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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7월호 | 특집 ]

Ceramic Arts Collector
  • 편집부
  • 등록 2009-06-15 11:12:36
  • 수정 2009-07-14 15: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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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는 "아름다운 무언가를 찾으려는 마음이야 딱히 어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애초부터 존재하는 바이고, 내가 이런 식으로 물건을 수집하는 행위 역시도 인간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아름다운 대상,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본래의 진면목을 그 행위에서 찾아내고 또 그것을 다시 살펴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내가 시도했던 수집도 내 마음의 발자취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수집품 하나하나는 나의 친근한 동반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은사이기도 하다."고 했다.
가치가 떨어지는 물건을 수집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수집하기 전에 그 내용의 객관적인 가치를 따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기쁨을 함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번호 특집에서는 ‘예술품을 보는 콜렉터의 시각’을 통해 현대 미술 콜렉터들의 다양한 유형을 알아보고, 동서문화교류의 증거이자 최고의 문화상품으로 손꼽히는 ‘유럽전통 도자예술품 수집의 매력’을 들어본다. 또한 현재 국내에서 활동 중인 도자예술품 콜렉터 4인을 직접만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도자수집품과의 인연, 좋은 수집품을 골라내는 안목과 기준, 수집의 대한 철학, 수집품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들어보자. 


미술품을 보는 콜렉터의 시각
글 박이찬국 미술투자전문가, 갤러리 눈 대표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은 문화의 길로 접어드는 길목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그 긍정적인 마인드가 미술품에 대한 수집으로 이어질 때는 당연히 투자라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된다. 2~30년 전에는 미술품에 대한 투자보다는 좋은 취미이거나 진정으로 미술애호가여서 수집을 하셨던 분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이제는 재테크의 수단으로써 미술품 수집을 하는 분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재테크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미술품의 수집과 재테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그래서 콜렉터라고 불리는 것은 현명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는 말과도 같이 여겨진다.
콜렉터는 우리말로 수집가를 칭하는 것은 모두가 아는 말이다. 그렇지만 가장 공통적인 콜렉터가 바로 미술품수집가를 뜻하기도 한다. 미술품수집가라고 불린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눈을 가졌다라는 말과 같다. 좋은 미술품을 고르는 눈을 가지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콜렉터의 유형도 다양한 부류가 존재한다. 그 유형을 잠깐 이야기해보자.

미술을 사랑하는 콜렉터
미술을 사랑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우리네 성격상 아름답다는 칭찬을 하기가 어려운 이유와 비슷하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칭찬을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진정 미술을 사랑하는 콜렉터들은 일단 미술의 유형을 정해서 작품을 수집하지 않는다. 회화나 조각 혹은 공예를 구분하지 않으며, 작가의 성품에 반해서 혹은 전시된 작품이 감성을 움직이거나 그 조형성이 눈을 행복하게 할 경우 서슴없이 작품을 구입하는 타입이다. 일주일 중 하루를 시간을 내어 전시장을 찾거나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서 대화하고 작가를 후원해 주기위해 아낌없이 작품을 구입하고 가슴으로 작품을 구입한다.
여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미술품이 전해주는 그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진정한 의미의 콜렉터다.

미술품 구입을 자랑하는 콜렉터
주변에서 흔히 이런 분들을 자주 본다. 미술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반지나 명품가방을 든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랑은 당연한 것이다. 스스로 좋은 미술품을 사서 자랑하는 행위는 인간이 가진 소유욕과 명예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구입하고 나서 주변 지인들에게 이야기하고 그 작품성을 논할 때 눈에 생기가 돌고 어깨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다. 필자도 이런 타입의 콜렉터인 것 같다. 한 달 열심히 일을 하고 그 받은 급여로 좋은 작품을 구입할 때는 어떤 희열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구입한 작품을 집에 설치해 두고 지인이나 가족들에게 설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누구도 해보지 못하고 느껴보지 못하는 것을 먼저 실행한 사람이 느끼는 기분이 생긴다. 맛있는 요리를 찾아 요리명소를 찾는 것처럼 그 쾌감이 작품을 구입하고 자랑할 때 비로소 행복감이 배가된다. 좋은 자동차를 구입하고 나서 지인들과 시승을 하는 것과도 같다.

