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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월호 | 특집 ]

국내 지역별 도예계의 현재 Ⅱ - 새 시대의 전통과 전승, 수도권(2)
  • 편집부
  • 등록 2009-07-14 16: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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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조상의 전통을 이어받아 훌륭한 문화유산을 각각의 분야에서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것만큼 우리의 정체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수많은 전란과 수난의 연속으로 우리는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등 어느 하나 입지 않은 상처 없어, 최근 반세기 이상을 열심히 치유하여 기적을 이루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두렵기만 하다. 그 많은 것 중에서 도자기 문화의 전승쪽을 돌아본다면 36년간 일본의 지배는 전통의 맥을 완전히 끊고 전승의 뿌리마저 단절시키기에 이르렀지만 1950년대 중반 몇몇 지인들이 서울 대방동에 한국미술품 연구소를 세우고 전통가마를 지었다.끊어지고 단절된 전통의 맥을 한올 한올 꿰어 비색의 청자유약을 찾아내고, 힘겹게 고려중흥기의 상감기법을 완성해 내며 조선백자의 질박한 맛과 선홍의 진사색을 비롯해 시골토담 같은 분청사기의 시골인심 맛도 모두 찾아내는 개가를 이루게 된다.
불과 반세기만에 신라의 토기제작부터 고려, 조선을 대표하는 청자, 백자, 분청사기까지 당대의 가치를 뛰어넘는 기술력과 재현력을 갖게 되고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는 기능성을 향상시킨 디자인 부분까지 현격한 발전을 이룬 것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전체 도예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로 실로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이쯤에서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비교적 전통을 존중하고 전승도자문화의 계승에 몸담고 있는 도예인은 얼마나 될까?
2001년쯤 전국의 도예인을 1개 요장에 한명씩으로 본다면 전국에 약 1100여개소의 요장에 약 1100여명의 작가가 있고 이천 350개소, 여주 450개소, 광주 50개소, 기타 50개소로 3개군에 분포한 요장수 곧 도예인의 수가 전국의 약 82%가(참고문헌: 『세계도자기 EXPO 2001 경기도백서』참고) 된다.
7년이 지난 지금의 3개군을 조사해 보니 이천 약 380개소, 여주 약 600개소, 광주 약 80개소, 기타 약 60개소로 전국에 약 2000개소로 잡아본다면 약 56%정도가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중, 전통에 기초를 두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청자, 백자, 분청사기 등 전통도자기를 하고 있는 작가수는 3개군만을 살펴보면 대략 이천 70개소, 여주 50개소, 광주 30개소 등으로 3개군 도예인 중 불과 14% 미만만이 30년 이전의 운영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작업장 중 3개군 도예가가 함께 참여하여 구성된 사단법인 한국전통가마보존협회 회원은 여주 3명, 광주 6명, 이천 26명으로 전체 35명이고, 사단법인 한국전승도예협회 회원은 광주 7명, 이천 29명 등 총36명이며, 양쪽회에 중복가입된 10여명을 제외하면, 총 전통자기를 생산하는 요장은 71개소(6.3%) 정도이다. 1980년 초반 이천지역에서만 37개소 였던 것을 비교해보면, 당시의 요장수에서 크게 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경제사정이 IMF당시나 그 이하라 해도 한동안 호황을 누리고 웬만한 형태와 색상만 가지고도 불티나게 팔리던 1988년 이전은 아니라도 90년대 이후 IMF이전만큼은 경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도예인들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간 전통자기의 수요나 도자기의 효용성, 필요성도 꾸준히 증가했고, 작품들의 수준 또한 30년 이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값은 오히려 저렴해지고 다양해졌다. 또한 그만큼 아름다워졌고 놓여야 할 자리가 많아졌다.
