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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월호 | 특집 ]

조선에서 온 백자 미담 ‘청송백자’의 재조명
  • 편집부
  • 등록 2018-01-10 18:38:23
  • 수정 2018-01-10 18: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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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송군이 ‘백토의 산지’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청송백자는 강원도 양구백자와 황해도 해주백자, 함경북도 회령자기와 함께 조선시대 4대 지방요로 꼽힌다. 1958년 마지막 가마불로 꺼졌던 청송의 백자가 반세기를 지나지금 다시 피어오르고 있다. 여전히 하얀 속살을 내보이고 있는 백토 광산 앞에서 청송백자의 중요한 역사를 잇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그곳에는 500년 전 과거에 백자를 굽던 방식의 공방과 가마가 아직도 그대로 들어서 있다. 청송의 마지막노老 사기장과 함께 그의 기술과 솜씨를 전수받은 이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통의 복원은 이미 마쳤다. 하지만 전수자들의 모습은 더 이상 전통에만 머물러있지 않다. 그들은 이 시대 청송백자의 가치를 회복하고 있으며, 현대인의 식생활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그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들의 적극적인 응원까지 더해진다. 이것이 이번호 특집으로 ‘청송의 백자’를 선택한 이유다.

 

 

「단지」 19×15.5cm, 20C 초

 

청송백자의 역사와
제작기술의 특화양상

 

