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다시 보는 분청
Part II. <전통적 미감의 분청>
글_이재황 한남대 교수
(사진01) 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김정옥「분청사기음각어문호(粉靑沙器陰刻魚紋壺)」48×48×50cm
한국인은 자연(自然)스러움에 가장 적합한 미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선천적 DNA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생활 속의 다양한 분야에서 표출되어 민예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공예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자료는 이미 다양한 학술자료에도 충분히 서술되어 있으며 더불어 일상에서 사용된 패턴이 곳곳에서 박인방증되고 있다.
그 중에 분청사기는 500년 전의 대표적인 소산물인 것이다. 도예는 흙을 소재로 성형된 기물을 번조해 소결되는 것으로, 제작부터 흙을 범벅해 잉태의 기다림을 유발하는 행위로서 순박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자태이다. 이러한 역사는 이미 기원전 팔천년 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쓰임을 이끌어 왔으며 지속적인 애정을 갖게 하였다.
분청의 기록과 역사
천오십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반도 자기는 세계에서 두 번째 도자선진국이었고 청아한 푸른색의 고려청자는 최고의 명품을 제작한 사례가 있다. 송나라 문신 서긍은 1124년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비색(翡色)을 표기하였고 남송시대 태평노인의 저서인 수중금(袖中錦)은 10개 품목을 지목하며 자기는 고려비색을 논하며 ‘천하에 제일가는 것이다’라고 입증하였다. 당시의 도예문화 발달은 새로운 양식이 되어 우리의 것이란 자긍심을 갖게 하였고 적정한 시기를 지나 퇴색된 상감청자 기법을 계승한 분청사기와 더불어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전기의 백자도 생산되었다.
사전에서 분청사기의 뜻은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胎土) 위에 정선된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뒤에 유약(釉藥)을 씌워 환원염(還元焰)에서 구운 조선 초기의 도자기로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분장회청사기’라는 용어는 우현 고유섭 선생이 미학 논고인『고려도자(高麗陶磁)와 이조도자(李朝陶磁)』(1941)에 처음 사용한 것으로 ‘미시마(三島)’라는 일본식 용어를 한국어의 고유명사로 정립시킨 것이다.
시기적으로 분청사기는 고려 말, 공민왕시기에 상감청자로부터 서서히 변모되어 발전되었으며 조선의 태종 때는 특색이 현저해지고 중종시기에 서서히 소멸해가며 백자로 전환된다. 고려 말기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약 200여년간 제작되었다.
청자의 단아한 고고함과 백자의 순 살이 돋보인 순박함은 수많은 미적표현을 다함에도 부족하지만 자연에
동화되어 설렌 가슴앓이로 잉태한건 분청사기라고 할 수 있다. 꾸밈없는 순박한 아낙의 분바른 얼굴에서 해맑음과 천진함을 찾아 볼 수 있고. 또한 햇볕 속에서 진땀을 내며 열심히 일한 농부의 새참거리로 아낙이 내놓는 막걸리, 본 색의 포근함과 포만감을 비유해 본다. (사진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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