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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12월호 | 특집 ]

2002년 한국 도예전시의 변화 부재의 현재-2002년 도예관련 전시들
  • 편집부
  • 등록 2003-07-11 11:13:06
  • 수정 2018-02-21 1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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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 도예계를 돌아본다

2002년 한국 도예전시의 변화

부재의 현재 - 2002 도예관련 전시들 글/김영민 한전플라자갤러리 큐레이터

 1. 머리말 : 징후, 예견 혹은 선취들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일’이 놀랄만한 다른 일을 만들기도 한다. 프로테스탄트의 가당치도 않은 소명 혹은 ‘은혜나 당첨’에 대한 증거로의 부의 축척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는 막스베버의 탁월한 식견에서처럼, 어떤 일의 예기치 않았던 결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예술과 관련하여,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징후들이 배태되고 그것이 현실로 보여지고, 모든 후일의 일들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로 기록되는 것들이 종종 있다.

 사진기라는 것의 속성에 들어있던 ‘20세기 미술의 탐험 혹은 방랑’이 그렇고, 피카소가 형상으로 설명해 낸 열려있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사고들이 그렇다. 전시장의 변기뿐만이 아니라 걸개에 글씨대신 쓰여진 그림도 그럴 수 있다. 예술은 다른 분야에 비해서 미래와 만나는 부분이 조금은 더 많기 때문에, 후일을 선취할 가능성이 높다. 예술이 미래와 만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그 행위가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들 때문에 예술작품 감상의 즐거움이 배가된다.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일은, 미래의 것에 대한 징후와 예견 혹은 선취와 관련되며 새로움은 전시를 통해서 드러난다.

 현대미술의 ‘선취들’ 혹은 아방가르드라고 말하는 경향들이 그들의 동력을 고갈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를 운명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근래들어 보여지는 전시들은 추진력을 상실하고 부유하는 커다란 배처럼 보이거나 계속해서 반복되는 고장난 축음기 같이 보인다. 전시기획은 일정의 산출 및 실행계획에 머물고, 비평은 종적을 감춘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창의적 발상은 비평과 더불어 종적이 묘연하다. 그러나 전시는 늘 반복적으로 열린다. 무료하고 긴 소설처럼 늘 같은 주인공의 일상이 끝까지 반복된다.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것이 그다지 흠이지도 않고, 일상을 회복해야 하는 당위를 안고있기까지 한 도예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왜냐면, 그렇게 해도 도예는 하등 죄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도예가 우리들의 일상을 지향하는 것은 본래 그들이 가야할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전하긴 하다. 그들이 돌아오는 길이 외길처럼 보여지는, 흡사 양자택일 같기 때문일 것이다.

2. 몸말 : 전시(들)의 분류

 올해 열린 도예관련 전시들은 예년에 비해서 조금 보수적(?)으로 보인다. 생활도자가 커다란 흐름을 주도했고, 간간이 열린 조형도자 혹은 흙을 단지 매체로 상정하거나 매체들의 혼합을 기도하는 전시들도 커다란 범주에서 보면 예년에 비해서 그렇게 특이할 만한 일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인연’들을 단위로 묶이는 전시의 연례적인 지속도 매우 ‘착실하게’ 반복되었다. 올해의 전시들을, 용도에 따른 분류나 유형이 아닌 예술의지라는 측면에서 분류해보면, 1) ‘지속’을 우선시 하거나 도예가 아직까지 만들어 낸 산물들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강한 경향과 2) 일부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시도들을 통해서 도예의 영역을 확대하거나 ‘예술’이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려는 경향, 그리고 3) 물성 보다는 서사구조를 가진 예술로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를 확실히 드러내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이들은 각각 그들이 바라는 목적에 타당한 과정들을 통해서 합목적적으로 조직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미시적인 차원의 동인에 의해서 조성되고 지속되고 있다. 말하자면, 화파(畵派)라는 개념으로 묶이기엔 너무 인연을 강조하고, 동일한 미의식이 조성되었다기보다는 주입과 용인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더군다나 분류의 개념이 미의식에 근거한다기보다는 미술 외적인 손익이나 감정들에 의해서 조성된 ‘분류체’에의 의존관계 그리고 전시의 형태로 ‘제출’되어지는 연구 혹은 예비적 연구의 형태들이 전시로 보여지는 작품들을 우선한다. 보여주려는 것이 전시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전시라는 ‘것’ 자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전시의 동인이 전시를 통한 평가의 획득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범주를 확인하고, 그 범주를 동류나 (사라져버린) 관련 독서인에게 용인 받으려는 것이 전시라는 형태로 지속되는 듯 하다. 이러한 전시들은 대부분 미리 형성된 미의식이나 방법들을 지속하는 범주 내에서 행해지거나 범주 내 변형을 꽤한다. ‘지속’이란 말은 전통적인 것과 관계 맺고 있다.

 도예적 전통 뿐 만 아니라 과거에서 근거를 찾는 모든 행위들, 다시 말하면 혁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경우 혹은 그것이 무용하다는 견해에 근거하여 보여지는 양상들이 여기에 속한다. ‘현대’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예술지향의 도예행위들을 포함하여, 이 범주에 속한 전시들은 기존의 것을 심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심화의 경향들은 모든 위대한 시기의 다음에 오는 것으로 위대한 것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경향이나 유산보다는 그것이 보여주는 바, 혹은 위대함이라는 특성 때문에 간과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들의 결점을 보충하는 경향을 가진다. 따라서 이들은 개성이나 특성들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평판에 의해서 자신의 자리를 매기는 경향이 있다. 올해 열렸던(혹은 늘 열리는) 대부분의 전시가 이 범주에 해당된다. 대부분 폰트르모와 같지만 다행스럽게도, 간혹 엘 그레꼬 같은 전시가 발견되기도 한다.

