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특집에서는 도자기 제작에 쓰이는 재료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점토. 그중에서도 우리 도예가들의 손으로 직접 땅에서 채취하고, 빚어 작품으로 완성되는 우리 점토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한다. 강원도 양구, 경상도 산청, 제주도 세 지역에서 직접 흙을 다루고, 연구하는 전문가 3인의 제언을 통해 각 지역의 대표 점토에 대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과 그동안 어떻게 쓰이고 연구, 개발돼왔는지, 그리고 당면한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직접 들어본다.
양구백토(도사리) 전경
백자의 근원 ‘양구백토’
백토의 사전적 의미를 검색해보면, ‘백토는 백선토白善土·백악白惡이라고도 한다. 백자의 원료로서 백자용 점토 또는 고령토를 지칭한다. 순백색이며 약간 회색을 나타내는 것도 있지만,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면 흰색이 된다. 제1점토와 제2점토로 나뉘며, 제1점토는 점력이 좋지 못하지만 번조 후의 백색도가 좋고, 제2점토는 점력은 좋으나 번조 후의 백색도가 나쁘다. 주원료는 카올리나이트와 할로이사이트이다.1)’ 정도로 설명돼있다. 이렇게 사전적 의미로 살펴봤을 때 백토는 제1점토의 경우가 번조 후 백색도가 높은 것으로 구분돼있다. 양구의 백토는 제1점토에 해당하며, 고려 말부터 1970년대까지 양구지역에서 백자 생산을 지속케 한 원료이며,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서 백자 생산에 사용된 주원료이기도 하다.
본 글에서는 600여 년 동안 지역 백자 생산의 원료로 사용되고, 분원이 설치되어 해체될 때까지 꾸준히 분원백자 생산의 주원료로 사용되었던 양구백토의 생산과 운송, 그리고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오늘날 양구백토를 사용함에 있어서 보존과 보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해 보고자 한다.
양구백토의 역사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필요한 자기를 제작하기 위하여 사옹원이 직접 왕실자기를 제작하는 관요를 운영했다. 이는 1467년경 분원으로 설치되었는데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는 백자를 제작했다. 관요는 10년 주기로 가마번조를 위한 땔감을 확보하기 위하여 옮겨 다녔고, 1752년에 이르러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게 된다.2) 이처럼 가마번조에 필요한 땔감은 백자 제작에 꼭 필요한 필수 요건 중의 하나이고, 이에 못지않게 백자 제작 원료도 상당히 중요하였다. 분원에서는 다양한 지역에서 산출되는 원료를 공급받아서 백자를 제작했다.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백토의 공급지를 살펴보면 웅천, 이천, 사현, 충청도, 양근, 원주, 서산, 경주, 선천, 진주, 양구, 충주, 봉산, 하동, 곤양,가평 등 여러 곳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문헌에는 경상도·강원도·경기도·충청도·평안도·황해도 등의 여러 지역이 등장한다. 이 중에서 특히 양구지역은 백토의 중요한 원료 산지로 분원 설치 이후 지속적으로 관요백자 제작의 주원료를 공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구백토의 채굴이 확인된 최초의 기록은 『서암사지』이며, 상납하는 백토의 굴취작업을 임금인 선조에게 상소하여 용전을 주고 사역케 했다는 기록이다.3) 이후에도 여러 사료에서 꾸준히 양구백토의 채굴과 상납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으며, 분원 민영화 이후에도 지속된 것으로 여겨진다.4) 하지만 조선시대에 양구지역의 백토가 채굴된 장소가 어디인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방산면 현리 지역에서 확인된 폐 백토 더미를 통해서 분원에서 사용되었던 백토가 채굴되었던 지역으로 추정될 뿐이다.5) 백토 채굴지로는 현재 양구군 방산면 일대로만 한정하여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의 조선 도자기 원료 조사에 따르면 양구군 상동면과 방산면 일대에서 산성자토가 산출되어 분원으로 공급된 것으로 확인된다.6) 또한 수로 운송이 시작 되었던 양구읍 상무룡리의 경우에도 많은 가마터의 확인을 통해 백토의 매장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 지역의 백토도 분원자기의 원료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붉은 백토 광산
다변의 아름다움 ‘산청토’
산청토의 시론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산청군은 남강이 중앙에 흐르고 있으며, 동쪽으로 의령군과 합천군, 서쪽으로 하동군, 남쪽으로 진주시, 북쪽으로 함양군과 거창군이 접하고 있다. 지리산을 비롯한 제법 높은 산들이 많고 남강을 따라서 비교적 넓고 평탄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일찍이 사람들이 거주하여 구석기, 청동기, 가야시대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가야 고분군에서 다량의 가야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이로써 일찍부터 이곳에 도자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자기소와 도기소를 표시한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산청 인근의 진주 3곳, 사천 2곳, 합천 1곳의 자기소가 표시되어 있다. 남강을 통한 수운을 이용한다면 모두 산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산청에는 산이 많아 나무가 풍부하고 남강으로 인해 수로 운송이 용이하며 많은 양의 백토와 점토가 매장되어있어 도자기를 만들기 좋은 환경이다. 비록 관요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다수의 분청사기와 백자 가마터가 존재하고 있다. 14세기 말에 해당하는 초기 분청사기를 만든 신등면 장천리 가마터가 있고, 생초면 대포리 가마터의 경우 경질 백자편이 붙은 분청사기가 출토되어 15세기 전반에 이미 경질백자의 생산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5세기 후반으로 편년 되는 단성면 방목리 상감백자편들은 삼성리움미술관에 소장된 「백자상감영인정씨묘지명」과 「백자상감초화문편병」의 생산지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1) 또한 방목리 가마터 발굴 결과 불창과 격벽 시설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분실요로 밝혀져 가마 축조 기술 역시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한국적인 흙산청토라 하면 우리가 흔히 도자 재료상에서 보는 10Kg 단위로 포장된 거친 백토를 혼합한 사질 점토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산청토는 산청에서 생산되는 점토와 고령토로 불리기도 하는 다양한 백토를 포함한 모든 흙이라 할 수 있다.
