乭石 김석환 선생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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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기반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라” 한평생 우리 전통도자 옹기를 기반으로 변형된 현대도자예술을 고집해온 도예가 돌석乭石 김석환 선생이 지난 12월 18일 타계했다. 향년 83세. 한국 현대도예 1세대인 김 선생의 전통 옹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많은 후배 도예가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그의 혹독하리 만큼 철저한 제자교육의 모습은 도예 교육계의 큰 어른 역할을 하셨다. 선생의 영전에 그를 가까이서 뵙던 제자들의 글을 띄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乭石 어록
김석환金碩煥선생님의 호는 돌석乭石 30년생으로 백말띠이시다. 작년 12월 83세로 타계하시어 애통한 마음으로 제자된 마음으로 글을 올린다. 선생님은 72년 단국대학교에 요업 공예과를 신설하여 온갖 시설과 학과목을 개설하고 학과장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연이어 이부웅, 정담순, 권오훈, 박종훈, 김혁수 교수를 영입하였고, 76학년도에는 응용미술과로 학과 명칭이 바뀌었다가 도예과로 다시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생님이 도예과에서 기초 작업을 하는 동안 많은 일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신설된지 40여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단국대학교의 도예의 전통과 혼의 역사로 자리 잡고 있다.
그분의 주제는 물레를 이용한 전통도예를 계승하는 일이다. 전통! 이는 우리에게는 엄격과 절제를 바탕으로 한 인내의 요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의 혼란과 방황의 시대인 만큼 학생들의 가치관도 많이 흔들릴 때이기에 대학으로서도 불안정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한 학교의 학과를 맡으시며 전통의 가치를 심는 일은 선생님의 혼을 심는 일과 같았다.
그 분의 일과는 간결하였다. 학교 그리고 댁, 댁 그리고 학교였다. 더구나 부군이시며 국문학자이신 장덕순 교수님까지 학교일에 조언을 해주셨으니 선생님의 재직동안은 오직 작업과 학교에 대한 일념으로 사셨다. 지금 선생님의 유업으로 안양 수리산에 돌석도자미술관이 있으며 관장으로 장남인 장지훈님이 선생님의 뜻을 받들고 있고 따님으로 도예작업을 계속하는 장지원님이 있다.
선생님은 여성이면서 그 당시의 여성관을 뛰어넘으려는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강한 의지를 갖게 하면서 당신 몸소 그 장벽을 넘으려 애쓰셨다. 아주 간결한 삶을 사신 분, 사는데 시끄럽지 않게, 단순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그 분이 남긴 말씀을 반추하며 선생님을 기린다.
“흙을 너무 오래 만지지 마라”
물레 성형을 할 때 오르고, 내리고, 폈다, 오므렸다, 너무 오래 만지면 흙이 갖고 있는 자연적인 흙의 성질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단 번에 만들 수 있도록 능숙해져라. 또 다른 면으로는 인위적으로 너무 머리를 써서 하다보면 조잡해지고 자연미가 결여되니 흙은 흙답게 살려야 좋은 작업이 된다.
“단국대학교를 우리 과가 안고 가자”
대학 초년학생인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도 남는 말이다. 도예 하는 우리 학과가 단국대학을 안고 가자고 하신다. 크게 되자는 말씀이다. 단국대학교의 대표학과가 되자는 말씀이다. 젊은이로서 감격이 아니 될 수 있는가?
“우리 학교는 먹고 살 수 있는 작업을 하자”
70년대 우리는 너무 배고팠다. 직업을 가져야 했다. 그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물레를 돌리고 또 돌렸다. 그 중에 물레를 마술처럼 돌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물레의 마술사가 되고픈 사람이 있다. 그래서 단국대하면 물레가 연상된다.
“남을 찾아다니지 말고 찾아오게 해라.”
찾아다닌다는 것은 숨이 차다. 내 일을 하면서 다른 이가 찾아오게 하란다. 기막힌 말씀. 그때 젊은 청춘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말씀이다. 그렇다. 실력이다. 실력이 있으면 찾아오게 마련이다.
