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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월호 | 특집 ]

[특집Ⅱ] 만인이 동참하는 ´노동공예´가 미래의 공예다
  • 편집부
  • 등록 2022-07-27 16:43:04
  • 수정 2022-07-29 14: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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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SPECIAL FEATURE] 공예의 사회적 역할 in 지속가능성

 

Ⅱ. 만인이 동참하는 ´노동공예´가 미래의 공예다.

 

국내 미술시장이 급격히 몸집을 불리고 있다. 2022년 한국국제아트페어KIAF는 세계 3대 아트페어인 프리즈 아트페어와 손을 잡고 개최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셸 바스키아,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 등의 거장들이 거쳤거나 현재 소속돼 있고, 조兆 단위 매출을 올리는 세계 최고 화랑인 미국의 가고시안도 동참한다.
이미 세계에서 여섯 번째 미술시장 컬렉션의 위력을 가진 한국의 위상에 우리 스스로도 당황하는 분위기다. 2021년 12월에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의 매출은 700억 원을 넘겼다. 신규 유입층인 MZ세대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반면에 같은 시기에 열린 공예전의 시장 규모는 10억 대에 머물러 있다. 최근 몇 년 새 다양한 공예전이 기획되고 연 400회 이상의 전시가 열리지만 시장의 성장은 여전히 더디다.     
현대공예의 공급과 수요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이 예상된다. 최근, 우리나라 3대 백화점인 현대, 롯데, 신세계백화점이 주관하는 공예전이 지속적으로 열리는 데서 가장 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또한  각 기업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에 맞춰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경영철학이 표면화되면서 공예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고 그것의 일환으로 환경공예 기획전이 몇 차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공예에 대한 기업의 태도 변화는 공예 그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 따른 결과와 다르지 않다. 또다른 측면으로는 지구 온난화와 산업 제품에 대한 피로도, 새로운 트렌트를 추구하는 소비자 취향 등이 뒤섞인 가운데 여러 대안 중의 하나로 공예가 그 선상에 놓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일제강점에 의한 근대화 시대를 상실한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전통과의 연속성이 단절됐지만 특히 공예 분야에서 폐해는 더 심각하다. 일상의 기물과 마음 수련을 위한 시와 서예로 구분되어 있던 우리 공예가 일제에 의한 산업화 과정에서 기술과 예술이 혼용되는 오류를 겪으면서 ‘미술공예(가)’로 둔갑해, 귀족적 취향의 공예만이 현대공예로 이어지는 모순을 잉태하게 됐다. 여기에 산업기술의 성장과 디자인 발전은 공예의 자리를 더욱 좁혔고 기술자, 장인, 예술가의 영역이 무너지면서 공예는 소수의 작가만이 생존하는 고급미술의 영역으로 스며들어 일반 대중과 서민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활동 중인 공예가의 작업으로는 공예가 지속가능한 생태계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 (중략...)

 

용암이 식어 돌이 되고, 돌의 분진이 바람을 만나 되어 흙이 됐다. 그 지표면 위로 나무가 자라고 물이 흐르면서 생명이 자라고 공예도 시작됐다. 하루 세끼로 몸을 지탱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도구는 그것을 보조하는 절실한 물건이다. 단지, 수백 년 간의 자급자족의 시대를 도모해 온 인류가 다시 그 원시의 시대로 돌아가 흙, 나무, 돌, 쇠를 연마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그 사이 인류의 욕망은 수만 배 커졌고 편리함에 익숙해졌다. 세숫물을 아끼고, 뒷방에 켜진 전등 하나에도 민감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속 가능성을 소리치는 미래는 우울하고 고통스럽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의미가 의미되고, 그 의미가 다시 의미가 되는 것을 추앙하는 현존 인류이기에 물질의 풍요를 마다하는 미래는 지속 가능성보다 지속적인 슬픔의 시대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부자는 부자의 물건을 사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물건을 산다.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라 태초부터 시작된 계급사회의 결과다. 그런 이유에서 모두를 위한 고급 공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좋고 비싼 공예와 그저 그런  값싼 공예만 있다. ‘취향 그 자체가 감수성이고, 의식이며, 삶을 향유하는 방식의 일부’가 됐음을 주장하는 시인 장석주의 지적처럼, 취향은 삶의 원리로서의 도덕이나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척도가 된지 오래다.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더 큰 지출을 일으키는 한 지속 가능성은 구호에 머룰 것이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개인성은 고독과 직결되고, 자유는 방종으로 이어지고, 취향은 변화무쌍함에 지칠 것이며, 다양성은 천함과 마주할 것이다. 공예가 이러한 현대 소비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고고한 원리주의를 지키며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미 요즘의 공예가 누구나 귀족처럼 살고자 하는 현대성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음은 숨길 수 없는 현상이다.
기업의 ESG 경영은 이익의 가치를 담보하는 외형이며, 지구온난화를 위한 선진국의 탄소제로 운동은 또다른 환경귀족들을 위해 가난한 나라와 그 국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이런 부정적 경향에 반박해 작은 희망이라도 가지기 위한 공예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름다움을 뜻하는 ‘미美’는 羊(양)+大(대)의 합친 말이다. 철학자 신영복은 그의 마지막 저서『담론』에서 초원의 양떼들이 살이 찌고 기름진 털을 입고 달려오는 광경을 지켜보는 목동의 마음이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했다. 덧붙여
“‘명품’은 그 사람의 표지일 뿐 그 사람을 알고 나면 그 명품은 무기력해진다.”라며 현대인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했다. 공예도 마찬가지다. 장인의 시간과 경험, 예술적 감성으로 빚어진 공예품이 하대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공예를 그런 편협하고 작은 범주에 가두어 이해하기보다는 인류의 탄생과 동시에 생성된 공예를 어느 특정한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만인의 것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를 물건이 아닌 일상의 노동으로 인식해 ‘노동은 생명이고, 인간화이고, 예술화의 절대적 가치임’을 천명해 누구라도 공예가일 때 공예는 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현대공예는 작은 기쁨과 값싼 물건에 행복할 줄 아는 용기를 심어주어야 한다. 어떤 물건이든 천 번을 닦으면 광채가 나고, 만 번을 문지르면 생명이 돋아난다. 또한 물건을 아끼고 오래쓰며 약자를 지키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포용하는 ‘노동공예’만이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작은 단초이면서 어렵지만 꼭 가야하는 21세기 ‘공예의 길’이다.
저기에서 달려오는 양떼들에게서 생명의  충족감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목동의 소박한 감정이 공예와 맞닿기를 희망해본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27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 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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