청송백자의 역사
청송백자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토산조土産條에 자기소磁器所·도기소陶器所로 표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상도慶尙道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청송군조靑松郡條에는 하품의 백토 산지임을 기록하고 있다.1) 이는 지리지의 저술 기간인 15세기 초반에 청송백자가 생산되었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백자 제작이 지방요로 많이 확대되지 않았던 15세기 초반의 상황, 지리지에 기록된 방광산과 현존 요지 군락과의 거리 등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기에 속단하기 어렵다.2)
하지만 오늘날 전국적으로 자기소·도기소에 포함되지 않았으면서 관수용 도자기를 제작한 수많은 기타其他 요지가 발견되고 있다.3) 더구나 청송군 진보면 세장리에 12세기 말 압출양각청자 요지가 발견되는 점4)으로 보아 15세기 중·후반에 청송백자가 생산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 후 청송백자가 활발하게 생산·거래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19세기 초반에 저술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이다. 임원경제지 에규지倪圭志 ‘팔역장시조’八域場市條에는 청송 지역 정기시장 주요 출하품으로 ‘자기’의 기록이 있다.5)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19세기 전반기에 청송 지역에서 자기가 다량으로 생산·거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송백자 생산지에 대한 기록은 일제강점기에 종종 등장한다. 1910년에 간행된 「조선산업지(중)朝鮮産業誌(中)」에 청송지역 도자기업 현황이 기록되어 있다.6) 또, 1936년에 발간된 「청송군지(건)靑松郡誌(乾)」 ‘장점조’匠店條에도 나타난다.7) 이로 보아 일제강점기에는 대체로 청송백자 요지가 3개소 정도로 상시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언론매체를 통한 청송백자에 대한 보도가 종종 등장한다. 매일신보(1923.1.26)에서는 “청송사기는 경상도에서 유일한 특산물로 그 중량이 가볍고 내화성이 있으며, 그 기술이 미려하다. 실로 고려자기에 비하여도 거의 손색이 없을 정도로 양질의 물건이나 생산되는 지방이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서 교통의 문제로 세인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기술 지도와 예산 지원 계획을 밝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 차원에서 매우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8)
현대에 이르러 청송백자에 대한 기록은 몇몇 도자사학자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다.9) 이 자료들은 일제 강점기 도자기 가마터의 조사 내용을 중심으로 한 한국고고학 연구 자료를 인용 정리한 것들이다. 여기서는 대체로 13~14기 도요지가 존재하고, 그 가운데 도자사 시대구분 기준10)으로 전기 도요지(1기)의 기록도 보인다.
최근에 이르러 청송백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연구가 진행되었다.11) 이 연구에 의해 마지막 청송 사기장 ‘고만경’옹의 생존 사실, 제작 과정과 특징, 1958년까지 청송백자가 생산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자료를 토대로 청송군 내에 산재한 청송백자 가마터 지표조사연구를 하였다.
청송백자 가마터 지표조사에 의하면, 신점지구·화장지구·내룡지구 3개의 요지군으로 구분되고, 36개소에 48기의 백자 가마가 확인된다.12) 청송백자 도요지의 분포는 부남면(21기), 부동면(24기)에 집중되며, 원료 출토지인 법수에서 반경 10km 이내에 위치한다. 이처럼 원료 출토지와 멀지 않은 곳에 도요지가 자리 잡게 된 것은 원료를 쉽게 운송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도요지가 시기가 지날수록 원료 출토지에서 멀어지는 깊은 산속이나 내룡지구로 이동하는데, 이는 연료의 구득을 위한 것이다.13)
시대적으로는 16세기 4기, 17세기 18기,18세기 4기, 19세기 4기, 20세기 18기로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청송백자는 어림잡아 500년가량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시대별 채집 유물에서 나타나는데, 색조와 굽 형태·제작 기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4)
아래의 [표1]에서 보듯이, 청송백자는 16세기경부터 백자가 생산되었으나, 20세기 기형의 특징을 담보한 백자 제작은 18세기 후반 경부터 시작되었다.15) 이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금사리 백자의 설백색과 얇은 기벽 등도 청송백자의 양식에 수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16) 따라서 청송지
역의 향토성을 간직한 세칭 ‘청송사기’는 18세기에 등장하여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전형성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청송백자는 과거 서민들이 친근하게 사용하던 생활필수품으로 경북 지역에서 널리 유통되었던 생활도자기이다. 경북지역에서는 문경백자와 함께 서민들의 생활도자기를 공급하는 양대 축으로 청송백자는 경북 북부 동해안 및 의성, 대구 등 내륙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17)
그래서 과거 경북 지역에서는 세칭 ‘청송사기’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더구나 그 품질과 기술력은 어느 지역에서 생산되던 도자기보다 우수하였다. ´아사카와 다쿠미´는「조선도자명고」에서 청송의 도공을 일컬 어 도자기 기술의 한 계통으로 밝히고 있다.18) 이는 조선 도자 계통의 하나의 굵직한 축으로서 청송백자의 기술력이 어느 지역 도자기와 비교하여도 결코 손색이 없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청송백자는 민요 중에서도 특색 있는 도자기로서 으뜸이었다. 조선시대 지역 민간도자기 가운데 유일하게 전세품傳世品의 산출지를 알 수 있을 만큼 형태와 색상·무게 등에 큰 차별성을 보인다. 그래서 청송백자는 해주·회령·양구와 함께 조선 후기 특색 있는 지방의 4대 민요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특색을 가진 청송백자는 필연적으로 좋은 원료에서 기인하는데, 원료가 가장 우수한 곳으로 인정받아 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가장 먼저 원료 조사가 이루어진 곳19)이기도 하다. 또한 황실 진상품 백자의 경우 경북 청송 도석과 경남 하동산 백토를 혼합하여 사용하였고, 재한 일본인 공장으로 우선 납품된 사례가 나타난다.20)
이처럼 일제강점기에는 청송백자의 상품성을 인정받아 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21) 동아일보(1927.6.23)에서는 “청송에서 제작된 상품들은 일본 각지에 대체로 판매되었고, 특히 동경에 소재한 미츠코시상점三越商店 등에서 일정 기간 꾸준히 청송백자를 구매하였다.”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기능보유자
고만경 옹의 물레작업 모습

청송백자 사기장 이야기

 