미술품을 감추는 콜렉터
미술품은 일단 싼 작품들이 적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구입하고 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두거나 혹 돈의 출처 때문에 숨겨두는 분들이 있다. 몰래 혼자 나와서 작품을 보면서 웃기도 하고 그 만족감을 배로 느끼고 또 명작을 혼자 알아보는 것에 흥분되기도 한다. 예전 큰 기업을 운영하는 어떤 회장님은 작품을 500여점 소장하고 있으면서 집 지하에 갤러리를 몰래 만들어 두고 작품들을 감상하고 그 행복감에 지하에 자신만의 음악감상실까지 만드셨던 분이 계셨다. 왜 지하에 갤러리를 만들고 음악감상실까지 두셨냐고 물었더니, 그 분 왈 “혼자 조용히 음악을 들으면서 이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나만 소유했다는 그 기쁨과 함께 이런 작품은 혼자 볼 때 더 가치를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혼자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업무에 지친 몸을 끌고 왔다가 작품들을 보면 작가가 이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그 열정과 함께 그 에너지가 전해져서 다음날 더 큰 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술품을 투자상품으로 생각하는 콜렉터
서두에 밝혔듯이 투자상품으로 생각하는 콜렉터가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투자상품인 이유는 재테크이면서도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먼저 선점을 했다는 것은 투자에서도 선점을 뜻하며 외국에서는 좋은 작품을 소장한 것을 명예로 생각하고 그 투자가치를 먼저 알아본 것에 더욱 뿌듯해 하며 공식적으로 작품소장을 밝히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인 테오가 자식들에게 형의 작품들을 잘 소장하고 그 이야기와 가치를 꼭 기억해서 기다려라는 이야기를 한 것처럼 좋은 미술품은 가장 현명한 투자상품이다.
옥션에서 구입가 대비 200배를 벌어본 콜렉터는 처음에는 투자라는 생각을 안했지만 한 점 한 점 구입해 가면서 그 가치를 알게 되고 옥션에서 판매도 해본 결과 투자가 이보다 좋은 게 없다고 했다. 얼마 전 어떤 특강에서도 모든 강의를 듣는 분들이 투자로 미술품을 수집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공부만 하는 콜렉터
아마 가장 많은 것 같다. 미술품에 대해 공부를 주로 하고 구입 시기를 고민 많이 하고 책이란 책은 다 섭렵한다. 하지만 정작 구입을 할 수 있는 전시에서는 갈등을 많이 일으키는 콜렉터다. 자신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듣다가 많은 도서와 미술관련 세미나를 참석하고 나중에는 스스로의 공부에서 온 자신감에 뿌듯해 한다. 작품 구입을 잘 못하지만 결국에는 구입한 작품을 원론적으로 분석을 하고 싶어서 재료나 소재 혹은 주제에 대해서도 직접 작가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주변 분들에게 반응이나 시각을 물어보기도 한다. 이런 콜렉터는 전문직을 가진 분들이 주로 많이 존재한다.

