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믹 타일의 역사
타일의 역사는 도자기의 역사와 같은 양상을 띄고있으며, 그 나라의 건축양식, 종교 등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서구와 같이 벽돌로 지은 주택은 타일의 시공이 용이하지만 일본과 같이 지진이 많은 나라는 목조건축물이 많아 타일의 사용이 어려웠었다. 또한 이슬람교의 모스크와 같이 종교의 존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량의 타일이 사용되어 제조 기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대 이집트에는 기원전 2,650년경에 세계 최대 타일이 계단 피라미드의 지하통로 벽에 3만장 남짓 붙여졌다. 왕의 영혼이 현세에 돌아오길 바라는 바램에서 청색의 아름다운 타일을 붙여 장식했던 것이다. 그후, 타일은 이슬람세계에서 예배의 장소인 모스크를 장식하는 건자재로 발달해갔다. 여기서도 신을 위해, 신앙을 위해 디자인 됐다. 설계자는 지극히 복잡한 기하학 무늬로 타일을 붙였다. 그후,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는 레콘키스타(크리스트교 국가에 의한 이베리아 반도의 재정복운동), 종교개혁 등을 계기로 신 혹은 신앙을 위해서가 아닌 인간을 위해서 타일을 붙이는 장식의 동기가 바뀌었으며 17~18세기가 되자, 서서히 타일이 주택건축의 일부로 들어왔다. 산업혁명 후 영국에서 주택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 지면서 사람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다가오게 된 것이다. 이 시대 도시 건축물은 환경도예라는 자연과의 쾌적한 환경을 이루며 사람들에게 미적 쾌감을 주고, 도시 환경의 질을 향상시킬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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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타일
기원전 3,500년경에 시작한 고대 오리엔트 문명, 그 중심지는 주위를 사막과 산악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메소포타미아와, 금속, 석재, 목재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이집트. 피라미드나 신전에서는 왕이나 신등의 권위에 관한 외경의 생각으로부터 사람들의 시행착오의 끝에 타일 장식을 실현했다. 이것이 오리엔트 타일의 시작이다.
+ 이집트 타일
이집트는, 피라미드에 대표되는 돌의 문화가 중심이었으나 라피스라줄리lapis lazuli나 토루코 돌 등의 귀석이 보석품의 재료로 사용되는 한편, 도자기로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고안되어, 이집트. 파이안스라고 하는 특별한 도자기가 등장했다. 모래를 주원료로 하고, 구리로 토르코석블루에 발색된 기법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타일도 이 기법으로 만들어졌고, 그 외에 부적이나 장신구도 이 수水색의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진1) 이집트 / 시약타일(파비안스타일)
+ 메소포타미아 타일
점토가 풍부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점토를 나무틀에 넣어 일정한 크기로 모양을 내고 일조벽돌sundried Brick로 집이나 신전을 만들어 그 표면 장식에 원뿔형 도자 모자이크 타일로 사용되었다. 일조벽돌을 구운 소성벽돌에는 수평수직으로 쌓는 법을 넣어 건물의 장식성을 높이는 도안이 되었다. 왕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건물에는 벽돌 하나하나에 쐐기문자상형문자로 명銘을 새겨 소중하게 다뤘다.
(사진2) 이라크-앗슈르 / 글을 새겨 넣어 구운 벽돌
이슬람 타일
이슬람 타일은 7세기의 아라비아 반도를 기점으로 단기간 광대한 지역에 퍼진 이슬람 문명에서 시작되었다. 작열하는 사막 등의 험한 풍토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신에 대한 신앙의 마음에서 장식하고자 하는 의지가 싹텄다. 기하학무늬로 장식된 우주를 예배 장소인 모스크 등의 종교시설이나 왕후 귀족의 저택에 전개한 것이다. 예로부터 뛰어난 문화적 배경과 동방에서의 문물 유입을 더해, 이슬람 문화는 독자적 발전을 이뤄냈다. 도기 분야에서는 자기에 적합한 원료가 없기 때문에 저온소성의 도기질 원료를 이용해 자기의 백白을 끄집어내 고안한 중국의 백자를 흉내냈다. 희고 불투명한 주석 백약 도기나 염색 자기를 흉내낸 백지남채 도기가 융성한 것이다. 그 외 이슬람의 모자이크나 래스터채 타일이 고안돼 발전했다. 우상숭배 금지라는 교의에서온 도안은 추상적 기하학무늬나 아라비아풍의 당초무늬 등이 특징적이었으나, 종교시설 이외의 장소에는 인물이나 동물 등의 도안도 그려졌다. 가장 오랜 타일의 역사를 가진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지금도 과거의 타일형식이 남아 타일장식에 대한 기술과 세공의 극치로 아직까지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과 감탄을 전해주고 있다.