청송백자 기능보유자 ‘고만경 옹’의
백자인생 이야기
청송백자는 2009년 9월 1일에 청송군 향토문화유산(무형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기능 보유자로 고만경高萬慶, 1930년 출생이 지정되었다. 현재 청송백자 전수관에서는 청송백자 기능 보유자 고만경 옹으로부터 필자(수석전수자 윤한성)를 비롯한 전수자 안세진, 최준수 등 3명이 전통기예를 전승 받고 있다. 기능 보유자 고만경 옹의 생애사를 중심으로 청송백자의 간략한 역사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고만경 옹의 일대기에 대한 내용의 기술은 향토사학자인 강병극의 논문인 「陶石을 이용한靑松沙器 製作技術의 變化樣相」(안동대교 대학원, 2004)을 많이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생애 약사고만경 선생님은 1930년 12월 29일(음력)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청송군 부남면 이현리로 이사하여 생활하게 된다. 1945년(15세)에 생계수단으로 부남면 화장리 웃화장공방(점주 곽명수)에 입문하여 영덕 강구읍 진불 출신의 ‘남촌 어른’으로부터 사기제작기술을 전수받기 시작해 1947년(17세) 사기대장이 되어 한소밭골 공방에서 처음 자신의 청송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후 설티, 웃화장, 질티, 법수의 공방들을 옮겨가며 사기대장일을 하였고 웃화장 공방의 ‘하외 어른’으로부터 많은 기술을 전수받아 웃화장공방을 직접 운영하면서 더욱더 숙련된 사기대장으로 거듭난다. 15세에 입문한 이래 근대기 왜사기의 보급과 사기 공장의 경영악화 등으로 인해 1948년 폐점하기까지 13년간 청송백자 사기대장으로 종사하였다. 폐점 이후에는 농사일과 정미소 운영 등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2001년 대구에서 청송군 문화관광과 강병극 계장과의 만남과 2003년 당시 대구에서 개인 공방을 운영하고 있던 필자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40여 년간 잊고 있던 청송백자 제작기술을 다시 연마하기 시작해, 2005년 청송군의 지원으로 대구시 북구 대현 2동 437-29 자택에서 공방을 차려놓고 청송백자 재현 작업을 시작했다.
고만경 선생님의 본격적인 청송백자 복원작업은 2009. 7. 1 청송백자전수관이 개관하면서부터다. 이후 청송군 조례에 근거하여 청송군 향토문화유산(무형유산) 제1호(2009.9.1) 청송백자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그 후 현재까지 87세의 고령의나이에도 불구하고 청송백자의 전승과 보존을 위한 집념을 불태우고 있다.

회고를 통해 바라본
청송백자 마지막 사기장 이야기
(1) 청송백자 사기대장 입문
15세 되던 1945년 당시 집안 살림이 넉넉지 않아 ‘입 하나 더는 것’(가급적 식구 수를 줄이는 것)이 절박한 상황이라 촌수가 먼 자형뻘 되는 곽명수가 운영하는 화장의 사기공방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1년이 지나서 당시 공방의 사기대장인 남촌어른으로부터 ‘물레에 앉아서 만들어 봐라’는 권유를 받아 틈틈이 사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기장 일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일이었고 배우는 기간이 길어 당장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은 배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사기대장의 보수는 사기굴에서 한 굴을 구워낸 전체 사기양의 1할 7푼에 해당하는 그릇을 지급받았는데, 당시 물가로 환산하면 송아지 1마리에 버금갔다고 하니 농사일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보수 수준이라 남촌 어른의 권유를 받아들여 물레질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사기제작 기술은 대부분 어깨너머로 배워야만 했다. 스승의 체계적인 가르침 없이 오직 스승의 모습을 보고 따라 배우는 것이 당시의 도제식 기술 전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기대장의 ‘꼬박’ 나르는 일 등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점토의 성질과 도구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고, 그릇의 형태와 종류에 따른 그릇의 굽 모양과 굽깎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청송사기는 각 기물별로 만드는 방법이나 난이도가 다른데, 초보단계에서는 잔 그릇인 종지나 접시 등을 제작하면서 흙의 성질과 손의 감각을 익혔다. 그다음 단계로 탕기와 냉면기 그리고 ‘늘기류’(사발이나 대접과 같이 꼬박의 늘이기 작업을 통해 주로 제작하는 그릇) 등의 기물 제작을 통해 그릇의 종류에 따라 꼬박의 묽기 정도와 꼬박 하나로 어떤 종류의 그릇을 몇 개 정도 만들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짐작도 키워나갔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보다 고난도의 단지, 제기접시, 잔대, 병류, 촛대, 향로 등을 만들면서 숙련도를 더해 갔으며, 청송사기가 주로 미적인 예술성을 앞세우는 그릇이 아닌 민간인들의 생활필수품으로 기능성이 중시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청송사기의 원료인 도석陶石은 돌의 상태라 원료의 채취에 많은 노력과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원료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가급적 얇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도석을 빻아서 수비를 하면 질(점토)이 명주 고름같이 부드럽고 힘이 없어서 쉽게 흘러내리기 때문에 처음 접한 사기대장들이 초반에는 애를 먹었다고 한다. 바로 청송사기가 갖는 원료의 특성이자 이에 맞는 제작기술을 사기대장이 손에 익혀야 하나 쉽지가 않았다. 이러한 청송사기의 특징들을 이해해나가면서 남촌 어른 밑에서 3년을 연습하니 고만경 선생님은 잔 그릇에서부터 제법 큰 그릇까지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2) 숙련된 사기대장이 되다
3년의 연습을 통해 사기대장이 된 17세가 되던 해에 마침 점주였던 곽명수가 새로 공방을 지어 고만경을 사기대장으로 앉히는데 이때 처음으로 독립하여 사기대장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첫 사기대장으로서의 역할은 쉽지 않았다. 한 굴의 사기를 만들어 번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달가량의 성형 작업이 필요한데, 무려 5회에 걸쳐 가마에서 번조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당시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청송백자의 현대적 상차림 제안