이처럼 미술품을 보는 콜렉터의 시각은 다양하다. 하지만 현대자본주의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미술시장의 발전과 더불어 한국현대미술의 더 큰 성공을 위해서는 콜렉터의 숫자는 더 늘어나야하고 수익을 내는 분들도 더 많이 생겨나야한다.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몇 해 전보다 훨씬 많은 미술기사나 다양한 공공 성격의 전시나 설치, 환경조형 등 다양한 미술과 관련된 담론과 이미지들을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문화라는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이미지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패션이라 불리는 업종도 예술이어서인지 미술의 흐름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건축도 미술사의 흐름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한 예로 흑백이미지가 미술 사조를 휩쓸 때 단순한 색깔의 건축물들이 많이 지어지며 패션시장도 단색조의 패션이미지들이 많아졌다. 얼마 전 핑크라는 색이 패션의 화두일 때 현대미술이 먼저 핑크를 작업의 모태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렇듯 미술문화는 세상에 많은 다양한 삶과 밀접함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미술품의 투자가 곧 새로운 투자상품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콜렉터들은 주로 대단한 부호들이 많다. 그리고 그 부호들의 성공의 비결은 작품으로 얻은 수익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호들의 성공비결은 단순히 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미술품에 대한 열정과 투자로서의 구입, 그리고 진정 미술품을 사랑하는 콜렉터로서의 배려가 이러한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각국의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좋은 미술품을 구입함으로서 국민들에게 더 낳은 문화적 혜택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구입한 미술품이 또는 해외로 전시될 때 수출의 효과를 주기도 한다.
좋은 미술품은 언제든 존재한다. 그 좋은 미술품은 작가가 열정을 쏟아서 만든 최고의 작품이므로 작품에서 느껴지는 그 감동과 열정을 구입하는 콜렉터는 그 감동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열정으로 전환되어지며 또한 그 작품을 다시 옥션이나 다른 판매로 이루어질 때 수익이 생김과 동시에 서운함도 생기지만 또 다른 작품으로 투자할 기회도 생긴다. 미술품이란 것은 언제든 새로운 작품으로 바꿀 수도 있지만 영원히 자신만의 작품으로 간직할 수도 있다. 이렇듯 미술품은 그 다양함이 다른 어떤 물건이나 부동산보다 뛰어나므로 싫증도 잘 나지 않는다.
미술품 수집을 하는 가정에서 자란 어린이가 훨씬 창의력이나 리더십이 강하다고 한다. 그 말은 문화에 대한 인식이 앞서가고 미술품을 보는 여유와 시각이 새로움을 받아들이기도 쉽고 언제나 정해진 사고가 아니라 창의적인 사고로 다양한 인식이 생겨난다는 말인 것 같다. 콜렉터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이 주로 대를 이어 콜렉터를 하는 것만 보아도 그 가치는 증명되어진다. 하지만 일방적인 콜렉션은 무미건조함을 낳고 싫증을 낳듯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동시대에 벌어지는 사회와 환경 등 다양한 이슈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콜렉션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콜렉터란 말처럼 콜렉터는 수집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 수집품을 잘 보관하고 또는 잘 교환하거나 판매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투자는 없을 것이다. 미술품은 가치가 소장과 더불어 그 문화의 섭취가 더 많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얻어지는 수익도 더 많다.

 

유럽 전통 도자 예술품 수집의 매력

유럽의 도자문화의 만남
유럽의 도자기 예술은 동서 문화교류의 증거이자 최고의 문화 상품으로 유러피언들의 안목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백화점에서 컵앤 소스 한 피스에 300만원을 호가하는 유럽도자기는 어떻게 오늘의 자리로 오를 수 있었을까.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유럽의 도자기는 그 역사가 동아시아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으로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기도 하다.
3~4세기 전까지는 중국의 백색 자기를 흉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귀족들은 중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는 반투명의 백색 자기에 열광하였으며 이때 china 라는 이름을 낳는다. 당시 도자기 한 세트가 집 한 채 가격과 맞먹는 가격이었다니 실로 그 인기를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청나라 황실은 프랑스 세브르 자기를 역수입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도자기 선진국의 천년 아성이 무너진 것을 상징한다. 유럽의 명품 도자기 디자인은 이러한 경로를 따라가 보면 만날 수 있는 종착역이 된 느낌이다.
다양한 도자기 마니아들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동한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도자기 브랜드들을 취향에 따라 수집하는 그들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유럽 도자기를 성장시키는 동력이라 할 수 있으리라. 안목이라는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축적되면서 가지치기를 하는 기둥과 같아서 컬렉션이라는 뿌리없는 문화에서는 높은 안목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도자기, 그 가운데서 1350도 이상 고온에서 빚어내는 자기를 유럽에서는 포슬린Porcelain 이라고 부르거나 차이나china라 명칭한다. 이는 자기 문화의 이동경로와 관련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징기스칸이 유라시아제국을 건설할 즈음인 13세기 마르코폴로가 중국을 여행하고 약간은 과장된 그러나 매우 이상향으로 실크의 나라를 소개하였다. 실크는 로마의 귀족들의 옷으로 사용한 유래가 있었으며 향료의 교역으로써도 익히 듣던 나라이긴 하지만  실제 그곳을 방문해 본 사람은 없었던 먼 이국이었다. 폴로는 그 책 가운데에서 중국의 자기 그릇을 소개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가 조개 -라틴어 포르셀라나porcellana -가 곧 학명으로 자기로 불리게 된다. 즉 조개처럼 표면이 광택이 나면서 반투명 사기질이라는 것으로서 일견 올바르게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중국의 풍부한 문화는 유럽을 선진국으로 견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는 나침반, 화약, 인쇄 기술과 차 문화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특히 도자기는 역사학자들에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그 유동하는 문화경로가 순례자를 닮았다하여 언제부터인가 ‘필그림 아트’라는 닉네임으로 자기예술을 부르기도 한다.