+ 이란의 타일
12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까지 200년간은 이란의 열린 타일 발전이 현저한 시대이다. 테헤란과 옛도읍 이스탄의 중간에 있는 카샨 마을에서 금속광택을 가진 래스터채의 타일이 독점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외 청유, 백유 등의 단색 타일이나 백지다채색 타일이 만들어졌다. 성형(별모양)의 타일은 십자형 타일과 짜맞추어 벽아래의 판자 부분에 붙였다. 또한 모자이크 타일도 건물 외벽에 붙였다. 청색의 발색은 구리에 의한 것으로 사막의 백성에게는 귀중한 물의 색으로 아름다운 하늘의 색에서 영원한 생명이나 천국에 대한 동경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단색이면서 동물 등의 부조가 입혀진 것도 있다.
(사진3) 이란 / 청유부출당초문타일
+ 터키 타일
터키에서는 12세기부터 래스터채나 모자이크 타일, 15세기부터는 백지남채 타일이나 모자이크 타일의 간이판인 쿠에르다·세카 기법의 타일이 등장했다. 오스만 왕조시대의 터키에서는 아나토리아반도 서부의 이즈닉크에서 16세기 후반에 백지다채 타일의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얀색을 내기 위해서 흰 규석을 분말한 한 것을 주원료로 하고 유리성분을 첨가한 특수한 원료로 타일을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 도입된 토마토 빨강 부분에는 부풀어 오르는 것이 특징인 철분을 많이 포함한 규석의 가루가 사용되었다.
(사진4) 터키-이즈닉크 / 백지다채 초화문타일
+ 시리아 타일
오스만 왕조 최전성기였던 시리아에서는 다마스쿠스 등의 요업지(도자기, 유리, 벽돌 등의 제조업)에서 백지다채 타일이 만들어졌으나, 토루코처럼 빨간색은 사용되지 않고 남색, 청색, 녹색, 연보라색, 올리브색이 사용되었다. 다마쿠스 손이라 불리는 육각형의 백지남채 타일이 만들어졌으나 석재가 풍부한 지역에서 타일의 사용량은 한계가 있었다.
(사진5) 시리아 / 백지다채 모스크램프 식물문 타일
+ 파키스탄 타일
파키스탄의 타일은 중앙 아시아에 번성한 티무르 왕조의 영향에 의해 무르탄에서 백지남채 타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12세기 전후의 것으로 빨간색 소지에 하얀 화장을 한 후에 물색이나 연보라색, 청색으로 면을 색칠했다. 기하학무늬에도 티무르시대의 것부터의 변화가 보여진다.
(사진6) 파키스탄 / 백지 남채 초화문 타일
스페인 타일
8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 이슬람 교도는 이곳에 고도의 문화를 가져오고, 15세기의 크리스트교에 의한 제압후에도 그 문화는 계승되었다. 스페인의 거리에는 지금도 알함브라 궁전에 대표되는 이슬람 문화가 짙게 남아 있다. 타일은 컷, 워크, 모자이크나 쿠엔카 기법에 의해 기하학무늬, 금속적 빛을 지닌 래스타채 타일 등의 이슬람 양식의 것이 16세기경까지 계속 되었다. 또, 17세기가 되자 스페인의 타일은 포르투칼이나 남프랑스, 중남미에 수출되었다. 한편, 마졸리카 섬을 거쳐 이탈리아에 수출된 스페인의 이슬람풍 타일이나 기물은 이탈리아에서 ‘마졸리카’로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이탈리아에서 발전해 근세를 대표하는 ‘이탈리아·마졸리카’로 꽃피웠다. 결국 그 주석유색그림도기의 기술이 유럽 각지에 전파되면서 다시 스페인까지 전해져 ‘스패니쉬·마졸리카’라고 불려진 것이다.
