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d and Architecture : Spirits Forgotten
| 정기용 건축가 / 성균관대학교 석좌교수
오래된 가치
필자가 흙과 건축을 결합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비교적 오래전부터이다. 그것은 단순히 흙이라고 하는 물성에 대한 특별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래된 기술의 현재화’라는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필자가 프랑스에서 건축수업을 받던 때 모든 학생들이 마치 성서같이 읽던 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집트의 건축가 하싼 화티가 오래된 흙 건축의 기술로 재현한 『구르나 마을 이야기Gourna : A Tale of Two Villages』(1969)를 읽고 나서 필자는 전통과 현대, 기술과 건축, 삶과 건축, 건축과 사회, 건축가와 윤리 등의 문제를 접하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특히 당시 제 3세계로 분류되던 나라들에서 부족한 것들이라고 인식하였다.
필자는 프랑스에서 모더니즘의 건축을 배웠지만, 세계 여러 나라, 소위 개발도상국들에서 진행되던 모더니즘의 양상이 어색할 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적절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각 지역마다 오랜 역사 동안 일구어낸 그들의 삶과 건축을 변화하는 시대에 맞도록 재구성할 기회를 만들 겨를도 없이 모더니즘이라는 급물살에 내던져졌기 때문이었다. 모더니즘의 강요된 수용은 비단 건축만의 일이 아니라 역사, 정치, 경제 그리고 일상적인 삶 속에까지 침투하는 세계사적 물결이었다.
그러한 물결 가운데 필자가 목격한 큰 충격은 ‘새마을 운동’을 통해 이루어졌던 소위 농촌주택환경개량사업이었다. 60년대 초가집은 가난의 상징이었고, 전근대의 표상이었다. 농촌의 근대화 작업은 전통문화의 청소 작업이었고, 농민들 스스로를 근대화의 지진아로 만들어 의식을 개조하는 사업이었다. 그런 격동기에 지구상 유래가 없던 농촌주거의 개조사업은 나에게 농촌지역의 옛 살림집들을 돌아보게 하였다. 당시만 해도 고건축연구의 대상 속에는 소위 토속 건축이라 할 농가건축은 누락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간혹 있어도 평면에 대한 분류 정도만 있었지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한 자료는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는 하싼 화티와 같은 건축가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몇 가닥의 목재를 제외하면 온통 흙으로 만들어진 토담집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수백 년 동안 이 땅에 세워졌다 사라졌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이 흙 속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바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흙집에 대한 추적은 필자를 안동 하회마을 이규성씨 댁으로 인도하였고, 거기에서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잊혀진 정신과 만나게 되었다. 연기로 그을린 두툼한 토벽, 뒤뜰로 난 조그만 창, 방에서 느끼는 안온한 체취, 부엌 문틀 사이에 누워있는 흙들, 벽체마다 남겨진 북촌댁 쪽담틀 자국. 어느 하나 상식적으로 알던 농촌의 살림집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집에 살던 할머니의 거침없는 말씀은 심벽집에서 기거하며 느꼈던 기억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집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엔 정말 따뜻하지”라고 말이다. 다소 과장되었다 할지라도,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적인 집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필자는 여러 지역에서 담집들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정읍 근처에서, 그리고 예산 구억말에서. 흙을 담틀에 넣고 다져서 만들어낸 벽체가 드러날 때마다 필자는 큰 감동에 사로잡혔다. 땅에 누워있던 흙을 길어 신체에서 나온 힘으로 다지고 땅 위에 수직으로 세운다는 것, 그렇게 해서 공간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은 위대한 일처럼 보였다. 지구의 살과 피부로 사람의 집을 짓는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은 없는 듯 보였다. 특히 지금 이 시대와 같이 환경과 생태의 문제가 심각할 뿐만 아니라, 소위 지역주의 건축이 여러각도에서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전통을 현재화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일이다. 흙의 본래적인 속성들을 이 시대의 삶 속에 투영하는 일, 지속 가능한 ‘오래된 가치’를 지금 여기 이 땅에 복원하는 일, 그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흙으로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가 아니라, 왜 건축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들에 대한 비유적인 답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우리들이 공유해야 할 가치들의 복원이기도 하다. 이것은 비단 건축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다시 한 번 가늠해보아야 할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상식의 명령
흙과 건축은 이 시대를 바라보려는 또 다른 태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21세기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예측하는가 하는 데 있다기보다 지금 경과 중인 우리들의 일상 속에 미래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견고히 해야 할 방향들을 짚어보는 것이다.