대략 세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라틴 유럽지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를 그리고 두 지역의 중간에서 매개 역을 담당했던 중동中東 혹은 이슬람지역을 꼽을 수 있을 터이다. 도자기 마니아들에게 두 문명 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점과 영향을 나눈 흔적은 이질적이면서도 매우 흥미롭다. 
따라서 지역별 혹은 시대별 도자기 디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순례 미학을 과정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과 일본관계에서처럼 도자 문화의 이동경로는 지정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고성이나 궁을 방문해 보면 접시를 벽에 걸어두거나 차이나 룸china room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해오던 밥그릇이 다완으로 일본의 귀족들을 사로잡았듯이 유럽에서도 매우 귀한 예술품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유럽에서 철학과 건축예술, 정치제도로 인류에 이목을 집중시킨 그리스의 도기문화는 그 기여도가 독특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언급하기 전까지 유럽은 중국의 자기를 알지 못했다. 따라서 중세이후 유럽의 관심은 중국식 자기를 따라하려는 노력의 다름 아니었다. 문화선진국이었던 중국의 아름다운 자기를 18세기까지 유럽에서 개발하지 못했다.
모든 군주들은 백색금으로까지 불린 자기를 개발하기위해 열정을 기울였으나 쉽게 도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짝퉁 자기가 등장한다. 이 짝퉁 자기는 유럽과 중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슬람 지역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일찍이 유럽으로 아시아문화를 전달하는 중개자 역할을 수행해온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세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베네치아, 혹은 비잔티움 같은 몇 곳의 창구를 통해서만 교역이 가능했다. 간혹 몇 점의 중국 자기가 유입된다하더라도 그 가격이 너무 높아 실생활에서는 사용하기에 벅찼던 것이다.
바빌론 같은 중동지역에서는 일찍이 타일문화를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유리 산업에서 월등히 앞서 있었는데 여기서 나타난 발색發色기술이 중국으로 수출되는 과정을 거친다. 특히 청화백자의 코발트원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안료로써 조선까지 그 영향이 닿았던 것이다.

고온에서 구어 내는 자기와 비슷하게 유리도 고온에서 녹여 만들기 때문에 재료에 함유한 금속이 녹는 과정에서 발색하는 기술을 그들은 보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거니와 컬러풀한 건축용 타일은 이미 바빌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니 아시아의 도자기는 그들과의 교류에서 터득한 코발트 블루를 만나면서 색을 내는 기술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자부하는 청화백자도 알고 보면 이렇게 오리엔트권과의 문화교류로서 얻어진 산물인 것이다. 조선과의 전쟁으로 얻어낸 기술로 자기 생상 대열에 합류한 일본, 그들이 네델란드와 합세하여 유럽에 판매하게 된다.

유럽 자기 개발
유럽의 모든 군주들은 백색 자기개발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7세기 독일의 강력왕이라 불리던 작센공국의 아우구스트는 마이센 성에 뵈트거라는 연금술사를 유폐시키고 백색 금을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리게 된다. 결국 그들은 백색의 황금을 탄생시켰다. 1710년부터 현재까지 작센의 드레스덴 근처에 위치한 마이센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 유럽에서 성공적으로 생산된 최초의 순수자기로써 계속 유럽산 자기의 양식을 지배했다. 1756년경 예술의 나라이자 대국이었던 프랑스 세브르 자기에게 주도권을 넘기기까지 중국산의 것과 비슷한 순수자기의 비법은 1707년경 연금술사인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와 물리학자 에렌프리트 발터 폰 취른하우스에 의해 유럽에서 최초로 개발되게된 것이다.
중국풍과 함께 서서히 당시 바로크 음악의 중심이었던 드레스덴은 당연히 바로크적인 모티프를 적용시켰으며 그러한 마이센의 디자인들은 아주 세밀하고 생동적인 느낌과 균형 감각이 있었다. 1731년 이후 마이센 공장은 조각가 요한 요아힘 켄들러의 모델링으로 전성기를 맞게 되는 데 이로서 그릇의 범주를 벗어나 조각으로 그 예술적 지경을 넓혀갔다.
푸른 상칼을 마크로 한 마이센 은 초창기 중국과 일본의 디자인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유럽디자인으로 조각까지 아우르는 제품이 출시되자 그 인기는 높기만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세브르가 루이15세의 후광을 업고 등장하고 마이센과 경쟁한다. 유럽은 이제 백색 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퍼져나갔으며 곧 중국 품에서 벗어나 유럽특유의 안목으로 세계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청나라 황실에서는 급기야 프랑스 세브르를 수입하여 사용하는 일이 생기고 만다.
세브르 탄생과 더불어 창의적인 영국인들은 보다 보온성이 높고 얇고 투명한 자기개발에 도전한다. 스포드라는 도공에 의해 본차이나bone china가 탄생하자 일약 세계 자기시장의 주도권은 영국으로 옮겨간다. 지금도 스타포드 쉐어 에 스톡온트랜트에 가면 웨지우드를 비롯한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클러스터를 유지하며 활발하게 생산하고 있다.