 

청송백자,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과 정성으로

 

청송백자는 지난 6.25 동란 이후, 급속한 공산품의 보급으로 인해 그 효용성이나 가격 경쟁력에 밀려 지난 반세기 동안 깊은 잠을 자고 있었던 불우한 시간을 지나왔다. 그러나 청송백자는 황해도 해주, 함경도 회령, 강원도 양구백자와 함께 조선 후기를 책임졌던 조선시대 4대 지방요로서 가장 품격 있고 심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생활도자로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문화예술작품이며, 유백색의 담백한 미美와 품격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또한, 청송백자의 가장 큰 특징은 현대 공예작가 본인의 입신을 위한 작가주의에 기반한 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청송백자 고유의 전통과 원형질에 바탕을 두고서 청송백자 기능보유자이신 고만경선생님의 지도 아래 세 명의 제자들이 오롯이 청송백자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작업에 매진해오고 있다. 이와 같이 우수한 전통문화유산자원을 21세기, 현재에도 옛 명성을 회복할 만한 문화적 가치 회복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두메산골 농산어촌으로 인식되고 있는 청송의 향토문화자원으로만 기억되고 각인되는 것이 아닌 신구新舊의 복합적 이미지를 디자인하고 이를 보다 충실하게 홍보마케팅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청송백자에 대한 역사성은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등등의 전 과정이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청송백자의 가치를 일찍 발견했던 여러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관계자들의 지속적이고 애정 어린 관심과 이에 보답하기 위한 청송백자 기능보유자인 고만경 옹을 비롯한 전수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인해 2009년 청송백자전수관이 개관한지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500년 전통의 청송백자 원형질을 복원하는 성과를 일궈냈다.
이러한 성과는 기능보유자인 고만경 옹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있었기에 단기간에 가능하였으며, 청송백자의 제작 원료인 ‘도석’의 수비와 정제에서부터 기물의 성형과 번조 등 모든 제작 과정을 전통 방법 그대로를 고집하는 장인으로서의 집념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고만경 옹의 전통적 제작 방식에 대한 고집은 당신 스스로의 솔선수범을 통해 정해진다. 그 정신과 기능을 잇는 제자들이 전통의 맥을 계승하고 복원하는 작품 활동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정념正念, 정진精進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후 2013년 청송문화관광재단 출범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 청송백자는 지난 3년 동안 청송백자만이 지닌 본연의 가치 회복은 물론 실용 도자로서의 전통의 현대화를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해 왔다.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회복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정에서 생활도자로서 사랑을 받았던 청송백자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청송백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품고 청송백자가 다시금 현대인들의 생활도자로서 개량화, 선진화할 수 있는 다양한 디자인과 쓰임을 가질 수 있도록 연구, 개발해 왔으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결실을 맺고 있다. 감사하게도 청송백자는 현재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011년부터 꾸준히 참가해온 <서울리빙디자인페어>를 통해 외국 브랜드와 작가주의 공예품에 길들여졌던 많은 도자 애호가들에게 청송백자로서만이 아니라 현대 공예트렌드는 물론 현대인의 식생활과 리빙문화 전반의 변화에 적용 가능한 실용 도자를 선보이고자 노력했다. 또한 전문 스타일리스트와 협업하여 현대의 다양한 가족 구성과 홈 파티 등의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어우러질 수 있는 상차림을 제안하여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우리 전통 백자의 현대적 활용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우리 재단과 업무협약 관계에 있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와는 영화제 기간 동안 청송백자 특별전시회와 더불어 청송백자를 활용한 문화상품 개발, 판매 및 백자 트로피 기획, 제작을 통해 청송백자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최한 <2015공예가 맛있다!> 전시회에 참가하여 국내 공예 트렌드에서 지역 생활공예품으로서 ‘새로운 힘’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와 노력은 청송백자와 함께 조선 4대 지방요의 하나인 양구백자와의 자연스러운 협업 체계를 구축하여, 조선백자가 지닌 본연의 심미적 가치 회복 및 발전을 위한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청송백자와 양구백자는 <조선 4대 지방요 공동학술연구>, <청송·양구백자 교류전>, <조선 4대 지방요 국제포럼 및 국제심포지엄 개최>, <청송·양구백자 세계화 사업> 등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지난 4월 청송도석과 양구백토를 50%씩 합토하여 양측 도예가들이 빚어낸 작품을 번조하는 워크숍이 남이섬에서 개최되었으며 그 결과물인 30여 점의 작품이 6월 30일까지 남이섬양구백자랑에서 전시된다. 이번 워크숍을 시작으로 향후 조선 4대 지방요의 북한의 해주백자와 회령자기까지 연대를 추진하여 통일 백자 전시로 연결하고자 한다.
최근에 청송백자를 주목할 만한 계기가 마련됐다. 지난 4월 11일 한식세계화 사업의 일환으로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식체험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 ‘K-Style Hub 한식문화관’에 청송백자 상설전시코너가 마련되었다.
 