정보화시대가 왔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정보화인가? 정보화기술이 진정한 의미의 이성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지 않고 인간을 지구상에서 축출하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신자유주의와 무한경쟁시대란 협박 앞에 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세계를 염원할 수 있는가? 고삐 풀린 말처럼 질주하는 세계경제 체제를 제어할 또 다른 대안은 없단 말인가. 고뇌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녹색평론』(2000년 4월호)에 실린 빌 조이Bill Joy의 글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컴퓨터 과학기술자로서 미국의 대표적 컴퓨터 기업의 하나인 ‘선 마이크로시스템’사의 대표 과학자이자 공동 창립자이기도 하다. 빌 조이는 ‘미래에 왜 우리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라는 글에서 그가 그토록 신봉하던 현대기술에 대해서 큰 회의를 던지고 있다. 빌 조이는 “21세기의 테크놀로지유전공학, 나노테크놀로지, 로봇공학는 너무도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사고와 오용을 낳을 수 있다”며 경고하고 있다. 즉 20세기의 대량 파괴 무기로 사용된 NBC핵 Nuclear, 생물 Biological, 화학 Chemical 기술들은 대부분 정부기관의 실험실에서 개발된 군사용으로 비교적 통제 가능하였으나 21세기의 GNR유전자기술 Genetic engineering, 극소기술 Nano technology, 로봇기술 Robot engineering 기술들은 명백히 상업적인 용도를 갖고 거의 예외없이 기업들에 의해 개발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상업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이 시대에 테크놀로지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돈벌이가 되는 거의 마술적인 발명품들을 거의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속에 빠져들고 거의 아무런 도전을 받지않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속의 다양한 경제적 인센티브와 경쟁압력 내에서 이들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이 제시하는 약속들을 공격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급기야 만일 급진적인 기술이 기계들의 자기복제시대를 앞당겨 인간이 기계에 복종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껴지는 시기에 인간은 더 이상 지구상에서 필요 없는 존재일 것이라는 경고다. 중단할 수 없는, 브레이크 없는 기술의 시대에 우리는 그들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여야 한다.
조이도 결국은 아탈리Jacques Attali의 『합리적인 미치광이 :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형제애 유토피아 제안Fraternites:une nouvelle utopie』(1999)이라는 책과 달라이 라마Dalai Lama의 ‘새 천 년을 위한 윤리 Ethics for the New Millenium’라는 강연에서 앞으로 갈 길을 제안한다. “시장사회의 진화를 보면서 일부 인간의 자유는 다른 인간의 소외를 초래한다는 것을 이해하였고, 그들은 평등을 추구하였다”라는 말에서 인간들이란 바로 형제애를 존중하는 인간이며, 형제애만이 개인의 행복과 타인들의 행복을 조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이야기하는 타자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을 형제애와 공명하는 것으로 보고, 그는 우리 사회가 보편적인 책임과 우리 존재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보다 강력한 개념을 발전시켜 개인과 사회를 위한 적극적인 윤리적 행동의 표준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타주의란 타인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이利가 되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 말은 상식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함을 담은 말이다. 그것은 바로 서구문명의 실증주의에 기초한 인식론을 극복한다는 뜻을 갖는다. 서구의 합리주의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이분법과 삼단논법을 허물면서 비선형적, 비대칭적 시간관에 기초한 인간의 또 다른 가능성들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21세기는 바로 뒤랑Gilbert Durand이 말하듯 “다양한 인류학적 가치들이 회복되는 시기가 될 것이다. 하나의 문화의 이름으로 짓누르던 시대가, 20세기에 인류가 행하고 겪었던 범죄 및 실패와 함께 영원히 종말”을 고하고 각기 다른 문화를 새로운 반열 위에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은 거창한 이념에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일상 가까이에서, 개인의 참된 가치를 상품 속에서가 아니라 그 외의 여러 관계 속에서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는 “나를 한 영토에, 한 도시에, 그리고 내가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자연환경에 연결시켜주는 모든 것들이다. 바로 이것이 하루하루의 자그마한 역사들인 것이다. 공간 속에 결정되는 시간, 이렇게 하여 한 장소의 역사가 개인적인 역사로 되는 것이다.” 일상 속의 아주 사소한 형상들, 하찮은 것들, 덧없는 것들, 현재의 정복자, 시사적인 것들에 주목하는 ‘사회학적 미학’의 창시자인 마페졸리M. Maffesoli가 한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먼 데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우리들의 땅과 역사와 그 속의 일상적 호흡 속에 우리들이 의연하게 지속시켜야 할 우리들의 건축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로 저 흙 속에서도 길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잊어버린 우리들의 신화를 되찾아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상식의 명령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 시대의 의미 있는 물줄기를 형성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들의 옛집을 되돌아 필요가 있다.