왕립 도요를 바탕으로 발달한 프랑스나 독일 등과는 달리 영국은 벤쳐 정신으로 무장한 기업가 정신으로 도자기산업을 일으켰기에 훨씬 다양한 브랜드가 탄생하고 사라져 갔다. 따라서 영국의 도자기 산업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즐거움이자 수집가로서 갖추어야할 기초지식에 해당한다. 웨지우드, 민튼, 우스터, 스포드, 덜튼, 더비 첼시, 스포드, 쉘리, 앤슬리 등등 각기 개성이 다른 도요들이 독특한 예술성으로 승부한다.

 

좋은 그릇은 만든 이와 쓰는 이가 함께 완성한다

김명익  
    

김명익(59)은 차인으로서 차도구를 모으는 수집가다. 그가 도예와 맺은 인연은 유난히 차를 좋아하시던 선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찻그릇을 쉽게 접해온 것에서 시작됐다. 부모님이 수집해온 차도구 유품은 그에게 좋은 찻그릇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주었고 그의 눈에 들어 지금까지 모은 찻그릇은 물려받은 찻그릇 수 못지않게 늘어나 모두 700여점에 이른다. “찻그릇은 흙빚는 도예가가 50%를 완성하고 그릇을 구입해 사용하는 사람이 50%를 완성한다.” 도예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작품에 차를 담아 마시며 느끼는 깊은 감흥은 나이 예순을 앞둔 그의 삶 중에 가장 큰 행복이다. 더불어 인연이 된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허물없이 찾아와 좋은 그릇에 차를 담아 나눌 수 있어 더욱 행복하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주택가에 자리한 그의 집은 도심 속 전원주택이다. 골목을 들어서면 낮은 담을 따라 조성된 꽃길이 예사롭지 않다. 시골집 나무 문짝으로 만든 낮은 대문과 숲속 같은 마당은 오랜 기간 섬세하게 가꾸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전통정원을 옮겨온 듯하다. 1층의 다실은 한옥의 구들장을 옮겨다 깔고 일본식 다다미를 올렸다. 이곳에는 하루 종일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지인들과 보이차를 우려마시며 나누는 차와 그릇, 꽃, 나무 이야기는 매일 늦은 밤까지 이어진다. 다상위에는 보이차를 담아 마시기 좋은 편안한 찻그릇이 가득하다. 최근에는 찻물 우리는 주전자로 도예가 김대웅의 작품을 애용한다. 김대웅의 그릇은 다듬어지지 않은 젊은 기운이 넘쳐 사용할수록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가 보이차를 주로 마시는 이유는 불편한 격식보다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가운데 차를 마시기 위해서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편하게 좋은 차와 그릇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큰방 맞은편 작은 다실의 벽장식장에는 박부원, 천한봉 등 원로도예가를 비롯한 중견도예가들의 찻사발로 가득 채워져 있다. 1층 현관을 나와 정원을 통해 2층 계단을 오르니 특별한 공간이 하나 더 있다. 이곳에는 일본의 다실에나 있을 법한 ‘감실’1)이 있다. 김명익씨는 이곳을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글귀, 그림을 교대로 놓고 감상하는 공간으로 사용한다. 감실 옆의 미닫이 문을 열자 감탄이 절로 나올 법한 좋은 찻그릇들이 공개된다. 찻잔과 다기, 다호, 차시, 다완, 차도구들은 우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도자기를 비롯해 중국 명, 청시대, 일본 고도자기까지 다양하다.
‘가장 아끼는 그릇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평소에 주로 사용하는 다완이 가장 소중하다고 답한다. 그는 자주 사용하는 다완을 부주의로 깨뜨리면 절대 버리지 않고 금으로 때워 다시 쓴다. 이유는 그 그릇이 자신의 모습을 닮아서란다. 젊은 시절 절제하지 못한 삶으로 깨어지고 부서진 인생을 살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변화된 모습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찻그릇 중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도 있다. 고 지순택 선생의 유작인 「요변다완」이다. 이 그릇은 김명익씨와의 오랜 인연으로 차를 마시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는 장성급 군인들이 진급기념으로만 마실 수 있는 특별한 찻그릇이다. 또한 200년 가까이 된 그릇으로 워낙 오랜 기간 사용해 주저앉기 직전 사용을 멈춰 소장중인 것도 있다. 2층 다실 한쪽에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일본인 아내 이방재 여사가 쓰던 도자기를 담은 칠기합과 지순택 선생의 백자난초문병과 백자포도문병, 청자호, 백자달항아리 등의 수집품도 있다.
김명익씨는 “찻물이 잘 나오고 차흔이 잘 스며드는 좋은 그릇을 만드는 도예가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과거 일본인들을 통해 호황을 누리며 유명도예가로 인정받게 된 이들 중 교만함에 빠져 겸손을 잃은 도예가들이 있습니다. 작품의 가격이 비싸야만 유명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도자기를 빚어 좋은 수집가를 만나는 일과 좋은 그릇에 차를 담아 나눠 마시는 일에는 서로를 존경하고 인정하는 마음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도예가들 스스로 명성을 얻은 후 자만해 물질의 이득만을 바라는 모습이 아닌 진정 흙을 사랑하는 애정으로 작업에 임해주기를 바라는 도예애호가로서의 마음이다.