 엘 그레꼬와 같은 예로, 쓸모와 조형을 조합하려했던 김진경 도예전(6월)과 체험과 미의식을 공유한 한 미 일 장작가마 14인전(9월) 그리고 ‘현재에서’ 조형도자의 분류표를 만들려고 시도한 좌회전 우회전(6월), 등을 들 수 있다. 도예가 지향했던 원래의 영역에서 범주를 확대하려는 경향은 건축과 관련된 일련의 전시들과 장신구 그리고 사무용품, 기념품 등과 관계한다. 식탁을 넘지만 예술에 경도되지 않는 경향들을 말하는 것으로, 예년에 비해서 이러한 전시들이 많아져서 고무적으로 보인다. 김준휘의 [아름다운 세상전](2월), [박선우 도자조형전](3월), [편성진 도자조형전](4월), [장유미 도예전](5월), [신익창 도예전](6월)들이 여기에 속하며 특히 최병건의 [Molecule]전(7월)은 건축공간에서 모듈로 존재하는 세라믹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기존의 전시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위에서 열거한 전시들은 도자재료가 가지는 여러 가지 생활상의 적용가능성에 신뢰를 보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점차 기술적인 진보와 활용의 확대가 기대되나 최병건의 경우를 제외하면 여전히 재료의 활용이라는 측면보다는 재료로 인한 제한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위에서 제시한 마지막 경향으로, 형상과 서사를 물성에 우선하여, 작품이 재료보다 먼저 인지되도록 한 전시들은, 건축장식품으로서의 역할로 내몰린 전통적인 조각에 자양분을 공급할 정도의 성과들을 보여주었다. 도자 특유의 색채와 자유로운 형태 그리고 혼합매체들이 가지지 못하는 견고함과 원본성을 통해서 조형물로써의 대안을 제시하는 수준의 전시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동물을 주제로 토템적 세계관을 보여준 신상호의 [아프리카의 꿈](6월)은 전시장이 흡사 종교(성)와 사회(속)를 이어주는 형식으로서의 제례로 보여질 만큼 압도적이었으며, 곡선적인 요소와 직선적인 요소의 대별 및 융합으로 여성성의 의미를 무의식과 관련하여 도출하려 한 [강경연 개인전](10월)은 조형도자가 조각의 모범적인 선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밖에, 올해 열린 전시들 중에서 괄목할 만한 부분은 1) 젊은 작가 지망생들의 자유분방함과 더불어 창의성이 제고되었다는 것이다. 대학이나 대학원의 졸업작품전에서 보여지는 예기치 못한 창의력들이 예년에 비해 많아졌고, 학교단위로 특성화 된 성향들이 점차 지워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도예의 미래와 관련해서(그들이 계속 작업할 의지가 있으며, 여건이 허락한다는 전제하에) ‘많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2) 개인적으로 올해의 전시 중에서 주목한 것은 전시장 혹은 화랑을 통하지 않은 조형도자작품의 전시와 유통에 관한 것이다. 전시기획자 한숙진에 의해서 성북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고예실 개인전](9월)과 [여경란 개인전](10월)은 전시기획자가 화랑이 아닌 장소에서 작가와 수집가를 직접 연결하여, 새로운 형식의 판매망을 조성하려는 시도라는 측면에서 의미있는 전시였다.

3. 끝말 : 기획과 창작의 부재(不在)

 몇 년째, 시장과 관련한 정확한 수치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전시를 통해서 볼 때(아트샵이란 형태들을 전시의 형태로 포함하여) 도예는 -최소한- 미술시장과 견주어 볼 때 덩치를 키운 것처럼 보인다. 작년의 대규모 국가적인 도예행사와 그에 후속조치로 열리는 각종 세미나와 지방자치 단위의 행사들이 달을 거르지 않고 열렸으며, 몇몇 행사들이 연내에 준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들이 실제 창작행위와 연관해서 성과를 보여주는 징후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도예에 관련한 향유층이나 도예 자체에 우호적인 잠재적 수요자의 증가가 예견되고 일정부분 그들이 시장을 넓히고 있다는 것이 감지되긴 하지만, 그것에 비해서 창작자(생산자)들의 고양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혹은 너무나 많은 혹은 큰 행사들에 적은 수의 인원들이 힘을 보태다 보니 정작 창작에 쏟아야 할 힘들을 소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프로젝트’는 도처에 널려있는데 작업은 미진한 형국이랄까? 몸말에서 열거한 올해의 전시들이 이룩한 성취들은 도예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극히 미비한 정도에 머무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지향의 도예행위들은 화랑이나 전시장에 의존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횟수가 점차 감소하고, 기존의 경향들이 답습되는 것은 도예 전체에 치명적일 수 있다.

 일상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제작행위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샘이 조금씩 고갈되어 가는 형국처럼 보여져 안타깝다. ‘나름대로 안정되어간다’고 볼 수도 있는 이러한 전시 경향들은 도예 자체에 대한 논의들의 활성화가 미진한 것에 근거하는 바가 크다. 각종 세미나들은 대부분 미래지향적이어서 현재상황에 대한 인식을 회피하거나 창작에 근거하지 않는 시장환경 위주여서 공염불이기 십상이거나 방울 든 쥐를 떠올리게 한다. 사족을 달자면, 전시기획자의 한사람으로써, 제대로 기획한 전시한번 안하고 일정이나 확인하는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태만’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창작자가 좀 더 미래와 만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예기치 않은 결과들이 산출될 수 있는 전시들을 마련하지 못한 책임.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재)한국공예문화진흥원 운영위원 서울산업대, 단국대, 경기대 강사 신상호 作 고예실 作 최병건 作 김진경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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