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실은 차茶를 전담하는 기구인 다방을 설치하고 왕이 밖으로 행차할 경우에는 수행하는 차군사茶軍事가 별도로 있어서 어느 곳이든 다회를 개최하여 차를 즐길 수 있게 하였다. 왕실의 차문화는 당시 국교였던 불교와 함께 사찰에도 영향을 주어 사찰 주변에 다촌이 형성될 정도로 번성하였으며 지방호족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번져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다소나 다점이 생겨났다. 중앙의 왕실부터 지방의 호족들까지 다회가 성행하여 세상의 돌아가는 이야기나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할 때도 차모임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123년 고려국을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금徐兢(1091년~1153년)의 사행록使行錄인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국 왕실의 접빈다례接賓茶禮에 대해 기술되어있다. “하루 세 번 사신에게 차를 대접하는데 뜰 가운데서 차를 끓인 후 순서대로 차를 돌린다. 차를 다 돌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함께 마시는데 기다리다가 차를 마실 때쯤이면 식어서 맛이 없다.” 고려 왕실에서 사신에게 하루 세 번씩 차를 대접했다는 것은 차 문화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고 차를 다 돌릴 때 쯤 차가 식어 버린다는 것은 많은 대신들과 함께 차를 마셨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사찰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중요한 공양물로 최상급의 차를 선택하여 바치고 수행승修行僧들이나 공양을 드리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긴요한 음료로서 왕실과는 다른 별도의 차의식茶儀式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왕실, 사찰, 지방호족, 평민까지 생활화된 차문화의 발전은 실내외에서 각종 모임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임들은 실내는 물론이고 야외에서도 성행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야외용 도자기 의자에 대해 살펴본다. 대부분 의자는 팔걸이와 등받이가 있는 나무로 만든 것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외에서 모임을 할 때는 의자를 실내에서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항상 야외에 배치해 둘 수 있는 의자를 도자기로 만들면 내구성이 강한 도자기의 특성으로 사계절 밖에 놓아도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도자기로 만든 의자는 스툴stool 형태로 등받이는 없고 배부른 원통형이며 조선시대 중부지방의 옹기항아리 모습이다. 높이는 40~50cm 정도이며 방석을 깔고 앉았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내로 옮겨져 의자의 용도 외에 화분 받침대 등 장식용 기구로도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도자기 의자는 입식 문화가 항상 유지된 중국에서는 당나라부터 사용한 유물이 남아 있으며 각 왕조를 거쳐서 전해져서 현재도 생산 판매 되어 사용하는 사례가 많다. 사진11

사진1과 사진2는 고려시대 아회도雅會圖와 중국 북송시대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로 당시 상류사회 여러 모임의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한 일종의 풍속화로 당시의 유명한 문인 묵객을 초청하여 베풀었던 모임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사진1에서 실내에 비치된 원통형의 의자를 볼 수 있고 사진2에서는 야외에 앉아있는 참석자의 의자는 모두 원통형의 도자기 의자로 보이는데 도자기 의자가 딱딱하니까 모두 방석을 깔고 앉은 모습이다. 의자의 몸통은 고리 모양으로 연결된 투각형태로 사진3, 사진4, 사진11과 유사하다. 연결된 고리의 모습은 등나무 줄기처럼 생겨서 실제 등나무 줄기를 이용한 라탄 의자의 모습이며 라탄 의자일 가능성도 있다. 라탄 의자는 가볍고 통풍이 잘되며 이동이 편리하여 현대도 실내외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다. 사진2의 서원아집도에 등장하는 의자가 도자기 의자인지 등나무 의자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사진3, 사진4, 사진11의 도자기 의자는 등나무 의자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1) 「고려시대 아회도」(삼성리움)

사진2) 「북송시대 서원아집도」

사진3) 「청자투각고리문돈」(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보물)
현존하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제작된 도자기 의자는 극히 희소하다. 그동안 알려진 유물은 국내에 9점 일본에 2점이 전해지며 고려시대 청자 의자는 9점이고 조선 초기 백자 의자 1점, 백태청자 의자 1점으로 모두 11점뿐이다.
그러나 도자기 의자의 파편은 고려시대 왕 궁터나 사찰터, 강진 사당리, 부안 유천리의 가마터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조선 초기 의자 파편은 경기도 광주 일원의 초기 백자 가마터에서 발견되고 있다. 도자기 의자의 파편이 도자기를 생산하던 가마터나 주거지에서 출토된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류층에서 일정 수량을 소비할 정도로 생산이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10

사진10) 청자의자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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