+ 쿠엔카 기법 타일
쿠엔카는 16세기 초두에 고안된 모자이크 타일의 간편 제작법으로, 1장의 타일 표면에 틀로 무늬의 윤곽을 부풀어 올려 성형한 것으로 오목한 부분에 색유를 주로 해서 소성한다. 이 기법으로 인해 형태 밀기에 의한 양산 효과부터, 동일무늬에 의한 반복 장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진7) 스페인 / 다채 기하문 타일
+ 래스타채 타일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시대부터의 도자기 기술로 래스타채 타일이나 그릇이 만들어져있고, 그릇은 주석유색그림도기도 포함해 ‘이스파노·모레스크’라고 불리었다. 유약에 포함된 동이 많으면 빨강으로, 은이 많으면 황색~금색으로 나타난다.
(사진8) 스페인/ 래스타채. 코발트채타일
+ 마졸리카 타일
이탈리아에서 완성된 근세를 대표하는 마졸리카주색유색그림도자기는, 유럽각지에 그 기술이 전해져 스페인에도 꽃이나 식물, 인물, 정물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이 타일에 그려졌다.
(사진9) 스페인 / 다채 조리기구와 야채문 조회타일(마졸리카타일)
네덜란드 타일
스페인에서 이탈리아에 들어온 주석유색그림도기는 16세기 초기에 ⌜마졸리카⌟라고 해서 이탈리아의 도공에 의해 안트베르펜에 전해진다. 그 후 많은 도공이 네덜란드 등 유럽 북부지역으로 이주해, 네덜란드에서의 백지다채타일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는 17~18세기 대항해 시대를 맞이해 부를 축적한 새로운 시민층이 대두해 왔다. 종교개혁의 영향도 있었으며, 타일에 의한 장식은 이미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인식이 바뀌었다.
애초에는 풍부함의 상징으로써의 타일은 대량으로 생활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이르의 회화작품을 보면 민가 마루의 나무에 타일이 사용되어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것이 네덜란드의 연합 동인도회사가 수입한 중국의 염부자기의 영향을 받은 ‘델프트 도기’로 이것은 도기질의 백지남채 타일로 불려졌다. 튤립이나 아이의 놀이, 범선, 물가의 풍경 등 세속적인 무늬를 담고 있으며 무역상 등 유복한 가정에서는 이들 타일이 실내의 난로 주위나 식당 등의 벽면을 장식한다. 이 백지남채 타일은 유럽 각지에 전파해 제작되어 인기를 얻었다. 이탈리아에서 완성된 마졸리카는 유럽 각지로 전해젔지만 네덜란드에서는 16세기말 경부터 석류 등의 과일이나 인물 등으로 그려지게 된다.
(사진10) 네덜란드 / 백지다채 튤립문양타일
(사진11) 네덜란드 / 백지다채풍경문양 타일
영국의 타일
산업혁명을 끝내고 공예나 장식예술의 최전성기였던 19세기의 빅토리아 초기를 맞이한 영국에서는 부를 얻은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가 생활속 탐욕으로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예술성이나 청결감이 풍부한 타일은 1900년 전후의 건축붐을 거치면서 주택에는 빠뜨릴수 없는 장식분야로 중산계층을 중심으로 보급됐다. 타일은 교외의 단독주택이나 집단주택 외에 공회당이나 호텔, 아파트, 바 등의 공공시설에도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그 보급을 후원한 것이 획기적인 제작방식의 개발이다. 지금까지의 손수 만들기를 대신해 분말로 가공한 원료를 기계로 프레스(누름) 성형하는 방식으로 개발돼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민톤이나 쐐기형 우드 등 많은 타일 메카에 의해 가식(장식을 첨가)기법이 고안되어 상감타일, 릴리프타일, 전사타일 등 다양한 장식타일이 생산되었다. 타일의 무늬는 당시 유행의 아르누보(신예술) 양식의 식물문양 외에 고금동서의 무늬를 모티브로 한 것이 요구되었다. 한편, 공업화에 반동에서 종래의 수작업을 다시보는 모리스나 드·모르간에 의한 아트 앤드 크래프트 운동(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공예혁신운동)이 흥해 손으로 그린 그림타일도 재평가 되었다.
