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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월호 | 특집 ]

특집2)아사카와 다쿠미와 조선도자명고
  • 편집부
  • 등록 2021-03-02 15:51:24
  • 수정 2021-03-03 17: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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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II

아사카와 다쿠미와 조선도자명고
글・사진. 박순관 도예가

아사카와 다쿠미浅川 巧는 1891년 1월 15일 야마나시山梨현 다카네高根정에서 출생했다. 1901년 아키타秋田 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6년 야마나시 현립 류오 농림학교에 진학했다. 1909년 학교 졸업 후 아키다秋田 현 오오다테大館 영림서에서 국유림 벌채 작업에 5년간 종사하였다.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 伯教는 1913년 5월 조선으로 어머니와 함께 가족이 건너와 서울에서 일본인 전문학교인 남대문 소학교 교원으로 일하였다. 이듬해에는 그의 권유로 동생 아사카와 타쿠미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 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山林課에 취직하였다. 주 업무가 양묘養苗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녔으며 많은 조선 사람과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진 형의 뜻에 공감하였기 때문에 전국에 산재한 도요지를 답사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데도 관심을 가졌다. 조선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품에도 큰 관심을 두고 몰두하였다. 조각작품을 하며 특히 로댕에 심취하던 형은 1915년 종교철학가이며 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소장품 로댕의 조각 작품을 보려고 다쿠미와 함께 일본으로 간다. 다쿠미형제는 야나기에게 청화 백자를 선물하며 조선 예술에 대한 관심 사안을 논의하였고, 이를 계기로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도자기에 깊이 눈을 뜨게 되었다.

1916년 2월 미쓰에와 결혼하여 딸 소노에園繪를 낳았으나 부인은 1921년 9월 폐렴에 걸려 사망한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본의 무분별한 개발과 수탈적 임업 때문에 헐벗고 균형 잃은 조선의 산을 안타까워했다. 1917년 동료와 함께 「조선 당송唐松의 양묘 성공 보고」라는 글을 발표하여 조림 사업에 이바지하였고, 1919년에는 『조선거수노수명목지朝鮮巨樹老樹名木誌』를 저술하였다. 즉 한국의 큰 나무와 오래된 나무의 이름을 모은 책이다.
1920년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아사카와 형제는 조선민족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 설립 운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명칭에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조선총독부의 반발을 샀는데, 야나기는 “이 미술관이 “민족예술folk art로서의 조선의 풍취가 배어있는 작품을 수집하고자 한다.”고 밝힘으로써 민족이라는 단어가 다분히 민속학적이고 인류학적인 용어임을 강조했고 결국 승인을 얻어냈다.
1921년 5월 7일부터 11일까지 일본 칸다神田 류이츠소流逸莊에서 조선미술관 주최로 개최된 조선민족미술전람회를 열었다. 이 전람회는 경성에서 개관될 조선민족미술관을 홍보하고 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전람회의 미술품은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가 주로 수집한 400여 점 중에서 고른 200여 점으로 일본의 많은 문화인과 도예가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전시된 품목은 대부분은 조선시대 백자였고 회화, 자수, 금속공예품, 반닫이 가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미술품들이 폄하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개최된 이 전시는 야나기의 한국 미술품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1924년 4월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 조선민족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을 설립한다. 이전에는 유일하게 이왕직박물관만이 존재하였다. 1925년 10월 오키타 사키코와 재혼하여 이듬해 딸을 낳았으나 바로 죽었다.
1929년에 『조선의 소반朝鮮の膳』을 발간한다. 1931년 2월부터 3월까지 식목 행사 준비를 앞두고 조선 각지를 돌며 양묘에 관한 강연 때문에 과로한 나머지 4월 2일에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소원대로 한복을 입은 채로 입관되어 한국인 친구들이 관을 메고 한국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당시의 묘는 본래 서울 임업사업소 뒤편 이문동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1942년 도로 건설로 인해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으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른다. 1964년에 망가진 묘역을 임업 시험장 직원들이 복구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야나기를 필두로 조선공예회 회원들이 유고를 정리하여 5개월 후에 『조선 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를 유작으로 발간한다. 다쿠미가 죽은 뒤에도 한동안 서울에서 살던 아내와 딸은 대한민국 광복 후 1947년 일본으로 돌아갔고, 1955년부터 야나기가 설립한 민예관에 근무하다가 1976년에 한 달 사이로 모두 사망함으로써 아사카와 다쿠미의 가계는 끝을 맺었다. 한편 조선민족미술관 소장품은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했던 다쿠미가 사망하자 형인 노리타카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5년 광복 직후 민속학자 송양하宋陽夏가 관장이 된 국립민족박물관에 이관되었고, 이는 다시 6·25직후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되었다. 노리타카 역시 개인 소장 공예품 3천 점과 도자기 조각 서른 상자를 한국에 기증하고 1947년 11월에 일본으로 가서 1964년에 사망했다.