반대로 전통자기를 전승해 오는 작가군群은 80년도 중반의 숫자에 비해 별로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작업장 가동률을 보더라도 3개군에서 경기도 광주지역은 좀 더 높게(약 50%이상) 조사되었지만, 전통도자요장 수가 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천, 여주는 한결같이 30%미만으로 집계된 것만 보아도 생산량 또한 이전의 숫자에 못 미칠 것이 자명하다.
각 작업장의 작업인원을 보아도 전통도자기를 하는 곳은 거의 가족위주의 두세명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작업현장을 살펴보면 심각할 정도로 운영상태가 비관적이고 미래를 보장할 어떤 비젼도 보이지 않고 있다. 위의 상황만 보아서는 도자기 생산량이 상당히 모자라야만 되는데 실제로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속되고 있다. 도자기 판매가 거의 전혀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도자기의 앞날은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 시점에서 우리자기가 갖는 세계성과 창의성을 명확하게 연구하고 깨닫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15세기 분원에서 제작된 청화백자보상당초문 접시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1994년 308만불에, 1996년에는 17세기 백자철화용문호가 842만불에 경락된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1959년 작고한 기타오지 노산진北大路魯山人 이란 일본도예가의 작품은 생전에 다작을 하고 수많은 작품이 아직 남아 있는 데도 손안에 들어갈 만한 찻잔하나가 수억 원을 호가하고 현대적인 작가들과 경쟁해도 인기가 현재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참고문헌, 신한균 저 『우리사발이야기』)
한때 노산진의 가마에서 공부하고 번조해낸 피카소의 작품 또한 그 천재적인 창작세계에 엄청난 지불을 해야만 조그만 작품을 하나 겨우 소장할 수 있다. 노산진 작가는 단순한 용기 하나도 모두 예술품으로 승화시키려 온몸을 평생 바쳤던 창작의 대작가이다. 전기한 조선시대 작품은 또 다른 희귀성과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해서 높은 가격이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뒤에 두 작가는 이미 생전에도 그런 가치를 인정받았고 특히 세계적인 미술가였던 피카소를 제외하고 노산진 작가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 전통도자기의 앞날에 큰 줄기의 희망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의 엇비슷한 유물을 많이 남겨놓고 있는, 중국의 도자유물은 그 희귀성과 창작성에서 고려, 조선의 것을 따라 갈 수 없다. 일찍이 중국의 도자기술을 습득한 우리의 조상들은 어떠했는가?
형태부터 유약까지는 물론, 문양까지 독특하다 못해 아집스럽고 고십스럽게 유약 밑에 그림을 그려 넣거나下繪, 상감하는 최고의 어려운 생산방법에만 몰두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좀더 안정되고 생산성 높은 상회上繪방법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다. 새롭고 힘든 창의력으로 독창적인 세계를 찾아 고생스러운 작품세계를 구상하고 있다.
올 연초 1월 방영된 도자관련 방송에서 필자가 주장한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산삼같이 귀한 수많은 도토陶土가 있다. 그렇지만 그 양은 채산성을 따지기도 힘들만큼 조금조금 매장되어 있다. 또한, 그 물성物性도 가지가지이고 색상 또한 다양하다. 이런 적고 다양한 도토陶土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부가가치가 높은 가장 한국적인, 그래서 세계적일 수밖에 없는 고려, 조선적인 창작품을 연구하는데 진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값비싸게 팔수 있는 작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 기술한데로 창작성, 희귀성, 기능성, 문양의 다양화만으로 희망적인 상황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이제는 나라밖의 세상으로 작품을 이동시켜 넓은 시장을 만들거나 만나지 않는다면 시간이 갈수록 퇴락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도자작품을 세계화하고, 세계 속의 넓은 시장으로 옮겨 가는 작업을 하자는 것이다. 20여 년 전 도자문화에 큰 뜻을 둔 한 이천 젊은이가 한 지역의 여러 호텔을 공략하기 위해 대단히 큰돈을 투자한 일이 있다. 당시 서양식당 용기를 생산해서 그 지역 여러 호텔 등에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미처 개발이 뒤진 서양식용기를 일부만 몇몇 호텔에서 취급만 해 주어도 운영이 충분할 일이었기에, 기꺼이 거금을 투자했다가 실패한 일이 있다.
