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창작도예의 출현 :
조선미술전람회의 명암(明暗)
글. 엄승희 한국 근대 도자사 전공, 미술사학자
사진1 「치얀 토쿠테チヤントクテ」 장윤천,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 1935년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도자공예계의 가시적 성과이자 한계를 상징하는 장르 가운데는 창작도예가 있었다. 개인 의 창의적 기량을 도출한 소위 근대의 도예작품들이 각종 미술전람회 석상에 소개되며 이전에 없던 새로운 도자문화를 창출시킨 것이다. 특히 1922년에 신설된 미술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이하 조선미전는 일제의 무단통치에 따른 모순을 체감하는 가운데 창설되었지만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가운데 문화정치의 일환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관전官展의 본격적인 창설은 진보적 취지의 미술전람회가 몇 되지 않던 1920년대에, 시기적 요구에 부합되 면서 동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관제 행사를 표명하기에 적합했다.1 따라서 조선미전은 비록 식민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사상 최초로 창작 의지에 기반을 둔 미술, 공예 분야의 등용문으로 간주된다.2 조선미전은 창설 당시 공모 분야를 동양화부와 서양화 부 그리고 서예부의 3부로 두었다. 그러나 1932년 제11 회부터는 서예부를 폐지하는 대신 공예부를 신설하였다.
「회령소존식화병」 최면재,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 1934년
조선미전에 공예부가 설치된 직간접적인 배경은 1920년대 후반경 국내 공예산업의 안정적인 발달과 저변확대를 들 수 있다. 또한 메이지시대 이후의 일본 공예정책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조선미전 공예부 신설은 일본의 공예문화와 제도가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특 별하다. 이 무렵 문부성전람회文部省展覽會이하 문전나 제국미술전람회帝國美術展覽會이하 제전의 제도를 답습하는 과정을 통해 조선미전은 근대일본의 공예문화를 직접적으로 모방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받았다. 이에 조선미전은 제전의 공예부가 입지를 굳힐 무렵인 1930년대 초반경에 이르러 신설을 계획할 수 있었고, 신설된 이후에도 운영방침과 체제 역시 철저하게 도입하였다.
「화병」장규환,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 1935년
일반적으로 조선미전에서 도자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조형예술에 국한되지 않았다. 가령 회화부 입상 작의 정물화 소재 중 도자기는 대략 30% 이상을 점유하 였는데(사진 1), 이러한 경향은 제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상이었다. 그러나 정작 도자공예는 목공木工 및 칠공漆工분야나 금공金工분야에 비해 입상작이 매우 적어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입상자들은 국 내 유명 일본인 공장에 적을 둔 일본인 기술자들이 대부 분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창작 실태는 거의 파악하 기 힘들다. 이처럼 조선인 입상자가 희박했던 것은 경성 공업고등학교 교사, 중앙시험소 기사, 미술사학자 등으 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을 비롯한 주요 실무운영진들이 모 두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왜곡된 운영을 감행했기 때문이 다. 운영상의 병폐에도 불구하고 공예부 신설에 대해 일 제 당국은 ‘조선공예부흥에 자극이 될 수 있는 요인’으로 규정지었고, 더욱이 도자공예는 ‘단순 모방작을 거부하 고 예술적 가치가 담긴 작품이 출품’되도록 홍보하였다.3 이처럼 총독부는 조선미전과 관련하여 허위 표방을 일삼 았으며, 이는 1944년 종전終展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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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호진, 「日帝의 植民地 美術政策」,
_____이해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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