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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월호 | 뉴스단신 ]

공예의 미래를 보다
  • 편집부
  • 등록 2020-09-29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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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2019 청주공예비엔날레
공예의 미래를 보다

글_한근석 광화문아트포럼 대표

많은 공예가들이 공예에 관한 담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반적으로 ‘모든 것이 공예였던 시대’를 떠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공예가 과거에 유일한 생산수단으로서 중요하였다는 사실과 생산에 동원되는 힘 power 의 원천이 시대에 따라 인간의 손에 의한 노동으로부터 인간의 두뇌에 힘입은 테크놀로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이로 인해 시각예술의 세계는 건축으로부터 공예와 회화, 조각, 다시 디자인으로 분화된 과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공예는 역사적으로나 그리고 정신적으로 미술의 뿌리’이기 때문 이라는 존 페롤트 John Perreault 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공예의 많은 부분이 분화되고 세분화되었지만 공예라는 어휘는 여전히 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화되기 이전의 형식적 가치, 독창성, 표현의 진실성 등을 여전히 내포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99년에 출발한 청주공예비엔날레의 20여 년 동안 상황을 리서치하면 전반적으로 공예가 지닌 인간의 삶, 쓰임, 생활과 관계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지금의 비엔날레는 각기 특성을 찾고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형식과 내용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기에 비엔날레 같은 규모가 큰 행사는 스토리가 정해진 그 이야기를 통해 지역의 가치, 비엔날레의 가치, 미술의 가치, 공예의 가치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비엔날레가 공예의 쓰임, 공예의 기능 중심으로 소비했다면 이번 비엔날레는 몽유도원의 관념을 빌어, 11회 20여 년간의 행사로 성찰의 위치에 올라선 청주의 정체성을 담아 전시형식과 공예내용으로 새로운 방향과 가치를 탐색 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인 ‘미래와 꿈의 공예, 몽유도원이 펼쳐지다’에 서 차용된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이상향에 대한 낙천적인 태도와 자연주의 미학을 보여준다. 빛나는 도원은 우리가 일상에서 홀연히 떠 나는 산책길과 연결되어있고 산책이 끝나면 미련없이 현실로 돌아 오는 삶의 태도가 그것이다.
공예는 쓰임을 벗어나 오래전부터 예술로 거듭나 있는 상태이며, 공예가 기능과 쓰임이 있어야 공예에 가깝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공예는 시대에 따라서 물건, 작품, 제품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의 공예비엔날레의 역할은 쓰임과 기능, 물질보다는 공예의 미적경험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간성과 기술, 반복적인 행위, 물질성 등을 새롭게 발현시켜 불가능한 이야기를 통한 거듭난 구성들로 담론을 요구하고 발전시켜 공예의 가치를 새롭게 기여해야 한다고 거듭 생각한다. 공예가 단순한 감상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과거 현재 미 래의 시간의 상황들을 움직여 새로운 담론장에서 새로운 공예기치를 만들어 새로운 의미와 상상을 모색해 가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현대사회에서 앞으로 공예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생존·번영 할지 예상하고 싶지 않다. 다만 공예의 생존은 서로 대립되는 기술과 문화적인 양태 둘을 모두 필요로 한다. 하지만 아직 공예는 손으로 만든 물건이라는 것이 우리 인식에 팽배하다. 이같은 인지는 현대사회가 지닌 생산성과 복잡성에서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의 연정을 불러일으키는 유구한 전통공예가 있고 공예의 기능이나 쓰임을 저버리지 않고 형태를 유지할 때 가장 공예답다고 한다. 반면 공예의 기능성이라는 형식적 제약이 초래한 탈장르 및 조 형성에 치중한 현대공예의 변질되어 버린 공예의 정체성과 본질의 지적도 있다. 하지만 사회구조변화는 21세기 문명이 공예에게 공예적인 미묘한 아름다움만을 요구하면 안 된다.
공예는 오랜 반복의 시간과 생활이다. 어쩌면 공예의 가치는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 미에서 느껴진다. 단순한 형태를 매우 현대적으로 표현하고 아담한 흰색으로 완벽한 고귀함을 표현한다. 한국의 공예는 한국만의 독특한 과거의 전통을 반영하면서 현대성을 갖추고 있고 심리적으로 아날로그적 쓰임을 갖는 것이 공예에 가깝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서로 대립되는 기술적이거나 문화적인 양태 둘을 모두 필요로 한다.
디지털미디어 시대에서 예술에 대한 수용의 의미는 관객이 단순한 감상자에 그치지않고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을 통해 삶과 예술의 소통을 유발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고 이는 또한 예술과 삶의 경계가 해체됨을 의미한다. 오늘날 감상자가 누리는 것은 작가의 감성, 개념에 대한 시각적 감상뿐 아니라 일종의 행위주체자로서 참여적 활동을 통한 체험으로 수렴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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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19년 12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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