예로 접시위에 스테이크를 자를 때 칼자국이 안나는 경질유약을 개발하고 우리전통 문양을 디자인해 아름답고 실용적인 용기를 공급할 수만 있었다면 그 결과는 실패가 아니었을 수 있었던 일이다. 이제 내가 만든 내 창작품은 세계인들의 감성으로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는 세계적이고 좀 더 객관적인 가치를 함유한 품격 높은 작품으로 개성있게 다시 탄생하지 않으면 앞날이 없다는 것이다. 30년 전 필자가 교류하던 내외국의 당시 40, 50여세의 수요자는 지금 70세 이상 80세를 넘어 섰으며, 현대작품을 수집하고 사용하고 감상하고 좋아하는 수집자는 적어도 당시보다 반세기 젊어졌고, 세상의 예술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방법 또한 젊어졌고 변했으며 디자인 또한 바뀌어 왔다. 좀 더 선택하는 방법이나, 취향이 세계적인 안목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16세기 이후 일본에서 활약한 우리 도공들의 작품을, 철저하게 일본식으로 새롭게 디자인하고 세계화하여 화란(네덜란드)과 어마어마하게 교역한 부富를 자본으로 19세기 막부를 무너트리고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의 빠른 근대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때에도 화란(네덜란드)인의 눈을 황홀하게 한 일본인의 세계적인 작가의식과 안목을 우리는 늦었지만, 연구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조건을 갖추어 나가는 길은 무엇인가 고심해 보기로 하자.
첫째, 국내에서 수요로 하는 작품 세계와 해외로 진출할 작품의 세계를 구별해야 한다. 새로운 국내 수요층의 눈높이와 취향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양을 결정하고 좀 더 다양한 외국인의 수요를 위해 새로운 디자인과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창작부문이다. 내 작업장, 내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연상시킬 수 있는 독특한 나만의 형태와 색깔과 냄새가 있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의 백자도, 노산진의 작품도 현재 세상을 앞서가는 세계적인 작가도 피나는 노력 끝에 독특하고 찬란한 당신만의 세계를 구축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이제 도제식교육이나 다작으로 또는 숙련된 기술만으로는 경쟁이 되지 않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창작과 독특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인 바탕이 부족해서는 힘들 수 밖에 없다. 시간을 어렵게 내서라도 밑거름이 되는 도자예술 이론 공부에 전념해야만 승산이 있다. 어려운 일이지만, 나의 작품세계를 여과없이 지적하고 건강하게 비판할 수 있는 주변에 지인이나 단체가 있다면 매우 좋은 일이다. 몇 점의 작품이라도 공동으로 토론해 보는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져보는 방법도 있겠고, 개인전이나 그룹전을 갖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해서 창작의 밑거름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다.
넷째, 지속적인 작품에 대한 관리가 중요하다. 내 작품을 소장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자세계의 지식과 새로운 행사를 만들고 소개하며, 의견을 나누는 폭넓은 대화의 장을 지속해서 가져야한다. 새롭게 연구하거나 이루어낸 부분을 설명하고 함께 연구와 디자인에 참여해 주도록, 끊임없는 관심을 잃지 않도록 해 나가야 한다. 여러해 전에 구입한 작품을 새로운 작품과 항상 교환할 수 있도록 작업장 문을 개방하고 배려하는 방법도 연구해 볼 대목이다.
자신의 작품을 소장하고 사용하는 내 마니아들을 적어도 나만큼 도자기에 대한 이론과 실력을 갖추게 하겠다는 의욕으로 이해시키고 교육하고 참여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건강하고 밝은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로 열심히 작업에 열중한다는 것은 곧, 나의 주변을 건강한 사람들로 가득 채우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08.9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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