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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월호 | 칼럼 ]

[문화재 돋보기 ④] 백자금채매죽문 소병
  •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 등록 2021-07-15 18:20:22
  • 수정 2024-07-05 11: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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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돋보기 ④ 

 

백자금채매죽문 소병
白磁金彩梅竹文小甁

글.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문화재 평론가

 

30년 전 필자는 전남 강진군 계율리 논둑에서 畵金靑磁 破片(靑磁編壺의 어깨 부분)을 최초로 지표 수습해 부안 청자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동안 화금청자 파편이 도 요지에서 발견된 사례는 없었기 때문에 화금청자 파편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환희와 감동은 대단했었다. (화금청 자畵金靑磁 : 완성된 청자靑磁에 수금水金을 칠하고 저 화도로 번조하여 청자의 표면에 화려한 금색金色무늬를 입힌 청자로 ‘금채청자金彩靑磁’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의 화금청자는 국내에 4점, 북한에 1점, 일본에 3점이 전해지고 있으나 금박이 거의 떨어져서 금채의 흔 적은 미미하게 확인될 정도인데, 다만 일본 개인이 소장 하고 있는 ‘청자금채 매화문 대접’은 금채의 문양이 잘 남 아있다. 고려시대 화금청자는 완성된 도자기의 문양에 홈을 내어 파진 홈 속에 금채를 해 종속 문양으로 사용되 는 방법과 도자기의 표면에 문양을 직접 그려 주 문양으 로 사용되는 방식이 있지만, 제작방법은 전해지지 않으 며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과 남겨진 몇몇 유물로서 확인만 될 뿐이다.
중국에는 송대의 정요자기에서 처음 금채백자를 제작하 였으며, 주밀周密의 저서인 『계신잡식癸辛雜識』에서 “금 채장식 정요완은 마늘즙에 금분을 개어 도자기 표면에 그림을 그린 후 가마에 넣어 번조하여 완성하였다”고 한 다. 원대에는 제왕만이 이 금채자기를 사용할 수 있었으 며, 명나라 후기부터 청대에는 오채자기와 더불어 많은 양이 제작되었다. 이처럼 꾸준히 맥을 이어온 중국 금채 자기와 달리,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이후에는 금채자기가 소멸된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필자는 화금청자 파편을 최초로 발견할 당시의 감동만큼 큰 감동을 일본 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화금백자畵 金白磁(금채백자金彩白磁)를 최초로 실견한 것이다. 이 화금백자는 조선초에 경기도 광주 일대의 왕실 관요 에서 제작된 최상품의 갑번자기로, 초벌과 재벌구이를 마친 백자에 금채로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대칭으로 그리 고 저화도로 한번 더 번조한 것이다. 약간 낮고 넓은 굽 과 안정적인 몸통의 볼륨에 알맞은 목선이 조화를 이룬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왕실 관요 백자병이다. 도자기 표 면의 금채는 상태가 양호해 보이지만 현미경사진을 보면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금채의 긁히고 떨어져 나 간 부분과 오랜 기간 매장되어 침윤된 흙.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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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1년 6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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