추모 행사에 대하여
다카사키 쇼지의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이 간행된 이후로부터 타쿠미의 기일인 4월 2일을 전후로 서울과 일본의 유지有志들이 타쿠미의 묘 참배 행사를 열고 있다. 한국에서 번역서가 나오면서 더욱 많은 이들이 개인이나 단체로 추모행사를 치루기도 한다. 한편 일본 야마나시 현에는 가묘, 묘비, 석비, 자료관 등이 생기고 모임이나 행사가 점점 늘어가고 추모객과 한일 교류 행사가 늘고 있다. 앞으로 도예가들도 많이 참여하길 바란다.

아사카와 형제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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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순탁
도예가 지순탁1912~1993은 18세인 1928년에 처음으로 골동점에서 아사카와 노리다카를 만났다고 한다. ‘군과 같은 의지 있는 청년이 많이 나와서 이러한 문화유산을 재창조하는 것이 좋겠네’라는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처음엔 목공예에 관심을 두고 다쿠미의 집 근처에 살며 드나들던 지순탁은 1930년에 노리타카의 설득으로 도자기 쪽으로 바꾸어 10여 년 동안을 주로 노리다카의 길 안내와 통역을 맡으며 수많은 도요지들을 다니며 연구하였다. 그는 특히 고려청자에 관심을 두었으며, 노리타카는 1944년에 지순탁이 처음으로 구운 청자향로를 당시 돈 20원에 사며 격려했다고 한다. 지순탁은 다쿠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일본인의 기록이 있다.

