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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8월호 | 뉴스단신 ]

현대미술의 7가지 키워드와 함께 떠나는 방창현의 세계도자기행(5)
  • 편집부
  • 등록 2010-10-11 13:24:01
  • 수정 2010-10-11 13: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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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 위의 언어
  • 다섯 번째 작가 : 제레미 부룩스Jeremy Brooks

본 연재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에 관한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의 비젼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언어 위의 언어
다섯 번째 작가 : 제레미 부룩스Jeremy Brooks

 

아나키즘의 고전적 명제를 빌릴 필요도 없이 권력이 있는 곳에 자유는 없다.   자유란 권력의 포충망 밖으로의 필사적 탈출이며, 모든 제도와 성문법 존재 이전 상태로의 회귀 욕망을 내포하고 있다.
(남진우, 신성한 숲)

그런 순간이 있었다.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려 했던, 하지만 내 말은 혀끝에서 맴돌고, 언어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나의 고백은 허공에 산산이 흩어졌다. 소주를 마시며 아쉬움을 달래려 해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 앞에 나의 언어는 언제나 제 옷을 입지 못하고 실패의 잔해로 남아있었다. 미완이라서 더욱 설레고 아쉬웠던 내 젊은 날의 초상. 하지만, 이젠 어떤 대상을 보아도 내 언어가 혀끝에 머무는 일은 없어졌다. 세월이 지날수록 나의 언어는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고, 단조로운 논리와 이성으로 대상을 무디게 표현할 뿐이다. 모든 대상은 내 눈 앞의 그저 놓여있는 ‘사물’이 되었고, 그 어떤 기의signified의 생산도 중단한 채 사물은 깊은 무無의 공간으로 침잠할 뿐이다.
나의 언어가 생명력을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내 언어가 단순한 선형線形, linear적인 지난 청춘의 시간을 회복하지 못해서 만은 아니었다. 더 심각한 것은 비평가 남진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세월이 갈수록 나의 언어는 정주민들이 만든 제도권의 권력의 폭압 속에서 무기력하게 길들여져만 간다는 것이었다. 미래의 안온한 삶에 대한 대가로 아니, 그 유혹으로 나의 언어는 시원始原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정주민들의 비위를 맞춰온 것이 사실이었다. 잃어버린 시원始原의 언어와 유목적 사유를 되찾기 위해 시작된 나의 도정道程에서 제레미 부룩스Jeremy Brooks를 만난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나의 닫힌 머리와 무딘 심성을 일깨워 준 것은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The Clay Studio’에서 열린 제레미 부룩스Jeremy Brooks의 개인전에서였다. 제레미 부룩스Jeremy Brooks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greener greens’였다. 그 작품을 처음 보자마자 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고민하고 연구했던 모든 과정이 한순간에 허망하게 무너져 내림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깊은 실의와 고민에 빠졌다. 이 작가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은 누구일까? 작가는 어떤 인문학적인 상상력과 감각을 지녔을까? 예술은 학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타고나는 것일까? 나의 질문들은 한동안 꼬리를 물었다.   
제레미 부룩스Jeremy Brooks의 작품은 혀끝에 머무는 언어의 숙명적 시간과 공간을 감각적인sensuous 시각언어로 포착하고, 우리가 어떤 대상 앞에 너무나 가슴 설레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벅찬 감정을 환기시킨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세월의 더께에 감춰졌던 그 감정들, 나는 미소년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갤러리를 두리번거린다. 20cm도 되지 않은 작은 스케일, 그 속에는 토끼나, 새, 비둘기들이 등장한다. 그 어느 곳에도 인간을 위압하는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갤러리를 들어오는 모든 관객들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와 애잔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혹은 설레던 기억을 떠올리며 갤러리를 떠날 줄 모른다.     