 

 

1세대 현대도예작품 수집위해 골동상인을 가르친
연충희

연충희(54)씨는 오랜기간 공직 생활을 해오면서 무료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15년 전부터 취미로 수집을 시작했다.
고미술품 시장에서 가장 처음 구입한 도자기는 경기도 이천의 1대 설봉선생의 「인두화 산수화문백자호」로 회화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고 이후 지순택 선생의 「천목다완」과 「백자」작품 등도 수집하게 됐다. 한창 서울 청계천 인근의 골동품 시장을 누비고 다녔던 때, 근대 이후의 현대도예작품과 작가에 대한 자료를 골동상인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쳐주며 비슷한 작품이 보이면 무조건 확보해 줄것을 부탁하고 웃돈을 주어가며 수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구입한 작품 중에는 신상호 전 홍익대 교수의 초기작인 「백자투각호」와 양승호 도예가의 유럽활동 당시 작품인 코발트빛 트임주전자도 있다. 그렇게 수집한 작품 중 골동 도자기는 2점뿐이고 총 200여점 모두는 근대이후의 현대도예 작품들이다.

도자기 수집에 푹빠져 지내던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고 원대정 선생의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한 화가를 만났다. 본인이 도자기를 수집하고 있다는 말에 그 화가는 낡은 오동나무 상자 안에 담긴 독특한 형태의 도자기를 보였다. 병의 전부분이 각진 독특한 모습이었다. 상자 안에는 도록도 그대로 담겨있었다. 연충희씨는 상자 안에서 빼곡이 내민 각진 주둥이만 보고 새로운 도자세계의 선각자일 것이다 판단하고 더 이상 꺼내보지도 않고 넘기라고 말했다. 다행히 그 화가는 원대정 선생의 명성도 알지 못하고 있었고 흔히아는 전통재현작이 아니라는 생각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신이 소장한 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원대정 선생이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더 유명한 현대도예 1세대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더없이 기뻤다. 이후 도자기 관련 서적과 자료를 찾아 탐독하며 지식을 쌓고 관련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몇 해 전에는 도예가 조정현의 현대옹기 작품전을 보기위해 이화여대박물관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소장된 고 황종구 선생의 작품을 직접 보게 되었다. 우리 고려청자를 근대이후 완벽하게 재현한 도예가가 고 황종구 선생의 선친인 황인춘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그는 황종구 선생의 전통과 현대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에 반해 이미 고인이 되신 선생의 사모에게 통 사정을 해 어렵게 작품 열점을 구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이천에서 5대째 도예가 가문을 어렵게 잇고 있는 한기선의 백자작품에 화가의 그림을 그려 넣어 소장하는 재미에 빠져있다. 그림은 그의 사촌인 풍속화와 미인도로 유명한 동양화가 연세희의 솜씨다. 연충희씨는 어떤 작품이든 자신의 손에 들어온 작품에는 크기가 꼭 맞는 오동나무 상자를 맞춰 구입해 보관한다. 그 이유는 안전하게 보관하기 좋기 때문이다.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의 그의 집 여유공간에는 도자기를 담은 각종 크기의 오동나무상자가 천정까지 빼곡히 쌓여있다. 현재 청주에 마련 중인 전시공간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가족모두가 불편함을 감수해야하는 상황으로 자칫 도가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는 남편의 취미생활을 묵묵히 참아주는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연충희씨는 작품 수집에 있어 작가의 명성은 개의치 않고 작품성이 좋은 것을 우선 모으는 편이다. 최근에는 감각 좋은 신진작가들의 작품도 즐겨 수집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작품전을 찾으면 반드시 전시도록의 표지작품을 구입한다. 작가 스스로 이번 전시의 대표작품으로 선택해 검증이 됐다는 생각에서다. 간혹 신진작가 중에서 형태와 표현은 좋은데 번조기술이 부족해 완성도가 떨어진 작품도 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구입한다. 