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한국에서 전업도예가로 살아남기
전업도예가로 살아남는 일?
| 김대웅 도예가
지난해 덴마크의 레지던시 프로그램ICRC에 초대돼 갔을 때의 일이다. 어딜 가나 작가들의 관심사는 비슷하기 마련인지 유럽의 도예가들과 나눈 대화의 많은 부분이 대체로 작업여건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래 이런저런 고충을 나누면서 전업작가로 살아가는 일이 유럽이라고 더 편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었다. 어쩌면 작가의 길을 선택한 순간부터 예술가들은 지역에 관계없이 생계유지와 예술적 열정이 끊임없이 모순적으로 충돌하는 딜레마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는 마치 어떤 배가 이상을 위해 기꺼이 어려운 길을 선택했으나, 그 풍랑이 너무 거세 목적은 상실된 채 오로지 살아남는 일에 급급하여 남은 연료를 다 소진할 수밖에 없는 것과 동일한 비극적인 상황을 쉽게 몰고 온다.
장르에 관계없이 대다수의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아마도 성공적인 전업작가로 자리매김하는 일이리라.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이런 소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더욱이 성공적인 작가는 그 중에서도 소수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성공적인 전업작가란 자신의 작업세계를 이룩하고, 이로써 일가를 이룬 이를 일컫는다.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고, 무반성적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수준을 넘어 고유의 예술적 성취를 이뤘을 때라야 비로소 성공적인 전업작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길을 선택했기에 감당해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견디는 일만으로도 그 존재 가치를 어느 정도 증명할 수는 있다. 다만 그 자체만으로 존경과 경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예술가가 한 사회 혹은 시대를 대변하는 지성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거나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는 단지 현실의 어려움을 견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현실에 굴하지 않고 깨어 있기를 고집하며, 이로써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해가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글에서 다룰 ‘전업도예가로 살아남기’는 우선 그와 같은 성공적인 전업작가를 꿈꾸는 나와 우리의 현재를 냉정히 돌아보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연유에라야 각자가 가야할 방향과 목적을 그나마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존의 방식
어떤 전업도예가가 될 것인가? 이 질문은 성공적인 전업작가를 위한 출발점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 도예가로서 추구해나갈 목표에 대해 명확한 신념을 갖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또한 다른 이들은 흔히 밥벌이에 완전히 매몰되어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못하지만, 예술가는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신념이라는 것이 반드시 특정의 높은 가치를 반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주 낮고 사소한 신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작가적 삶의 철학을 실천하는 일이라면 충분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얘기를 하자면, 옛 도공들의 작업과 삶의 방식에 대한 동경은 필자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역사 속에 잠자고 있는 그 흔적내지 장인적 숨결을 스스로의 삶과 작품 안에서 되살리고자 하는 꿈을 품고 있다. 그러기 위해 가능하면 동시대에 일상화되어 있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생활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함으로써 그네들이 견지했던 자연과 삶에 대한 자세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작업에서도 목 물레를 쓰고, 장시간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장작번조를 고수하는 것 역시 동일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불편한 삶의 방식과 작업에서의 고된 노동은 몸과 정신, 작업과 삶을 일치시키는 과정이며, 자연의 일부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본인의 이런 시도들이 과연 성공적인가의 여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아마도 그 성공여부는 생의 여정을 마치는 미래의 어느 순간 본인의 지나온 삶 전체로서 비로소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10년 3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