+ 잉글리시· 델프트
네덜란드에서 중국도기의 영향을 받은 백지남채의 ‘델프트 타일’이 대유행하자 유럽 각지에서도 같은 종류의 타일이 제작되었다. 영국에도 많은 델프트 타일이 수출되어 국내산업을 압박한 덕에 네덜란드와 같은 기법으로 백지남채 타일이 만들어져 그것을 잉글리시·델프트라고 불렀다.
(사진12) 영국 / 백지화롱(꽃바구니)문양 잉글리시. 델프트타일
+ 빅토리안 타일
1900년 전후의 건축붐이 있었던 1830부터 1910년에 걸쳐 만들어진 영국의 장식타일을 빅토리안 타일이라고 부른다. 납을 사용한 유약 베이스에 철이나 동, 코발트, 크롬 등 금속을 넣어 특유의 정색(빛깔을 나타냄)을 되살린 색유가 특징이다. 특히 릴리프나 튜브 라이닝 등에서는 그 색유의 투명감이나 깊이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용도는 난로의 장식이나 벽의 마무리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상감타일은 주로 그 모양의 내구성을 되살려 마루깔이에 사용되었다.
(사진13) 영국 / 초화문 상감타일
+ 중세의 상감 타일
13~14세기에 프랑스의 시토 수도회가 가져온 기술로 적갈색의 두꺼운 소지에 새겨 넣어 거기에 백색의 진흙물을 흘려 넣어 모양이 드러나게 한 것이 특징이다. 농담의 갈색 타일을 펼쳐 모양을 표현했다. 비잔틴 시대의 포상타일이 기원으로 여겨진다.
(사진14) 영국 / 초화문 상감타일
+ 근대의 상감 타일
19세기 들어서면서 고딕양식의 부흥으로 다시 타일이 재검토되었다. 시행 착오의 끝에 종래의 수작업 방식으로 바뀌어 19세기 중반에는 점토 모양의 원료를 사용하는 건식성형에 의한 기계 생산이 구비됐으며, 실용화돼 다색이나 정밀한 무늬의 상감타일이 등장했다.
(사진15) 영국 / 건식단색 상감타일
+ 전사 타일
18세기 중반에 고안된 전사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기법으로 인쇄판에는 동이나 아연, 돌이 사용됐다. 그중에서도 동판은 치밀하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해 주로 사용되었다. 단색 외에 다색 인쇄로 한 것이나 단색으로 윤곽만을 전사한 것에 색유로 착색하는 다색 타입도 있었다. 특히 2~4색의 다색 프린트의 경우 민튼Minton 1793년 창설된 영국의 요업회사은 1색의 금속제 판을 만들어 1장의 종이에 다색 인쇄하고 무늬를 완성한 뒤 타일에 붙여 그림을 그려 넣은 블록·프린트·타일 생산 방식을 개발했다.
(사진16) 영국 민튼사제품 / 화병문 동판 전사 단색 타일
+ 단색 릴리프 타일
빅토리안 타일의 독특한 투명감과 빛과 그림자의 연출이 아름다운 타일이다. 금형으로 화병 등을 릴리프로 표현한 소지에 납을 포함한 색유를 넣어 소성한 것으로, 소성 중에 색유를 볼록한 부분에서 오목한 부분으로 흘려 그 결과 볼록한 부분은 성글고 엷게 보이고 반대로 오목한 부분은 색유가 스며들어 진하게 보이게 된다. 이러한 농담표현이 아름다운 것이 단색 릴리프의 특징이다. 또한 빛나게 보이는 유약은 ‘에모 옹브랑émaux ombrants(프)’이라 불리워 졌다.
(사진17) 영국 / 초상문 릴리프 타일
일본의 타일
6세기, 백제에서 건너간 기와박사가 전했다고 하는 기와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도판이 ‘부와’(바닥에 까는 기와)이다. 그것은 사원 건축의 마루에 요와(허리기와)로서 벽에 붙여졌다. 그후, 카마쿠라 시대에는 선종이 전래해 그 사원의 마루에는 반드시 부와가 붙여졌다. 이후 새로운 유약을 입힌 부와가 등장했고 그 일부는 모모야마 시대 이후 발전한 다도茶道와 함께, 풍로의 부대(주택 현관 입구의 한 단 낮은 마루)에 전용으로 사용된다. 종래, 일본의 건축은 목재와 흙, 종이로 만들어져 소재가 지닌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점토를 이용한 반복 장식이 도입된것은 메이지시대에 들어오고 나서이다. 세토지역에서 만들어진 ‘부와’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백자에 청화자기의 남색으로 문양을 그려넣고 색을 넣은 것으로 일본에서 최초의 본격젹인 타일로 건물 안에 물을 사용하는 벽이나 마루에 붙여졌다. 그 후 빅토리안 타일을 모방한 것이 국산화 되기에 이르러 기계생산에 의한 대량 생산의 기술이 확립되었다. 그 결과 수작업을 위해 치수 정도나 형태가 좋아지면서 부족함이 보완된 ‘부와’에서부터 시작해 각지의 도자기 산지에서 만들어진 수제 타일은 쇠퇴해 갔다. 그러나 내장용인 도기질 백색타일이나 빌딩 외벽용 타일, 작은 알갱이의 모자이크 타일 등이 등장해 일본 타일은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해 현재에 이르렀다.