오래된 미래 한국의 옛 집(자연 속의 집-집 속의 자연) :
지속 가능하였던 삶과 건축
어느 나라나 전통사회의 주거건축이 필연적으로 생태적일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산업사회로 이전하기 전, 기후와 풍토가 다른 지구 곳곳에는 각기 집단이 처한 환경 조건 속에서 환경을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거주공간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형식이 되어 그 근본을 다시 묻지 않은 채 오랜 동안 지속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각 지역마다 지표면 위에 세워진 전통주거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충분히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즉, 삶의 형식과 주거의 형식이 분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삶을 가능케 하는 자연과 삶 사이에 공정하고 균형 잡힌 법칙을 마련하였다. 예컨대 자연과 인간은 서로가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는 정의로운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막과 같은 뜨거운 태양빛 아래 마을들이 그러하였고, 북유럽의 목조건축, 남미의 수많은 종류의 흙집들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민가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러한 사실을 쉽사리 알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나라들의 전통적 형식의 민가들은 산업사회가 몰고 온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지속되어 옛사람들의 지혜를 지금도 증표로 남겨주고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 한국 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민속자료나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만 유지할 날이 머지 않았으나 한국 땅에 살던 옛 사람들이 한반도의 기후와 풍토 속에서 고안해 낸 한옥의 전형은 그 깊은 의미들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건축가가 없는 건축, 소위 토속건축으로 분류되는 농경사회의 살림집들을 되돌아보면 그것은 한마디로 윤리적인 건축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최소한의 것으로 최상의 거주환경을 만들면서도 집들이 놓여진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낸 지혜를 지식과 기술과 정보로 넘쳐나는 산업사회는 아직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그 많은 기술과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불행하게도 아직 그들의 시대에 걸맞는 지속가능한 주거의 형식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건축을 함에 있어서 그 출발점을 그들이 속해 있는 ‘자연’에 위치시키지 않고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형식’ 속에서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건축은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동일한 풍토 속에서 지속되던 지혜의 반복에서 비롯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혀 낯선 곳에서 그 해답을 찾고있는 것이 아닌가! 현대인들은 취향과 유행은 만들 줄 알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질을 보장해 줄 집 하나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생태계를 떠나서도 살 수 있으리라는 욕망과 환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며, 또는 생태계의 문제는 과학기술로 극복시킬 수 있다는 과욕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경과 생태계의 문제에 대한 해법 없이는 더 이상 삶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옛 사람들의 지혜를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집의 원형과 공동성
집의 원형은 건축의 양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성 속에 있다. 집 밖으로 흘러나오는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기침소리, 그리고 희미한 불빛, 우리들이 눈을 감고도 떠올리는 한 순간의 정경들, 마당 한 가운데 서서 쳐다보던 별빛, 최초의 창을 통해 바라본 세계의 경이로움, 문지방을 통과하며 온몸으로 느끼던 나의 신체 속에 공동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보편적으로 균질하게 배분된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경험 속에서 체득된 시간이며 역사인 것이다.