기술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젊은 작가들에게 작은 격려를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작품을 구입한다. “명성 있는 작가의 작품 한 점 구입할 비용이면 감각 좋은 젊은작가의 작품은 10점도 살 수 있지요. 유명작가의 작품은 제가 아니라도 사줄 사람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는 도예가들에게 쓴소리도 잊지 않는다. “자신의 창조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가 돼 명예를 얻은 후 그 시점부터 정체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특히 유약과 소지에 대한 연구는 끝이 없을 텐데요. 변화하지 않는 작가의 작품은 수집가의 눈에는 매력 없는 대상일 뿐입니다.”
매월 얻는 수입의 일부를 쪼개 작품을 구입한다는 연충희씨. 그의 집에 가득 쌓인 수집작품들이 오동나무 상자에서 꺼내져 새로운 공간에 펼쳐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길 기대해본다.

 


한국현대도예 미술시장의 개척자
우병탁

우병탁(52)은 도예전문갤러리의 관장이면서 수집가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은 작품을 수집해 또 다른 수집가들에게 소개하는 중계자이다. 그가 도예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대 초반 대학에서 조각전공할 당시 유난히 골동도자기가 좋아 찾아다니기를 시작하면서부터다. 82년에 김포공항에 마련한 ‘토아트’ 도자샵에는 일본관광객들의 방문이 많아 꽤 많은 수익을 올렸었다. 당시만 해도 많은 외국인들이 ‘코리아’는 몰라도 ‘고려청자’는 다 알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통재현작품의 인기가 좋았다. 한편 당시 도예계에서는 대학출신의 도예가들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현대도예가 활발하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새롭게 시도된 현대도자작품들을 구매해 샵에 선보였지만 전통재현품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샵운영자로써 유통이 어려운 현대도예작품을 구매하고 소개한 것은 미약하나마 국내 현대도예 미술시장의 시초가 됐다.
수집한 작품중 유명작가의 구작 200여점은 그동안 그와 인연이 된 미술관 운영계획을 갖고있거나 순수콜렉터로 활동하는 이들이 구매해갔고 나머지 300여점은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모든 소장품들은 시대별로 구분된다. 80년대의 현대도조작품과 기형작품은 각각 20여점씩이고 90년대는 30여점의 도조작품과 70여점의 기형작품, 2000년대 이후는 20여점의 도조작품과 100여점의 기형작품이 소장돼 있다. 이밖에 외국 유명도예가의 작품도 30여점이 있다. 여러 소장작품 중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은 1980년 대 말 개최 됐던 <토·도조공모전>의 대상작인 우관호 홍익대 교수의 「비도非陶-87」과 김대훈 작가의 「89-박제된 기억」 그리고 1987년 이수종 작가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흙과 촉각사이」를 꼽는다. 이 작품들은 당시 새로운 비젼의 도예운동을 선동한 작품들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도예분야의 컬렉션 문화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도예가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예작품들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우선 놀라움과 색다름을 줄 수 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는 다양한 회화 작품들 앞에서 관객들이 느끼는 깊은 감흥을 도예작품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흙과 불의 예술은 그 어떤 예술적 표현보다도 더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에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작가정신이 더해진다면 시대를 선도하는 예술장르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도예가 예술로써의 참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시대에 맞는 전시문화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 기존의 공예라는 틀 속에 갇힌 형식주의적인 전시 매너리즘에서 탈피해 작가 스스로 다양하고 자유로운 경향의 개성있는 작품성으로 새롭게 치장된 전시 분위기를 연출해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첨언한다.

