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문기文氣와 아우라
글. 김동현 테일러, 프리랜서 에디터
우연한 기회에 목공예품의 전시를 보게 되었다. 영국에 서 만든 탁자, 의자, 찬장 따위를 찬찬히 살펴 보았는데 유럽의 공예들이 그렇듯이 배후에 종교와 시대적 예술성이 조형 안에 꿈틀거리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영국의 목공예품을 좋아하는 까닭은 특유의 건실함, 멋이나 장식에만 치우치지 않고 사물의 본분과 제 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성실하고 담백한 그들의 국민성에 기인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들이 순전히 국민성에서 비롯된 기술에만 의존한 공예를 해왔을까. 그랬다면 그 건실함 이면에 숨은 조형적 요소인 형태, 선, 색채의 미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 다. 그것은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선기 또는 동양에서 말하는 문기라고 불리는 감각적인 본능을 충분히 그들 작품에 투영했기 때문이 아닐까. 전시회를 보며 스쳤던 생각은 몇 일 뒤 손님의 패턴을 그리는 마스터를 보며 재연되었다.
문기를 느끼는 것, 곧 아우라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 자도 없이 계산기도 없이 인체를 재서 종이 위에 옷본을 재단하는 마스터를 보며 내가 떠올린 말이다. 그의 나이도 귀가 말랑말랑해지는 예순을 지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 늙은 영국인에게 칠십의 다른 말인 이 수사를 붙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손과 눈만을 의지한 채 한 획의 선을 긋는 그 모습을 수식하고 싶었다. 손님의 가슴 둘레가 정확히 어떠한지 목에서 허리까지의 길이는 몇 인치인지 또 소매는 어디까지가 적정한 길이인지 모두 눈대중으로 짐작하고 그것을 평면에 옮기는 모습은 규칙과 기준이 없는 기교였다. 눈으로만 기억한 것을 손으로 표현한 본능이자 즉흥으로 태어난 선의 율동이었다. 마음대로 해도 전혀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것. 한국에서 듣고 배운 이 말의 실현을 머나먼 영국 땅의 한 남자에게서 보았다. 그가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리듯 만든 그 패턴은 손님의 체형에 잘 맞는 우아한 옷이 된다.
최근에 겪은 사소한 사건은 내가 생각해온 서양 예술과 공예의 성격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의 자연관에서 비롯된 인체(또는 사물)를 재단하는 방법은 모든 부분을 수치화, 규격화, 제도화해서 하나의 메커니즘을 만드는 방식 아니었던가. 내가 느낀 이 감정상태는 서양의 개념으로 ‘아우라’였을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공예를 나눠 설 명하려는 나에게 있어 양자의 궁극적인 표현과 형태는 역설적이게도 서로를 닮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편, 동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있다. 동양예술에서는 기술과 기교, 물질의 세세한 모방은 예술이 추구하는 정신세계와는 동 떨어진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에 대응대는 개념은 문기라고 본다. 동양 예술의 작가들(주로 문인과 사대부)은 색채와 형태를 떠나 예술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정신을 물질에 대입해 표현하고자 했다. 눈 속의 매화나 깊은 산의 야생난 등은 그림 자체보다 작가 본인의 감정인 추상을 구상으로 표 현한 것이다. 이 감정상태가 잘 전달 될 때 우리는 작품에서 문기를 느끼는 것이고 인위적인 기교에서 맛보는 즐거움 보다 더 큰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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