자연 속의 집, 집 속의 자연
한반도에 지속되었던 살림집들도 또한 그 자체가 가장 이상적인 생태적 건축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건축이 생태적이라 함은 일차적으로 건축을 구성하는 원리가 자연생태계의 현상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건축을 가능케 하는 물성들이 자연의 순환원리를 거역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삶과 건축과의 관계가 바로 생태계의 체계에서와 같이 유기적인 연대를 맺어주는 데 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은 그가 거주하는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감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삶과 정신적 삶의 분리가 아니라 그것을 통합하고 조절해 주는 것을 가능케 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들 조상이 주거하던 집이다. 그 집은 자연소재로 이루어진 형상이 아니라 그 속에 살던 사람들과 함께 숨 쉬던 생명체였다. 바로 우리들의 공동성이 실현되던 원형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옛 살림집들은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선 지표면 위에 위치함을 주시해야 한다. 터를 잡고 집을 지을 때 땅의 원형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짓는다. 그리하여 소위 집 전체의 하중의 흐름이 지표면 위에 가시화되어 보인다.
집이 물리적으로 구성되고 그 모든 무게들이 주춧돌 위로 집중되는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설사 집이 소명을 다하고 사라진다 해도 집터는 땅을 훼손하지 않은 채 흔적을 남긴다. 집은 잠시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이긴 해도 집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집을 잠정적으로 서 있게 하는 터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 마을이 사라져도 그 마을의 터가 고스란히 땅의 원형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면 그 이치를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은 땅 속에 굳게 뿌리내리는 영원한 집을 원하였던 것이 아니라 땅과 일체가 되어 잠시 머물기를 희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유목민 같이 살았던 것은 아니다. 터가 중요하고 집의 앉힘새가 중요하였던 것은 바로 태양과 주변 자연과의 긴밀한 관계 맺기 방식의 중요성 때문이다. 집 안으로 앞산의 풍광을 끌어들이고 멀리 보이는 산자락을 맞이하는 것은 주변 환경과의 교감을 고려해 넣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거주의 영역을 넓히고 늘 ‘그러한’ 자연의 심상을 같이 하는 것이 거주의 중요한 기능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집이 자연과 유리된 오브제가 아니라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 또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또한 집은 지형과 지세를 따라 짓되 부족하거나 남는 부분이 있으면 적절히 조절하면서, 집이라고 하는 부분이 자연이라고 하는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집은 필연적으로 인공적인 것이지만 어느 산자락에 놓여도 돌출하지 않고 납작 엎드려 위세를 부리지 않는다. 특히, 한국처럼 땅과 같이 산이 많은 나라에서 산은 일차적으로 자연이 만들어 준 ‘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은 그에 거스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뒤꼍에서 자연을 만난다. 은은한 집의 그림자 속에서 뒷산을 만난다.
