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을 가다가 고개를 넘다 보면 그게 삶의 고비와 닮았다. 사는 삶과 함께하는 고개는 한계와 문턱으로 작용한다. 나에게는 대운이재(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과 임실군 성수면 사이)가 그랬다. 지인들께서 구이 모악산방의 방주를 악양의 심원재로 애정어린 강제 이주를 시켰을 때 마음에 땅 꺼짐이 있었다. 그래 악양을 가고자 길을 나섰다가도 대운이재를 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1995년 『문화저널』의 기획으로 전시회를 했을 때 『문화저널』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시인 선배의 축하를 받았다. 지금은 일부가 복원된 전라감영, 그때는 도청사가 보이는 바bar였다. 테이블 위에 양철로 만들어진 재떨이가 있었는데 그게 옹기적으로 보였다. 그래 그걸 좀 얻자고 했더니 바텐더가 안된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시인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오더니 같은 것을 사서 선물해 주는 거였다. 민망해하니까 ‘아트박스에서 천 원 하더라’며 가볍게 웃어넘기는 거였다. 그 물건이 많이 고마웠다. 그래 그걸 다시 옹기로 옮겨서 답례를 했더랬다. 그러면서 한쪽에는 ‘건강을 위하여 지나친 흡연을 삼가합시다’라고 쓰고 다른 한쪽에는 ‘모악산방을 위하여’라고 썼다. 그러고는 그 모악산방이 이 옹기장이에게도 소도 같은 안식처가 되었다, 한번은 비슷한 처지(가출)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기막힌 팝송을 들은 바 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주었는데 그녀는 영혼까지 달라 하네~”였다. 그 노래를 들으며 영혼을 사수하리라 다짐한, 모악산방은 그런 곳이었다.

처음 그 양철 재떨이에서 옹기를 보게 된 것은 철판이라고는 하지만 태생이 얇디얇고 가벼워 온몸으로 그 구성력을 이루어 소위 철의 문명을 구현해 내는 것이 질그릇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 그릇을 작정하고 만들게 된 것은 1997년 부산에서 전시회를 마치고 새벽에 돌아오다가 육십령에서 혼자 사고를 낸 뒤였다. 그 며칠 물레일을 못하게 된 상황을 답답해하다가 이 그릇을 붙들면서 숨통이 틔였던 것이다.
2016년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의 전시를 구성하면서 ‘옹기는 옹기’라는 명사적 완고함을 보완하고자 작은 방 하나를 형용사화 해서 ‘옹기적’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그래 그 시인 선배에게 재떨이의 안부를 물었더니 이 삼년 전에 건강상 이유로 담배를 끊어 사용은 안 하지만 갖고는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물건을 이십 년 동안 재떨이로 쓴 것인데 흡연과 함께 하면서 건강이 나빠진 것일까 ‘건강을 위하여 지나친 흡연을 삼가합시다’고 한 말이 그나마 이십여 년을 흡연할 수 있었다 할까 아무튼 ‘아름다운 관계’는 그 시인 선배의 시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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