 


근대도기 100년, 현대도조100년을 모은다
이정호

이정호(54)씨는 IACInternational Academy of Ceramic국제도자협의회 회원의 도자콜렉터 8명중 아시아에서 유일한 1명이다. 그는 대학시절 당시 도예를 전공한 아내 한향림씨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도예와 인연을 맺게 됐다. 1986년 가을 아내의 스승인 이화여자대학교 황종구 교수님의 능곡 작업실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그곳에서 60cm높이의 「청자병」 한 점을 구입하게 됐다. 첫 소장품이었다. 그 후 얼마간 도예가의 공방을 방문하고 전시장을 찾으면서 몇개의 작품을 더 구입하게 됐고 그 시점에 한 가지를 깨닫게 됐다. 왜 작품을 수집하는가? 수집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수집하는게 옳은 것인가? 를 자문한 것이다. 그리고 외국의 도예 관련 잡지와 자료를 찾아보면서 해외의 현대도예와 한국 현대도예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세계 속 한국 현대도예의 위치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1950년대 첫 대학교육과정이 시작되면서 시작된 한국도예였지만 30~40년이 지난 상황에서 현대도예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다. 제대로 된 콜렉션을 볼 수도 없고 관심있는 사람도 없었다. 몇몇 수집가들은 잘 알려진 명품만 모으는 정도였다. 그는 당대최고의 작품보다는 한국도예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교육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수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정호씨는 탐미주의적 인식으로 감정에 의해 좋은 작품을 모으는 수집가가 아닌 목적을 갖고 필요에 의해 찾아다니는 수집가인 것이다. 1958년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현대도예를 시대별로 정리하며 모은 작품수는 총 600여점으로 그 중 해외작가의 작품은 200여점에 이른다.
90년대 초반부터는 현대도조작품과 함께 옹기도 수집했다. 옹기를 선택한 이유는 청자와 백자는 역사적으로 순수한 우리 정체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옹기수집 역시 목적을 두고 시작했다. 조선초기부터 500년간 정체되며 그저 단순히 담든 용기로만 사용됐던 것이 아닌 1850년대 이후 외국문물이 들어오면서 목기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한 옹기가 100년 동안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기능별로 다양해지고 전국각지로 퍼지게 된 것을 시기와 지역으로 분류해 모은 것이 1,000여점에 이른다. 이정호씨는 “옹기수집은 근대도기 100년의 역사라는 교육적 가치를 둔 것이며 현대도조작품 수집은 앞으로 2050년이 됐을 때 우리 현대도예가 어떻게 발전됐고 어떤 작가들이있었느냐라는 질문의 해답을 줄 수 있는 콜렉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온 일”이라고 전한다. 그는 8년 안에 자신의 수집품을 한곳에 모아 소개할 수 있는 뮤지엄을 꼭 완성해 선보이겠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이정호씨가 애호하는 작품은 흙과 유약, 불을 다루는 테크닉이 완벽한 작품이다. 그는 “눈속임이 없는 뛰어난 기술로 예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의 작품이 좋다.”고 한다. 최근 눈에 띄게 솜씨 좋은 테크닉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30~40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기대를 많이 하는 이유도 이것에 있다. 그는 도예가들에게 “곁눈질 없이 도예작업 한가지로 승부를 해서 작품으로 먹고 살겠다는 각오로 임하면 작품의 질은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의 전업도예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홍보하고 작품을 팔기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전문가라고 생각합니다. 도예가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원천을 도자기로 삶겠다면 대학 강의자리에 연연하면서 작품은 일 년에 한 두 점씩 만들며 단체전에 참가하고 이력을 위해 할 수 없이 개인전을 열어야하는 모습이 아니라 수준 높은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연구하고 외국의 좋은 작가들과 교류하고 경쟁하는 모습의 작가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전한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08.7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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