그리고 모든 집들은 흙이 드러난 마당을 갖는다. 마당은 단순히 농사일과 집안의 대소사를 가능케 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계절과 시간을 감지하게 하는 곳이다. 그래서 마당을 제외하고 집은 성립되지 않는다. 빗물이 흐르고 눈이 덮이며 햇볕을 방과 대청마루로 실어나르는 거울이다. 달빛이 머무르는 눈이다. 마당이 있어야 집이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당은 집이다. 흙이다. 대지의 기운이 보내주는 따뜻한 숨결이다. 집을 방문하는 이웃과 손이 최초로 밟는 땅이다. 비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집의 중심이다. 집으로 에워싸인 마당은 마루와 방으로 연결되면서 작은 우주를 형성한다. 한국인들이 손바닥만 한 마당이라도 마당이 있는 집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곳이 우리들의 고향인 우주의 어느 빈 곳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원형을 보존하면서 끊임없는 변화를 수용하는 마당이야말로 생태계의 양상을 그대로 닮고 있다. 밝은 마당과 깊이 내민 처마의 그늘은 집을 늘 아늑하게 한다. 처마는 두말할 것 없이 태양열과 빛을 수동식으로 조절하는 장치이며 용마루에서 시작한 지붕의 경사면이 끝나는 경계이다. 그리고 그 밑에 집이 있다. 다락이 있다. 우리들의 의식세계에서 잠시 잊혀진 채 온갖 사물들이 숨 쉬는 보물창고가 있다. 다락은 벽장과 함께 감춰진 삶의 뿌리이기도 하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맞이하는 마루는 차갑다. 목재 결이 숨 쉬고 반들거리는 표면은 반복되는 삶의 거울이다. 할아버지가 지나가고 아버님이 밟고 가신 자국이다. 우리들이 공유하는 기억이다. 장마철 마루에 앉아 쏟아지는 빗소리 한가운데에서 마당을 내려다보는 것은 한국인들의 잊을 수 없는 실존이다. 그리고 낮고 자그마한 방들, 반들거리는 장판, 구들의 열기에 따라 부쳐진 이름인 아랫목, 윗목은 표식 없는 위계질서이다. 살림집의 방들은 마치 최초로 인간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였을 때와 유사한 최초의 방들과 닮아 있는 듯하다. 방도 마당처럼 비어 있고 시간대에 따라 활용하던 다목적 공간이다. 시간이다. 그리고 방 속에 부는 바람 대청에 부는 바람, 그것은 집의 호흡이다. 숨결이다.
부엌의 바닥은 물론 부뚜막도 온통 흙이다. 흙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땐다. 연기가 집 안 구석구석에 퍼져서 집 전체를 훈제하고 소독한다. 부엌은 물과 불과 나무와 흙과 곡식이 있는 곳이며, 난방과 취사와 쓰레기 소각과 재와 같은 비료를 만드는 곳이다. 살기 위해서 자연의 또 다른 순환을 마련하는 곳이다. 나무가 불이 되고, 재가 되고, 다시 비료가 되고, 다시 땅이 되어 나가는 것이다.
한국의 옛 살림집은 자연 속에 있으며 집 속에 자연의 섭리를 내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집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도처에 신의 정령이 있다. 부엌에도, 대들보 밑에도, 뒤꼍 성주단지에도 집을 지켜주는 신들이 살고 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없는 이 믿음들은 집을 신성한 곳으로 변환시킨다. 신성한 것에 대한 정신이야말로 집을 생물학적인 의미의 생태계로부터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 아니 물질의 허상과 변화하는 삶 사이에 균형을 이루게 해준다. 공유하는 정신을 깃들게 하며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심성 속에 근원적 의미의 인간성을 끊임없이 반추시켜 주는 곳, 그곳이 진정한 의미의 집이다. 이를 두고 우리는 다른 말로 ‘생태적인 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을 짓고 집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 속에서 사람의 신체가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되어 그의 삶이 차곡차곡 집 속에 기록되어 서로가 교감하는 장소, 그러한 집, 그러한 건축이 그리운 시절이다.
이 나라 이 땅에는 아직도 우리들이 깊이 소화해 내지 못한 조상들이 남긴 지혜와 유산이 있다. 그것은 결코 보이는 형태에만 있지 않다. 또한 보이지 않는 정신이나 지혜에만 있는 것만이 아니라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에 대한 태도에도 있다. 즉 삶의 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없이 생태적인 집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집의 모양이나 형식이 아니라 집과, 집이 거주하는 자연에 대한 우리들의 균형 잡힌 정신이다. 바로 이것이 필연적으로 우리들이 다시 흐르게 해야 할 의미의 물줄기이다.
참고문헌
쪾미셀 마페졸리 : ‘공간의 강조’,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의 강의록, 1999
쪾빌 조이, ‘미래에 왜 우리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 『녹색평론』 2000년 4월호
쪾질베르 뒤랑 지음, 진형준 옮김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 살림출판사, 1997
쪾질베르 뒤랑 지음, 유평근 옮김, 『신화비평과 신화분석』, 살림출판사, 1998
(본 사이트에는 일부 사진과 표가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5월호를 참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