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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월호 | 뉴스단신 ]

시대별로 알아보는 한국 현대도자 전시의 경향 연구 2부
  • 편집부
  • 등록 2020-07-20 10:15:08
  • 수정 2020-07-27 13:4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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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로 알아보는
한국 현대도자 전시의 경향 연구
글. 전주희  공예 전시기획자 및 문화연구가

 

2부.
Ⅱ. 현대도자 전시의 시대별 경향
   3. 1970년대 : 세대 분리
   4. 1980년대 : 매체로의 확장
   5. 1990년대 : 동시대성의 획득

Ⅱ. 한국 현대도자 전시의 시대별 경향
1970년대는 수출이 증가하며 경제가 호황으로 이어졌고, 정부의 수출품 고급화와 다변화 정책에 따라 대학의 공예 ·도자 교육이 전국으로 확산되며 전공인구도 증가했다. 대학의 실기현장에는 석유·가스가마의 보급으로 번조과 정이 편리하게 개선되었고, 재료와 형식의 활발한 실험으 로 근대적 양식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확산되었다. 때마침 개설된 ‘도자조형’ 과목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며 현대도자 를 향해 열기를 더했다.

전공자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배출되며 발표의 장에 대한 수요도 늘어 화랑들이 다수 개관하였고, 도자전시는 4배 이상 증가했다. 공예부문 전시회 수도 증가했지만 개최된 공예전시회의 반 이상이 도자전시회였고, 이는 수공예와 도자기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또한 큰 것을 반영하고 있었다. 개인전은 70여회 이상 개최되었고, ‘현대도예’를 명제로 규모와 형식을 갖춘 도자기획전이 신세계미술관에서 <현대한국도예전> 1970 , <한국현대도예작가초대전> 1973, 서울대박물관 기획 , <한국현대미술수작전-조각, 도예> 1974 , 특히 생활도자기를 주제로 여성작가 10명만 참여한 <여류도예가전> 1975 이 최초로 개최되었다.
사립미술관에서 매년 기획전을 진행한 점은 현대도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미술시장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였음을 반증한다. 공예전시가 아닌 도자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최초로 개최된 <한국현대도예초대전> 1978 은 당시 한국현대 도예의 현실을 드러냈다. 기획 초기에는 ‘한국현대도예백인선’을 구상했으나, 작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전승도자나 실험적인 작업경향의 작가를 제외하고 기획의도에 맞게 전통을 재해석하는 현대작가 20명 미만으로 추려졌다.
선정된 작가들의 대표작 20~30점 중 전시에 적합한 작품은 각 5점 이내였고 최종적으로 14명의 69점이 선정 되었다. 일간지에서는 전시로 드러난 도자계의 상황에 대해 “빈곤상태에 허덕이는 우리 도예계의 현실을 그대로 고발하고 (...) 현대도예계가 14명 작가로 대표된 것은 실 로 엄청난 충격이다”라며 혹평했다. 50년대 후반 시작된 대학 도자교육과 작가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로, 당시 정책적으로 강조한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강박적 과제에 대한 현대도예계의 20년 노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이는 전시마다 주요작가들이 반복하여 출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현대도예계의 초기 형성단계에 서 작가군이 충분하지 않아 발생되는 부득이한 상황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들의 작품연구가 수 년 동안 정체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개인전의 증가세에 비해 미술관과 갤러리의 기획전은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대학과 대학원의 도자전공 졸 업생들이 자구적으로 동문전시를 결성하는 대안적 움직 임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1970년 홍익대의 <도작가회 전>이 최초로 개최되었고, 1972년 서울대의 <제1회 토전>, 1974년 대구 계명대 재학생들의 <도림회 창립전>, 1975년 단국대의 <화경도예가회>의 뒤를 이어 70년대 후반에는 상명여대·신구전문대·숙명여대·한성대·이화여대 등에서 동문전 결성이 진행되었다. 특히, 1974년 <제 3회 토전> 도록에는 작가별 페이지에 조형도자와 실용 도자 각1점이 대면으로 배치되어 당시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서 현대와 전통에 대한 양가적 접근과 작가적 사유를 함께 읽을 수 있다. 이 도록의 서두에 밝힌 젊은 도예가들의 선언에서 새로운 도자를 향한 열의와 실험적 태도 그리고 전통에 대한 명확한 자의식을 읽을 수 있는 점에서 의미가 있겠다.

“흙의 가능성은 (...) 흙과 유약과 불과 더불어 씨름하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는 이 가능성의 개발, 확장은 참으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가능성의 개발은 혹 고정된 관념이나 잘못 해석된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아일 수도 있고 관심 밖의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로 불리워지는 우리의 훌륭한 도예전통의 계 승, 발전은 그의 단순한 모방이나 답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흙과 유약과 불의 가능성을 새로운 시대정신에 입각해 서 끊임없이 실험하고 숙고하는데 있다고 믿는다.”

또 다른 움직임은 1979년 통인화랑에서 개최된 전시명에 ‘생활용기’를 처음 사용한 <윤광조 생활용기전>이 열렸고, 전시에는 분청의 귀얄문, 인화문, 덤벙기법을 활용하여 이전의 식기와는 다른 크기와 형태로 제작된 반상기세트와 다기세트가 전시되었다. 새로운 생활도자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시작되었음을 이 전시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겠다. 당시 강남개발사업이 마무리되며,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과 입주로 인한 주거환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서구화된 주거형식에 따른 생활환경의 변화를 반영한 새 로운 디자인의 가구와 도자기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 현상은 지속되어 1980년대 생활도자기의 호황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는 급격히 증가한 전시 공간과 개최 횟수와는 달리 전시의 수준은 정체된 상태였다. 1974년 개최된 <한국현대미술수작전-조각, 도예> 1974 신세계미술관 리플릿의 서문에 서술되었듯이, “한국의 현대도예 역시 전통과 창조 의 틈바구니에 끼어 깊은 고난에 사로잡히고 있다. (...) 전통에 충실하다보니 모조품이 되고 현대를 개발하다보니 국적불명의 고아가 되고 그 고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는 문구가 당시 한국현대도자계 기성작가들의 고충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수의 기획전이 있었지만 미술시장을 타깃으로 한 판매전 중심의 전시였고, 전시의 전후과정에서 60년대부터 계속된 ‘전통의 재해석’에 대한 진화된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는 한계에 머물렀다. 특히 현대도자 교육의 중심인 대학에서 결성된 동문전을 통해 젊은 작가들과 기성작가들 사이에서 조형적 표현의 분화가 진행되며 새로운 세대를 형성하였었다.
그들은 기존의 전통 연구보다는 자유로운 표현을 선호하였다. 동문전에 나타난 작품 경향은 70년대 초반에는 물레성형된 기형을 유지하며 비구상적인 표면장식이 다수였으나, 중반부터 추상적 경향이 형태와 표면에 적극적으로 등장하며조형도자의 조건들을 갖추어갔다. 유약의 거친 붓 터치와 드리핑 흘림법 ·회화적 시유, 비대칭 기형, 질감 탐구, 탈기능적 형태 등의 출현은 70년대 중반 유학생들이 귀국하여 대학에서 실시한 도자수업을 통해 전달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개한 독일·미국·프랑 스의 현대도자 전시의 영향도 있겠다. 새로운 표현을 향한 도전들은 계속되어 1980년대에는 더욱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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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0년 6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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