 양구·청송백토
합토合土전

 2016.5.1~6.30 남이섬 양구백자랑

 

경상북도 청송군과 강원도 양구군이 백자 백토 활성화와 발전을 위해 청송도석과 양구백토를 각각 50%씩 섞은 점토로 작품을 빚어 전통가마에 함께 번조하는 워크숍과 기획전 ‘합토전’을 열었다. 청송백자전수관에서는 기능보유자 고만경옹, 수석전수자 윤한성을 비롯한 안세진, 최준수 전수자가 참여했고, 양구백자 박물관에서는 정두섭 관장, 조영복, 최관순, 장덕진, 박장열, 김윤하 작가 등이 참여했다.
청송백자 수석전수자인 윤한성 과장은 “조선시대 4대 지방요중 남한의 청송백자와 양구백자가 이번 합토전 백자 제작기술교류와 지속적인 공동연구를 통해 백자 산업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며, “지방요가 지닌 전통문화로서의 우수한 가치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경상북도 청송, 강원도 양구, 황해도 해주, 함경북도 회령 등이 대표적인 조선시대 지방요로, 이곳에서는 대중적으로 사용됐던 생활자기를 생산했다고 알려져 있다. 청송백자는 경상북도 청송에서 500년 전통의 맥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는 생활도자기이다. 특히 흙을 사용하는 다른 백자와 달리, 청송에서 채취한 ‘도석’이라는 돌을 빻아서 빚는 독특한 전통 제작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얇고 가벼운 장점과 오랜 시간 사용해도 한결같은 편안함을 주는 아름다운 도자기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특별한 아름다움과 유구한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은 물론 세계적인 명품 도자기로 거듭나고자 노력하고 있다. 남한의 양구백자는 고려 말부터 1970년대 중·후반까지 600년간 백자를 생산했으며, 조선백자의 시원으로 유명하다. 또한 양구백토는 분원 설립 이후 분원 사용 원료 중 가장 많은 양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의 각 지방요(해주와 회령 포함)는 각 지역 선조들의 고유한 풍습과 민족적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들 조선시대 ‘4대 지방요’를 바탕으로 남북한 문화 교류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번 워크숍과 합토전은 이러한 남북한 도자문화 교류에 앞서 청송지역과 양구지역의 도자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진행된 행사이다. 한편 청송군은 지난해 4월 양구군과 백자산업 발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양 기관은 조선 4대 지방요 공동학술연구, 문화관광산업발전 상호 간 교류전, 국제포럼, 기타 백자 관련 공동사업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6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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