“빈약한 선으로 손해 보지 마라.”
선생님은 빈약이라든지 희미하거나 불안정 이러한 단어를 배척하셨다. 풍부한 선과 양감, 든든히, 정확히, 넉넉히 라는 긍정이며 무게 있음에 가치를 부여 하셨다. 그러나 때때로 유연함과 감칠맛을 곁들이기도 하셨다.
“모든 것에서 유능해라.”
이 말씀으로 젊은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일을 시도해 보았다. 한 가지 만으로는 안된다. 젊음은 다 잘해보도록 노력해 보는 거야. 시도하고 실패하고 그리고 또 유능해지도록 해보는 것이다. 좌충우돌 그리고 또 일어나서 유능해지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아주 용감해진다.
“너나 잘 해”
일이 안된 것을 동급생 누구누구 때문에 그리고 누구누구 선생 때문에 라고 불평을 늘어놓으며 그들을 탓하며 위로받으려다가 “임마, 너나 잘 해” 이 한마디가 아직도 나의 마음에 남아있다.
“나를 빙자해서 돈을 걷지 마라”
정년을 하실 즈음 정년기념 전시회는 하지 않을 것이며 당연히 퇴임식도 따로 하지 않을 것이니 당신의 이름을 걸고 돈을 1원이라도 걷지 못하게 엄명을 하셨다. 평소에도 전임 교수가 강사에게 점심도 빼앗아 먹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아직도 유효하다.
“그냥 해”
책상위에서 종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하면서 작업의 형태가 바뀔 수도 있고 모양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 무조건 물레에 앉아서 해라. 하다보면 무엇이 나온다.
(김인애 동문의 회고)
“여학생들아”
너희가 도자를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다. 젊어서는 모르겠지만 돈과 시간이 많아도 활용할 줄 모르는 여성이 많다. 너희는 나이 들어도 도자기를 하면서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한영순 동문의 회고)
“먹어라”
많이 먹어라, 머슴도 많이 먹는 머슴이 일 잘한다. 선생님의 작업은 난이도가 높고 힘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무지하게(?) 시키셨다. 그리고 먹이셨다. 배가 짜구가 나도록.
(임헌자 동문의 회고)
이렇게 단국의 도예 40년 주춧돌을 세우시고 떠나신 선생님을 기리며 현재를 다지는 일을 시작한 단국대 도예는 “우리 학과가 단국대학교를 안고가자”에서 “우리 학과가 세계와 함께”라는 기치를 세운다.
거기에는 좋은 선생과 선배, 학생들이 세계로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글. 박종훈 단국대학교 교수
김석환 선생님의 작업을 본받아
선생님의 50년 작업관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것은 매우 방대한 작업이며 제자인 필자로서는 매우 조심스런 일이겠지만 영전에 글을 올린다.
선생님의 작업은 첫째 전통의 형식 속에서 바탕을 이루었으나 전통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움에 도전하셨다. 둘째 토속적이며 민속적인 테마에 관심을 두셨고, 셋째 대범한 작업 스케일과 손 맛 나는 감각적 표현을 들 수 있다.
선생님의 본성은 토속적이며 대범하셨다. 작업관은 남편이신 장덕순 교수님과의 끝없는 대화 속에서 피어났다고 생각되어진다. 선생님 부군이신 장덕순 교수님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님으로 조선시대 귀방 문화인 황진이, 어우동에 대해서 대단히 조회가 깊으신 교수님이셨다. 그의 수필집 『돌이와의 대화』편에 자세한 내용이 수록되어져있다.
