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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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 연구원
발굴을 처음 접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하건데 발굴에 대한 첫인상은 ‘부담감’이었던 것 같다. 당시 필자의 눈에 비춰졌던 고고학자는 유구를 조사하는 비범한 추진력, 유구를 이해하는 철저한 해석력, 유구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당찬 필력과 뛰어난 언변 등의 요소들을 두루 갖춘 이들이었다. 소위 시기심과 질투심을 유발시켜 사회적으로 불협화음을 일으킬만한 대상으로 느껴질 만 했다. 그래서인지 발굴은 그저 감상에서 기인한 상징적이고 미적인 인상만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과는 상반되는 냉혹함과 차가움이 떠올려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발굴을 잘 모를 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발굴에 대한 필자의 인식이 많이 변화된 지금은 이전에 가졌던 마음과 비교해 솔직하게 고백하고자 하며, 필자가 2009년에 발굴 조사한 대구 테크노폴리스 DGIST부지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기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발굴은 쓸쓸한 전쟁의 시작
발굴 착수 첫날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문전성시를 이룬 마을주민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손에는 낫과 호미 등 연장이 하나씩 쥐어진 채, 추운 겨울 불이 지펴진 드럼통 근처를 에워싸고 있었다. 필자가 도착하자 모두들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공사 때문에 왔는교?”라고 물었다. 이들의 질문에선 긴장감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으며, “발굴조사 때문에 온 사람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들에게서 돌안 온 대답은 “공사 못하니까 나가소. 트렉터로 밀어버리기 전에!”였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주민들과 대치 아닌 대치상태로 한동안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무엇이 순박한 그들을 이렇게까지 내몰아 공사를 반대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필자의 입장이 난처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다 한 순간 묘한 감정이 일었다. 미운정이라는 것도 있는데,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져 무엇 할 것인가. 그래서 주민들을 어르고 달래듯 겨우 설득해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사실 이러한 일들은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현장에서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분명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어정쩡한 일들이라 여기지만 조사를 해야만 하는 우리들에겐 감수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전쟁과도 같은 일들이다.
발굴만의 독특한 인사법
발굴조사시 현장에서 유구의 조사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가지 부수적인 요소들로 인해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예컨대 발굴 조사로 인한 민원은 적지 않게 발생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주민들과 긴밀한 협조가 필수적이다. 현장을 담당하는 조사자들은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민원을 해결하는데, 필자는 피하든가 맞든가 둘 중 하나라 여겼다. 서로 간에 호감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불쾌하게 지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곧장 마을의 이장격이자 장로인 영감님을 찾아뵈었다. 필자는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난 뒤 돌려 말하지 않았다. 조사로 인한 불편함은 해소하겠으며, 주민들과의 적대적인 관계도 원치 않음을 전했다. 그 후 주민들은 종종 발굴에 대한 질문들로 현장을 방문하며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다가왔다. 필자는 주민들의 그런 호기심에 충분히 답하였고, 이해를 돕도록 현장을 안내하며, 설명해 주었다. 또한 조사에 필요한 인력을 농한기에 일이 없던 주민들로 적극 채용하여, 그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자 점차 주민들과 일상적인 인사와 함께 친근한 우스갯말도 나눌 정도의 관계로 발전하였다. 한 예로 조사를 진행하던 중 폭우로 인해 토사가 마을로 유입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도로가 흙으로 덮여 차량이 진입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엄청난 민원이 제기될 만한 문제로 당연히 주민들의 성토와 비난을 받을 것이라 여기며, 즉각 도로 복구에 나섰다. 하지만 필자의 짐작과는 달리 주민들은 오히려 필자를 다독거리며 함께 흙을 치워 주었다. 이는 필자를 비롯한 일행들의 적극적인 대처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노력한 유대관계의 결과물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렇듯 발굴현장의 인사법은 마치 호수에 퍼지는 잔물결과도 같이 서로에 대한 이해심으로부터 서서히 시작되며,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발굴에도 낭만은 있다.
별 탈 없이 조사가 진행되던 어느날, 마을의 경로잔치에 필자와 일행은 초대를 받았다. 주민들은 술과 음식을 내어 주시며 우리를 환대하였고, 청년회장 역시 어르신들의 일자리와 마을 발전에 도움을 주어 감사하다며 연신 칭찬해 주었다. 사실 주민들을 회유할 의도로 했던 일들은 없었다. 다만 이들과의 관계가 조심스럽고 서로간 부질없는 경계심만은 풀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뿐이었다. 이후에도 주민들은 닭을 잡아 필자와 일행에게 음식을 권하기도 하였고, 밭에서 직접 수확한 양파나 오이 등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이에 필자는 받기만 한 미안함에 값싼 돼지고기지만 서로 나눔에 의의를 두고 주민들과 함께 나눠 먹은 적도 있다.