제레미 부룩스Jeremy Brooks의 데생력은 치밀한 묘사를 통한 사물의 미시적微視的 접근에 있지 않고 오로지 이미지의 감각에 중점을 둔다. 우리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 처음 살아 있던 토끼를 보던 신비함, 새의 움직임과 속도, 아빠 엄마 이외의 생명체를 처음 보는 경외감, 그리고 이런 동물들에 관련된 한도 끝도 없던 호기심과 질문들. 어른들의 일상에서 잊혀진 이런 감정들을 작가는 단번에 하나의 작품으로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처음 그림노트에 색칠 공부를 하는 파스텔 톤의 색상과 아직 색상의 개념이 완전히 인지되기 이전의 서로 다른 두 색의 상이한 느낌을 가진 칼라를 이용해 시간 속에 깊숙이 잠들어 있던 유년시절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권력구조 안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확립하고 대상을 인식하는 어른들과는 달리 우주의 리듬과 기운으로 모든 사물과 생명을 종과 횡으로 가로지르는 아이들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순진무구, 망각, 새로시작, 유희, 스스로 도는 바퀴, 최초의 움직임, 성스러운 긍정’1)이란 말로 표현한 적 있다. 아이들의 영성의 세계는 문명세계에 길들여진 어른들의 눈으로는 보기가 힘들지만, 제레미 부룩스는 그 소박하고 꾸밈없는 아이들의 정서를 구상과 추상의 중간 지점에 있는 대상의 진여공간眞如空間 속에서 발견한다.

제레미 부룩스Jeremy Brooks는 어린 시절 집안의 장식장에 놓여진 작은 도자기 인형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제레미 부룩스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다른 작가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발상법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가까이 했던 도자기 인형에서 유난히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속이 텅 빈 인형의 내부였다. 인형의 내부의 형태는 외부의 그것을 암시한다는 착상에 그는 도자기 인형을 모델model이자 형틀mold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속이 빈 도자기 인형에 석고를 부은 뒤에 석고를 단단히 말리고 나서 외부의 도자기를 깨는 작업을 시도했다. 석고로 캐스팅 된 도자기의 내부의 추상화 된 형태들은 도자기 인형의 외부만큼 정밀하지는 않지만, 형태들을 다시 다듬고 정제하는 과정에서 구상과 추상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그가 도달하고자하는 대상의 진여공간을 발견한다.
대상의 진여공간眞如空間으로 가기위해 조탁된 작가의 농밀濃密한 시각언어들은  세계의 얄궂은 위선과 부조리를 몰아내고, 관객들이 작품을 접하는 순간만큼은 순수와 순백을 지향하는 작가의 언어의 밀도密度와 조우하게 만든다. 갤러리를 들어오는 순간 순백의 밀도로 키워낸 작가의 언어들은 내가 건너온 저 먼 세월의 강을 감지하게 만든다. 소싯적 내가 키우던 일곱 마리의 닭과 한 그루의 석류나무, 몇 년 동안 한 마디도 말을 건넬 수 없었던 옆집에 살던 소녀.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읽던 낡은 시집. 그리고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내 유년시절의 어머니. 그들은 이제 강 너머 저편에 있는데, 나는 이곳에서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 모든 소중한 것들과 결별하고, 맘 속 깊은 곳에 저마다 그리움의 강을 하나씩 지니는 일이다.
제레미 부룩스Jeremy Brooks는 예술가로서 궁극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가 지성과 욕망의 수목적 한계를 뛰어넘어 무한한 우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영성의 힘을 빌려 저 깊은 시간의 강을 가로질러 식물들의 노랫소리와 바람과 돌의 속삭임을 듣는 일임을 깨닫게 해준다. 후기 산업사회의 물신을 위해 진상되는 수사학적rhetoric 언어들의 홍수 속에서 제레미 부룩스는 언어를 구속하는 모든 권력의 구조물과의 관계를 끊고, 사물과 주체가 경계를 짓지 않는 존재의 시원의 언어를 향해 나아간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0.08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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