의 개념이 아니며 이러한 여성성은 단지 모성적 몸이나 그 어떠한 것으로도 현재의 재현체계에서는 재현될 수 없다. 이리가라이의 여성성은 남근경제가 그 맹점을 나타낼 때까지 전략적으로 취해진 것이다. 이리가라이의 여성은 그래서 과정 중에 있다.
여성적인 것-도예: 사이개념과 질료성을 체현하는 도예
질/질료로서의 흙과 가정적/장식적 의미를 함축하는 공예로서의 도자개념은 여러 층위에서 ‘여성적인 것’과 맥락을 함께한다. 도예는(미술사적 맥락에서 보여지듯이) 이분법적 구도의 예술개념에서 배제되고, 간과되고, 탈락되어 왔던 ‘재현불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공예는 예술이 아닌 비-예술, 장식, 때로는 키치라는 이름으로 저급미술로 인식되어 왔다.8) 하지만 플라톤의 동굴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모성과 질료가 은폐되지만 그럼에도 체계를 이루는 토대이듯이, 공예적 요소는 예술작품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범주로서의 도예의 운명이 그러하다면, 물질/질료로서의 도예는 어떠한가? 도예작업을 이루는데 필수요소인 흙, 공기, 물, 불의 4원소는 이리가라이가 동굴에서 복원해 낸 질료와 연관된다. 4원소로 대표되는 질료성은(이미 동굴의 비유에서도 보았듯이) 남근담론에서 잊혀지고 지워진 것으로서의 여성적/모성적인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리가라이는 자신의 전 작업을 통해 서구문화가 4원소를 망각해 왔음을 지속적으로 비판함과 동시에 4원소를 추구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질료/형상 등의 이분법을 재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리가라이가 논의하는 질료성은 전통적 정의를 벗어난 질료성이다. 남성/여성, 형상/질료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형상의 반대 항으로서의 질료가 아닌, 남성을 되 비쳐 주는 거울로서의 질료가 아닌, 근원적인 질료를 의미한다. 이러한 물질적 특성을 사용하는 것은 이미 남근중심적 언어로 개념화되어 있는 틀이나 시스템을 피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틈새를 빠져나가는 담론을 가능하게 해준다.
도예는 물질/질료로서의 흙과 여성적 의미를 함축하는 범주로서의 공예개념을 체현해내면서 공예/예술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에 빠지지 않고 양자를 넘나들고 매개하는 역할을 할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질료로서의 흙은 주변의 변화에 따라 수축되고, 균열을 일으키고, 성분을 변환시키는 과정중인 주체이며, 과정이 중시된다는 것은 다시금 동굴에서 복원해 낸 통로를 상기시킨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0.06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