산청에서 생산되는 흙은 점토보다는 백토의 양이 월등히 많다. 보통 산에서 흙을 채굴할 때 표피층을 걷어내면 1m 남짓 되는 갈색을 띠는 부분이 점토층이다.
고립된 흙 ‘제주 고냉이토’
제주옹기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의 토기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에서 토제 그릇의 등장은 신석기 시대 유적인 고산리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확인되는 ‘고산리식토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과 같은 옹기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문헌상의 기록에 나와 있는 옹기의 흔적을 발췌해보면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제주사람들은 섬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연을 최대한 이용해 어려움을 극복하며 삶을 영위해 왔다. 제주옹기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생성되어 오랫동안 제주사람들의 삶과 함께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제주옹기의 특징
제주옹기는 크게 ‘노랑그릇’과 ‘검은그릇’으로 나뉜다. 노랑그릇은 ‘노랑굴’에서 구워지고 주로 보관이나 운반 용구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그릇이다. ‘검은굴’에서 구워지는 검은 그릇은 정화력이 뛰어나 물그릇이나 제사용 그릇 등으로 사용한다. 제주옹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는다. 유약을 바르지 않아도 흙의 성분과 불의 효과로 자연 발색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유약을 칠하지 않아 습도와 공기의 통풍으로 옹기 자체가 숨을 쉬며 정제하는 방부 역할을 한다. 그래서 물이 귀했던 시절에는 고인 물을 길어다가 항아리에 부어두면 자연정화가 되었다. 또한 발효와 저장성이 뛰어나 장이나 젓갈, 김치를 저장하는 최상의 생활용품이기도 했다.
제주옹기의 재료인 흙의 성분은 타 지역과는 다르다. 제주점토는 화산회토로 철분 함량이 많아 구웠을 때 붉은색을 띤다. 이는 건조 시 습기 배출에 영향을 주어 깨지거나 뒤틀림이 생기며, 번조시 파손율이 크다. 일반적인 점토에 비해 성질이 까다로운 편이다. 제주옹기의 형태와 옹기 문양 역시 타 지역과 구별된다. 생활용구는 지역의 기후,풍토, 생활환경을 그대로 반영한다. 제주도는 해양성기후의 영향으로 습기가 많아 씨앗을 잘못 보관하면 상할 수 있기 때문에 보관기의 입구를 좁게 만들었다. 그리고 물이 귀했던 제주도에서는 식수를 지고 날랐던 허벅은 많은 양의 물이 들어가게 배를 부르게 만들었고, 부리는 물이 쏟아지지 않게 좁게 만들었다. 이렇듯 제주옹기는 오랜 경험의 지혜가 그대로 담겨 있다. 그리고 옹기에 나타나는 문양은 번조 시 자연 발색으로 나타나는 문양과 도공이 직접 그린 보로롱 자국으로 제주옹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양이다.
제주옹기는 사용하는 땔감이 다르다. 가마 번조 시 나뭇잎이 붙어있는 잔가지를 묶어 말린 ‘섬피’를 땔감으로 사용하는데, 가마 안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하면 다량의 섬피를 지속적으로 집어넣어 온도를 최고조로 올린다. 이때 ‘섬피’는 유약을 입히지 않은 그릇에 많은 재가 입혀져 발색을 내는 역할을 한다.
제주전통가마는 돌가마이다. 제주도에서는 가마를 ‘굴’이라고 한다. 육지부에서는 ‘흙벽돌’을 만들어 사용했지만, 제주도에서는 대부분 다공질多孔質 현무암을 그대로 사용하여 가마를 축조한다. 이것은 제주도의 돌은 화산 폭발에 의한 용암석이어서 내화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환경에 적응하며 지역의 실정에 맞게 가마는 축조되고, 경험에 의해 변화하였다.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바람·돌·흙·물 등의 풍토가 내륙지방과는 다르다. 여러 차례의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지질은 구멍이 많은 현무암으로 구성돼있고 토양은 화산회토火山灰土가 주를 이루고 있다. 화산회토는 화산의폭발물이 바람에 의해 운반·퇴적되어 생성된 토양이다. 입자가 가볍고, 바람에 흩날리는 ‘뜬흑(퍼석퍼석한 흙)’으로 물이 고이지 못하고 지하로 빠져들어 해안가에서 용출溶出하고 하천은 거의 건천乾川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물이 귀했기 때문에 그릇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과 점력粘力이 있는 흙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9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