노리타카는 지순탁과도 가까웠지만 1925년에는 이북 회령의 도예가인 최광재의 가마를 몇 번 방문하면서 지도를 해주었고, 일본에도 동반했으며, 그 사이에 서울 미츠코시백화점에서 <최광재 도기전람회>를 열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회령요 특유의 유약에 반하여 인기가 많았던 귀한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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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래 1903~1974
1980년에 심운당에서 출판한 『백자에의 향수』에서 그는 자신이 다니던 병원의 일본인 교수의 영향으로 1929년에 처음으로 골동을 모으기 시작했다며 1930년 퇴계로 근처의 호텔에서 열린 야나기의 골동 강연회에서의 첫 만남을 회고했다. 그리고 아사카와 형제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다. 그는 야나기에 대한 인상과 골동에 대한 안목을 과소평가했지만 잘못 비판한 모양새로 생각된다. 야나기보다 10년이나 늦게 시작된 문화재 수집품들을 보면 세 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그의 수집품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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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이 간지로河井寬次郞 1890~1963
‘무관의 도공’,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 도예가’라 칭하는 원로 도예가로서 그는 인간국보, 문화훈장, 예술원 회원에 추대되었으나 스스로 거부하며 생전에 2만여 점의 작품을 남긴 도예가이다. 또한 그는 예술가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고 그저 도공으로 불리길 원했다. 그는 1921년 5월에 토쿄에서 첫 개인전을 열던 중 마침 칸다에서 열린 야나기와 다쿠미의 조선도자기를 접한 이후로 자신의 작업경험을 색채미와 기교적인 면에서 점차 조선도자기의 아름다움인 질박하고 간결함으로 바꾸어 갔다. 1919년에는 하마다 쇼지와 도자기 연구를 위해 한국과 만주를 여행했다. 그는 한국의 음식점 식탁에 놓인 진사백자 수저통의 붉은색에 빠져 가마를 땔 때마다 진사유 작품이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하마다는 얘기할 정도였다. 1925년 이후로 야나기, 하마다와 함께 민예운동을 같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1929년 6월의 개인전에서 내놓은 작품은 이전과는 다른 질박한 작품들로 가득찼다. 1936년 5월에 야나기, 하마다와 한국 전역을 답사하며 야나기의 일본 민예관 설립을위한 민예품 수집을 도우는 동시에 많은 공부를 했다. 저서에 『노변환어爐邊歡語』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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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요시마쓰(浜口良光, 빈구랑광
그는 대정시대 중엽에 나온 『도기백선』이란 책에서 본 백자 주전자를 사고부터 조선도자기에 대한 관심에 불이 붙었다고 했다. 그는 1945년까지 23년간 한국에 살면서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민요를 채집하여 1926년에 『조선민요의 멋』을 냈다. 다쿠미와 조선공예회 모임을 했고 『조선도자 명고』의 교정을 보았다. 그 후 『조선공예개관』, 『조선민예 문헌초』, 『조선시대의 공예품 고증』을 썼다. 귀국 후에는 1966년의 『조선의 공예』에서는 일제강점기 시대 남북한 전체의 모든 공예와 공예점을 찾아 사진과 함께 기록하는 등 당시의 귀중한 사진들이 담겼다. 그 외에도 『조선시대의 미, 민예』, 『조선의 서민음식-야나기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하이쿠 시인 노리다카의 생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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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모토 겐키치富本憲吉 1886~1963
인간국보로 순백자와 청화백자 작품으로 유명하다. 건축학 전공자로서의 영국 유학에서 윌리엄 모리스의 공예관인 ‘민중 생활에 뿌리내린 예술관’에 경외심을 가졌고, 이때 동양미술에 관심을 가졌던 영국의 원로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와 가깝게 지냈다. 귀국하여 모리스의 이론과 야나기의 이론과 비슷하다는 데에 동조하였다. 결국 건축학도였던 그는 결국 29세에 도예에 입문했다. 1912년 가을 동경 척식박람회에서 리치와 함께 조선의 도자기에 매료되었고 1922년 10월부터 한달 여동안 한국을 방문하여 청량리의 다쿠미의 집에서 머무르며 이왕직 박물관과 가마터들을 돌아다녔고, 더욱 중요한 일은 야나기와 아사카와 형제가 열은조선도자기 전람회’ 참가와 강연이었을 정도로 그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조선 백자의 갓 맑고 푸른빛이 도는 유약의 면, 토기에 가까운 낮은 화도의 자기, 환원염에 의한 색’이라는 글을 썼다. 당시로서는 매우 정확한 미의식의 표현이었고 중국의 백자와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을 가졌다. 또한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국의 도자기들의 단순함을 졸렬하고 타락했다는 비판에 대하여 그렇지 않음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단순성의 진리’를 담고자 노력하였다. 1940년에도 내한하여 아사카와와 동행하며 경기도 가마터들을 다녔다. 그는 나중에 조선백자의 모방보다는 창작을 중시하면서 점차로 일본적인 백자의 아름다움으로 개척하여 인간국보가 되었다. 저서에 『요변잡기』1925, 『제도여록』1940, 『조선시대의 도자기 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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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에 관련된 서적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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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일본판)
탈고하여 조판에 들어간 상태에서 애석하게도 그가 세상을 떴다. 야나기를 주축으로 조선공예회 회원들이 뜻을 합해 출판을 마쳤다. 야나기는 마침 책 겉장을 하려고 주문했던 장지를 찾아내어 회원들이 모았던 능화판으로 찍고 한국식으로 콩물을 들인 누런 표지가 되었다. 교정은 한글이 들어갔으므로 저자 자신이 보았어야 하는데, 다행히도 한국에 23년간을 살며 한국말을 하는 모임 친구 하마구찌가 담당했다고 한다. 드디어 그가 떠난 지 5개월 후인 1031년 9월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너무나 귀해서 웬만한 대학도서관에도 없을 정도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초판 이후에 일본에서 출판된 책에는 콩물들인 한지가 아닌 표지로 되
어있다.


『한국도자명고』

최초의 번역서는 1981년에 경남 구산중학교 교장인 김봉돈 선생이 이 책에 감명 받아 이를 널리 알리고 싶어 『한국도자명고』라 제목을 바꾸어 번역 출간하였다. 발행소는 김해요로서 전문 출판사의 기획이 아니라 발행부수도 많지 않은데다 지방에서 발간되었기 때문에 이 또한 책의 진가를 알리기에는 미흡한 편이었다.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 아사카와 다쿠미의 생애』(일본판)
1944년생으로 쓰다주쿠 대학 교수였던 다카사카 쇼지는 조선근대사를 쓰며 한일관계에 대하여 연구했던 사람이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성실한 인간성에 매혹되어 자료를 모았고 1980년대 초에 한국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모아 만든 책이다. 이 책에는 다쿠미의 출생부터 한국에 와서의 삶과 죽음, 그 후에도 일어나는 일까지 다쿠미 가족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인터뷰와 편지 등으로 꼼꼼히 기록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삶의 이야기였기에 한일 간의 미묘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보인다.이 책의 발간으로 인해 당시까지 한일 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다쿠미의 인품에 반한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어갔다. 이 때부터 일본인들이 다쿠미의 묘를 찾는 이들이 생겼으며 이를 알게된 다쿠미의 직장이었던 임업연구원에서도 망가진 묘를 고치고 기념비도 세우고 보호하는 등의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발간 후에 더욱 자료를 추가하여 계속 증보판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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