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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월호 | 특집 ]

특집2)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자의 고장
  • 편집부
  • 등록 2020-09-01 15:33:45
  • 수정 2020-10-02 21: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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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II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자의 고장
글. 안선숙 여주시 관광체육과 도예팀장 / 안준형 여주시 관광체육과 도예팀 주무관

여주 도자기의 역사는 1999년 국립중앙박 물관에서 발견한 여주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驪州中岩里高麗白瓷窯址 를 통해 고려 초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발견은 2001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경기도박물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여주 도자기의 역사를 일천년 가까이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용인 서리 고려백자가마터龍仁西里高麗白磁窯址 ,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가마터始興芳山洞靑瓷白磁窯址 와 함께 우리나라 초기 가마터연구에 중요한 자료이기에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10세기 이후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는 굴 모양의 등요登窯로 크기가 20.4m에 이르며 아궁이, 소성실, 굴뚝부 등이 잘 보존된 편이고 가마터 인근 퇴적층에서는 2,200여 점 의 자기가 출토되어 고고학적 가치가 충분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발굴된 유물은 12기종으로 분류되는데 그중에서도 선종 불교와 함께 발달한 차 문화의 번성으로 수요량이 급증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완碗 이 전체의 45.77%에 이를 정도로 많은 양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접지면 폭이 1cm 내외로 그릇의 굽을 깎아낸 모양이 마치 해 주위에 비낀 무리와 비슷하다 하여 해무리굽완日暈底碗  이라 불리는 완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당唐말 기에서 오대五代 초기인 8~9세기에 유행 하다가 10세기에 이르러 사라지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초기 가마를 살펴보면 예외없이 출토되므로 초기 도자사 연구에서 발생 및 전개를 보여주 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중암리 가마터에서 출토 된 유물의 대다수가 갑번甲燔한 갑기匣 器  라는 것입니다. 갑번은 가마 안의 잡물 雜物이나 재가 자기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거나, 불길이 직접 그릇에 닿지 않게하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내화토로 만든 합인 갑발匣鉢안에 자기를 넣어 굽는 방식으로 도지미陶枕 위에 자기 1 개를 올려 굽는 예번例燔이나, 도지미 위에 자기를 여러 개 겹쳐서 굽는 상번常燔 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최고 품질의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방식임을 고려 할때 주로 상류층을 상대로 한 고급 자기의 제작에 이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가장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를 필두로 11~14세기 운영 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전리, 부평리 가마터, 13~14세기 북내면 청자 가마터는 물 론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후기까지 꾸준히 분포한 강천면과 북내면 조선백자 가마터 등 현재까지 조사된 여주지역 가마터는 84기에 달하는데 이는 여주가 고려 초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도자 역사의 전시기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시간이 흐른 1884년, 관영 사기 제조장이었던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 이 폐쇄되 면서 일자리를 잃은 사기장들이 여주, 이천, 문경, 괴산, 단양 등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며 민요民窯 를 생성했지만, 일정 부분 전통의 단절은 불가피했습니다. 1895년 이효순이 일본 기술자를 초빙해 근대 도자 제작기법을 국내에 도입한 사 례는 국력의 쇠락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자기 생산기술과 체계가 산업화라는 급격한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조선 후기를 시작으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수탈은 더 노골적이고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는데 도자 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의 조선 도자기 애호 현상은 유별났는데 20세기를 전후로 일본에서 유행한 골동 취미, 고고취미와 맞물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공예품을 상찬한 아사카와 노리다카 浅川 伯教 1884~1964,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형제나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 悦 1889~1961와 같은 일본인 학자들의 활동으로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고유의 청자와 백자에 대한 수요를 불러왔고 모조품 제작산업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장을 세울 자본도, 근대적 도자 산업에 필요한 기술력도 부족했습니다.
1900년 다니구치谷口의 충북 괴산 도기 공장, 1905년 히라가요시미平賀義美의공업전습소, 1907년 이토 伊滕 의 서울 영등포 도기공장, 1908년 도미타 기사쿠富 田儀作의 평안남도 진남포 도미타합자회사, 1909년 평안남도 후쿠소제도소福將製 陶, 1911년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서울 묵정동 한양고려소, 1928년 스기미즈 타케에몬杉光武石衛門의 충남 대전 스기 미즈 계룡소요원 등 일본인이 설립해 운영한 전통 도자 모조품 공장들은 한국인이 일했지만, 그 결과물과 수익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모순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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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0년 8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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