이제와 얘기하건데 동네 어르신들이다 보니 집안일로 현장에서 작업을 하던 도중에 이탈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 필자의 입장이 난처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밭에다 물을 주러 갔다오시는가하면, 손자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밥을 차려주어야 하신다며 나갔다 오시던 아주머니, 소에게 밥줄 시간이라며 여물을 먹이고 오시던 할아버지 등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들의 거짓 없는 행동과 환한 미소 때문에 꾸짖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필자 뿐 만 아니라 그 어떤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었다면 분명히 필자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언젠가 열심히 호미질하시며 유구를 정리하시던 어르신이 덥석 필자를 불러 수줍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강선생. 여기 밥그릇 나왔다. 내 여기다 밥 담아 묵으면 맛있을라나?” 어르신이 깨어진 자기그릇에 밥을 담아 잡수신다고 가정해보자. 어르신에게는 다소 실례가 되는 일이나 이 얼마나 웃지 못 할 광경인가? 깨어진 자기그릇과 같은 듬성듬성한 치아 사이로 번지는 해맑은 웃음. 상상만 해도 어르신의 때 묻지 않은 순박함에 절로 따뜻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왔으며, 어느덧 다정한 이웃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공사 실무자들도 마을의 민원을 우리에게 직접 문의하는 경우가 생겨나면서 시행처와 원만한 관계의 형성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건데 이웃들의 정겨움이 저절로 전해져 조사에 지친 몸과 마음이 쉬어갈 수 있었던 그 순간이 다감하게 다가온다.
발굴은 숨바꼭질이다.
조사를 통해 유적의 베일을 점차 벗겨 가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이를 적절히 해결해 가는 일이 반복적인 일상이 되어버린 가운데, 유구를 발굴하는 것은 흡사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와도 같다. 그동안 확인된 석재들의 양상으로 건물지의 존재와 윤곽들을 서서히 풀어갈 때 쯤, 가장 큰 문제점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기에 증거들이 너무 미비할 뿐 아니라 건물지의 구조적인 해석에도 어려움이 많다는 점이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필자와 일행은 성격 규명의 절박함으로 나락에 빠질 것 같은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재들을 노출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와편들이 출토되었다. 기와에 글자가 시문된 명문와로 모두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번의 호흡. 한번의 붓질로 글자를 확인하던 그 순간 환희의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명문인 즉 ‘현풍玄風’, ‘풍현風縣’, ‘현객사縣客舍’ 등으로 글귀는 서로 유사하였으며, 같은 기법으로 만들어 졌고, 이들을 조합하면 ‘현풍현객사玄風縣客舍’가 된다. 이로 인하여 본 유적의 건물지는 ‘현풍현객사’라는 관청 건물의 일부임이 밝혀졌다.
이처럼 발굴조사에서 유적의 성격 규명과 정확한 시기산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역사시대 건물지 발굴에서 문헌자료는 물론이거니와 자기류 등 출토유물에 대한 편년자료의 분석이 필수적으로 뒤따르게 마련이다. 본 발굴조사 지역의 추정 객사지에서 출토된 자기류는 흑상감으로 시문된 병편이나 분청사기의 굽의 형태, 문양 등으로 보아 14세기말에서 15세기 초에 성행하던 것으로, 객사의 중심연대는 확인된 자기류의 시기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유적의 성격과 시기를 밝히게 된 기쁨과 진한 감동을 배가시켜준 것은 함께한 일행과 주민들의 영향이 크며, 모두가 얻어낸 성취감은 서로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발굴의 둥지를 엿보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본 유적의 건물지는 ‘현풍현객사’라는 관청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본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비롯한 삼국~조선초의 건물지가 조사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다량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중 비록 일부이지만 출토된 자기류를 통하여 대략적인 건물지의 축조연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본 유적조사에서 필자가 가장 의의를 두는 것은 대구 경북권 내에서 조사된 사례가 없는 고려시대 객사의 존재이다. 이는 당시 생활상의 복원과 문화양상 연구에 미비했던 자료를 제공한 초석과 같은 유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유적의 발굴조사가 끝날 무렵부터 발굴을 통한 여유와 멋을 느끼기에 너무도 힘들어 졌다. 급속한 고도성장으로 생겨난 ‘빨리빨리 문화’의 풍토에서 기인한 문제로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발굴의 낭만조차 느낄만한 여유가 없어져 버린 탓이다.
요즘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은 완전하게 폐쇄적이지도, 완전하게 개방적이지도 않다. 단순한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인식자체가 복잡하게 얽힌 탓에 갈등으로 표출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로 인해 발굴에 대한 인식은 예전에 비해 더욱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필자는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 유적에 대해 그저 왜곡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고고학자도 보통 사람들처럼 기쁨과 절망, 고통을 느끼는 심장이 뜨거운 사람이란 것을 전하고 싶다.
결국 이제와 스스로에게 고백해 본다. 그동안 눈앞에 맞 닥들인 현실을 타개하기보다 현실에 적당히 맞추려던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발굴이란 사람이 사는 참모습을 일깨워 주는 인생사의 한 부분이 아닐까? 발굴로 인한 나의 성숙됨에 감사하며, 좋은 고고학자이기 이전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한 이 유적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