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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0월호 | 뉴스단신 ]

현대미술의 7가지 키워드와 함께 떠나는 방창현의 세계도자기행(19)
  • 편집부
  • 등록 2012-01-03 11:11:30
  • 수정 2012-01-03 14: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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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덕진 가는 길(1)
  • 열아홉 번째 작가 : 리 시아오팽Li Xiaofeng, 리우 지안후Liu Jianhua

이 글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 비평의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 비전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글이 될 것이다.

 

1980년대 초기부터 시작된 중국의 현대미술은 2000년대에 들어서 장엄하고 화려했던 중국의 고대 문명처럼 만개하기 시작했다. 소위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라고 불리는 작가들 중심으로 중국의 현대미술은 세계미술시장에 급격하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중심엔 장샤오강, 루오브라더스, 쩡판즈, 위에민쥔와 같은 걸출한 아티스트들이 있었다. 한동안 중국 당국에 의해서 표현의 자유를 유린당했던 많은 예술가들은 덩 샤오핑 시대부터 시작된 개혁과 개방정책으로 맞이하게 된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부동산 시장의 활성화, 무엇보다 중국민들의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중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하게 된다. 특히 세계 각지에 흩어진 화교華僑 출신의 큐레이터와 아트 딜러들은 중국의 현대 미술을 세계 시장에 알리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서양 미술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동양적인 콘텐츠를 가지고 세계시장(베니스 비엔날레와 카셀 토큐멘타, 뉴욕의 소더비, 영국의 크리스티)을 공략한 중국의 작가들과 큐레이터들은 그 여세를 몰아 정체기에 들어간 서구 미술시장의 틈새를 교묘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경제발전이 지속될수록 서구화되어가는 중국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여전히 강압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중국의 예술가들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수성을 자극하는 작품을 통해 세계 미술 시장에서의 스테디한 입지를 계속 마련해 가고 있다.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한 중국의 예술가들이 중국의 정치적 위기감을 조성하기보다는 중국 문화에 큰 힘이 된다고 판단한 중국정부는 현대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에 더욱 관대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중국정부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좀 더 세계보편적인 예술정책을 통해서 문호를 더욱 개방하기 시작했다. 미국 뉴욕의 챌시와 같은 예술 타운을 벤치마킹benchmarking한 베이징의 따샨즈 798이나 지우창, 그리고 상하이의 모간산루莫干山路 M50와 같은 예술 타운은 중국정부의 예술세계화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타운들이다. 이곳에는 세계 유슈有數의 갤러리와 작가들이 입주해서 세계 미술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광활한 중국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중국의 예술특구特區들은 순수미술 이외에도 패션과 공예, 디자인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예술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나는 다시 길 위에 서있다. 이번 여행길은 나의 영세零細한 에고를 위로함이 아니었다. 우연히 영자신문에서 본 중국 현대미술에 관한 글은 나에게 호기심을 넘어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나의 소소한 이야기와 나의 이기심, 그리고 나의 예술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왔고, 나의 예술은 그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그리고 한국의 미술과 현대도예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 중국의 현대미술의 부흥은 나에게 ‘내가 아닌 우리’라는 거시적인 이슈에 관한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지구 동쪽의 광활한 대륙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나는 베이징에 있는 리 시아오팽Li Xiaofeng, 상하이의 리우 지안후Liu Jianhua, 유시You Si, 그리고 경덕진에 있는 루 핀창Lu Pinchang과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홍콩출신의 도예가 신영 호Sin-ying Ho와 같은 걸출한 중국의 현대 도예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과 중국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베이징 시의 지하철을 타고 서툰 한자어와 몸짓으로 중국민들과 소통하며 겨우 도착한 곳은 1991년에 만들어진 베이징의 대표적인 현대미술 갤러리인 레드 아트 갤러리Red Art Gallery였다. 이 갤러리를 설립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호주출신의 아트디렉터art director인 브라이언 웨리스Brian Wallace였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학People’s University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중앙 예술 아카데미Central Academy of Fine Arts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에 이곳에서 갤러리를 설립하게 되었다. “레드 아트 갤러리는 중국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현대성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교환 프로그램은 다른 갤러리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함이 있습니다.”라고 브라이언은 갤러리에 관해서 설명했다. 자금성에서 보았던 전통적인 건축물들을 연상시키는 레드 아트 갤러리의 외관과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 색의 기둥이 갤러리를 지탱하고 있는 내부 디자인은 중국의 전통과 현대미술을 아우를 수 있는 오묘한 조화를 자랑하고 있었다.
레드 아트 갤러리에서 만난 리 시아오팽Li Xiaofeng의 작품은 다른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에게 보이는 공통적인 주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 현대작가들에게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테마는 급변하는 세계화 시대에 소외된 지역 문화의 정체성과 그로 인한 과거에 대한 향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발전과 생산의 논리에 의해서 파괴되어지는 중국의 외적인 풍경은 고스란히 작가들에게는 내면의 상처로 침잠되어 있었다. 이 트라우마는 예술가들의 내면에 퇴적되어 자신의 작품을 형상화하는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중국의 현대미술을 이끈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마오쩌둥의 ‘문화혁명’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은 중국민들에게 물질적 풍요와 함께 정신적인 공허감과 상실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리 시아오팽Li Xiaofeng은 중앙 예술 아카데미Central Academy of Fine Arts에서 수학하기 전까지 전통적인 데생과 장인적인 수련과정을 거쳤지만, 대학원시절에는 적극적으로 동시대의 현대 미술을 탐구했다. 하지만 그는 여과 없이 받아들인 서양의 현대미술과 중국에 유행처럼 번지는 정치비판적인 이슈에 거리를 두면서 중국의 전통문화와 현대미학이 어우러질 수 있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언어에 천착했다. 수 년 동안의 절치부심切齒腐心 끝에 만들어진 리 시아오팽의 작품은 동양적인 전통적 정서와 현대의 미학을 절묘히 결합시킨 ‘후기 오리엔탈리즘Post Orientalism’이라는 평가 속에서 작가에게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후광을 안겨주었다.
리 시아오팽Li Xiaofeng의 대표작들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백자와 청자의 파편을 모아 철로 단접鍛接시킨 다양한 의상들이 대부분이다. 부서진 청자와 백자의 파편들은 작가의 잃어버린 지난 기억과 향수를 위한 상징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 도자기 파편들을 가지고 마치 수도승이 한 땀 한 땀 헝겊조각을 짜기워 나가듯 의상을 직조해 나간다. 자기 파편이 한 벌의 의상이 되어가는 과정은 찬란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이 아름다움의 정체는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리 시아오팽의 작품이 디지털화 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따뜻한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라져버린 고향의 풍경에 대한 애틋한 향수, 그 동양적인 내면의 정서를 한 예술가의 개인적 차원이 아닌 이렇듯 이방인에도 오롯이 전달될 수 있는 보편적인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작가의 역량은 국경을 넘어서 나를 이곳으로 오게 만든 동인動因이었다.