(사진18) 일본 / 녹채 화문부와
(사진19) 일본 / 공작문 타일
한국의 타일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주로 와瓦. 전塼에서 기원을 찾을 수있다. 전이란 점토로 넓적하게 성형한 후 건조시켜서 소성한 것으로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전이 건축용 재료로 활용된 것은 낙랑시대로 이 시대에 발견된 전은 모두 중국 각지의 것과 같다. ‘전’은 용도에 따라서 바닥에 까는, 부상용敷床用 으로 쓰였던 ‘전’과 벽체를 축조하는 데 쓰였던 ‘전’으로 구분되지만, 건축물의 구축용이 아닌 장식재였으며 시대에 따라 문양과 용도의 표현 방법이 달라졌다.
삼국시대의 ‘전’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영향을 받아 식물 문양과 기하 문양이 주를 이루며, 고분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전’은 고딕적요소가 나타나고, 백제의 ‘전’은 부드럽고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백제에서는 복잡한 문양과 정교한 형태를 발전시켜 유약을 입힌 화려한 문양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전이 건축용 재료로서 많이 보급되었던 것은 불교의 융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쇠퇴하는 시기여서 다양한 전을 찾아보기가 힘들고, 대신 담벽을 장식하기 위한 환경 장식용으로 발달되었다. 또한 중국의 영향을 받은 청자의 출현으로 청자전 도판이 제작되었는데, 이는 현대의 벽장식용 타일류로 보여진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요업원료 산출국으로 일찍이 토기를 거쳐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청자, 백자 등 훌륭한 자기 예술품을 많이 산출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도자기 제조 기술이 극치에 이르렀던 것은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 컸다. 당시 왕궁에서쓰던 그릇과 묘사증원용 제기 등을 조달하기 위하여 고급도자기의 제조를 국영사업으로해 이를 적극 운영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도자기 공업은 국력의 성쇄에 직접 영향을 받아 이조 말기에 이르러 황실의 재정이 옹색해짐과 함께 도자기 공업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후 계속 현상 유지만 급급할 뿐 발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타일은 1920년대에 한국은행 본관에 외국산 타일을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1920년 일본인에 의한 일본경질도기 회사가 부산에 세워지면서 타일의 국내생산이 시작되었다. 그 후 1948년경 한국인에 의해 서울 노량진에 세워진 ‘서울 도자기 공업’은 타일 제조업의 효시라 할수 있으며, 이로 인해 한국에서도 많은 양의 타일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생산된 국산타일이 처음 사용된 건물은 서울대학교 의대 본관이다. 이와 같이 건축자재로서 사용된 타일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발생과 더불어 끓임없이 발전하여 왔으며, 실용성과 장식성을 모두 충족시키면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특히 현대 타일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역할과 특성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으며, 그 영역 또한 더욱 넓게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타일의 영역의 확장은 실내 건축 공간으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어, 주거 공간의 벽면을 장식하는 여려 재료들 중에서도 기능적이 면과 미적인 면을 동시에 충족 시켜줄 수 있는 타일장식이 점점 부상하게 되었다.
(사진 20) 한국 / 경복궁 아미산 굴뚝 / 육각몸체에 부조도판
(사진 21) 한국 / 경복궁 자경전과 꽃담
필자 박성빈은 신라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와 동대학원에서 조형정보를 전공했다. 현재 부산미술협회와 대한민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2006년에는 수원시장 표창을 수여 받기도 했다. 현재 (주)도호세라믹에서 이사직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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