김 선생님께서는 매 방학 전 작업의 테마를 정하시고 작업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을 준비하셨다. 그 중에서 기억나는 테마는 대형 토기를 통한 옹기작업, 석고 틀을 이용한 생활용기 및 벽돌작업, 기와의 조형성을 이용한 치미, 치두, 토수, 잡상, 그리고 초가집 조형 등 여러 작업이 있었는데 1.옹기대장이신 연명희(광주 산이리)대장, 2.이화여대 도예연구소 석고대장, 3.전통기와 기능보유자 등을 통해 당신의 작업에 목표를 정하고 준비하셨다. 나는 그 대장님을 돕는 조수로 다년간 도자 작업을 익혔으며 그 배움이 내것이 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셨다. 그런 작업을 통해서 기억나는 선생님과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선생님은 대형 토기 작업을 좋아하셨고 가마는 6㎥크기의 단가마형식의 장작 가마였다. 가마 안에 작품 하나 들어가도록 작업하셨는데 건조한 작품이 예상했던 만큼 줄지 않아서 가마실 문에 걸려 들어가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작업장 기둥과 가마 문을 부셔서 작품을 기여코 가마에 안착 시키시는 의지를 보이셨다. 제자인 나에게 산 경험을 만들어 주셨다. 두 번째 기억으로는 선생님 작업장에 토련기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쓰지 않고 흙을 발로 밟아서 흙을 준비시키셨다. 선생님 생각으로는 과정이 어렵게 만들어져야 소중한줄 안다는 것을 교육시키셨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세 번째 기억은 초가집의 토속적 작업으로 대형 토담과 초가집을 제작하실 때였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셨는데 “초가집이 잘 정리된 벽과 거칠게 쌓은 벽 중에서 어떤 것이 좋아 보이냐”는 질문을 던지셨다. 나는 조심스레 “정리된 토벽이 좋아 보입니다.”하고 말씀드렸더니 “정리 된 것도 좋을 수도 있지만 덜 손이 간 작품이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기억해보니 인위적이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것이 무한한 잠재성을 갖는다는 것으로 인식시켜주신 것 같다. 그리고 대형 초가집이다 보니 파손되어 나온 작품이 많았는데 그것을 잘 땜질하도록 하시면서 “도자기는 본래 깨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셔서 작업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다.
선생님은 생전 미술관을 평생 숙원으로 생각하셨고 그중에서도 옹기박물관을 만들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조자룡 미술관, 정관모 선생의 신천지미술관, 중남미 미술관, 등잔박물관등 많은 곳을 견학하시고 선생님의 미술관을 꿈꾸고 계셨다.
그 중에서 김치박물관장이 수집한 옹기를 당시 많은 금액으로 구매 하시면서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내가 잘사는 거지?”하고 물어 보셨다. 그 물음을 들은 분들 중에는 “왜 비싼 옹기를 사시냐?”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 대답은 “저런 옹기 이제는 못 만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선생님의 옹기미술관에 대한 의지를 더 확고히 하셨던 기억이 난다.
글. 조일묵 단국대학교 연구교수
흙의 능력
흙의 조형은 무한하다.
항아리에서부터 생활용기, 기와 벽돌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환경에 흙의 문화는 다양하게 펼쳐져있다.
도자기외에도 형태의 기본은 흙이 원형이다.
특히 도자기에서는 흙이 모태가 된다.
흙이 바로 형태가 되는 것이다.
흙이야 말로 온화하고 소박하다.
거짓과 허위가 범람하고 있는 세태 속에서
흙은 자연 그대로 선善하고 직直하다.
흙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그러나 고집이 있다.
한번 터지기 시작하면 끝까지 터지고 만다.
순하고 착한 대신 고집이 세다.
어루만지고 달래면 순응을 잘한다.
말없이 순종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으랴.
흙의 조형은 무한대하고 무궁무진하다.
흙의 조형을 매일하지만 형태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둥글지 않으면 모나고 일그러지거나 움푹 패인다.
한 도예가가 만드는 형태가 한 점도 같지 아니하고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그러니 모든 도예가들의 형태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흙의 조형은 그야말로 무한정한 형태의 세계다.
흙은 나의 생활을 소박하고 참된 나날로 이끌어 간다.
아무리 주무르고 두드려도 싫다않고 묵묵히 참아주는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나의 조형은 어떤 형태에서 끝이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통에 뿌리를 두고 형태를 이루어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흙과 더불어 삶을 살아왔고 마지막 한줌 흙을 자연에 보태어 주려한다.
돌석 김석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