고풍적이고 정치색이 짙은 베이징을 뒤로하고 나는 상하이로 간다. 한 세기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곳이라 갤러리를 둘러보기 전에 꼭 방문하고 싶은 곳이었다. 상하이에 기차가 닿자마자 망국지한亡國之恨의 슬픔을 뒤로 하고 타국에서 임시정부를 설립한 애국지사들의 서슬 퍼런 영혼들이 가여워 나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서러운 마음, 고마운 마음이 뒤엉켜 나는 여행의 목적마저 희미해져 버린 걸 알았다. 그리고 나는 김구 선생님이 백범일지에서 말씀하신 ‘문화 강국론’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는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에 쓰신 김구 선생님의 글은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길을 묻고 있었다. 올해는 선생님이 타계하신지 62주년이 되는 해였다. 선생님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다시 보신다면 얼마나 뿌듯하실까 생각해본다. 2011년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세계 11위의 대국이 되었고, 문화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의 문화의 지배에서 벗어나 ‘한류’라는 전대미문의 문화적 사건이 우리들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고 있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K-POP은 동양을 넘어서 이제 미국과 유럽의 시장까지 그 기세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현대미술과 현대도예는 한국의 경제력과 다른 문화에 비해 그 위용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음이 못내 아쉬웠다. 도예가로서 나의 절박한 소원은 한국의 현대도예가 새 천년엔 찬란했던 옛 영화를 되찾아 한국에서 도예가로 산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10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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