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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월호 | 칼럼/학술 ]

[엄승희 칼럼 ①] 분원의 민영화와 한국 근대도자의 서막
  • 엄승희 한국 근대 도자사 전공, 미술사학자
  • 등록 2021-07-15 18:18:18
  • 수정 2024-10-08 12: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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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① 

 

분원의 민영화와 

한국 근대도자의 서막

글. 엄승희 한국 근대 도자사 전공, 미술사학자

 

 

한국의 근대기 도자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길목에서 변혁 의 순간들을 경험하였다. 개항을 기점으로 시작된 근대 화의 서막은 분원分院의 민영체제 전환과 대한제국기 자 주적 근대성 회복을 기점으로 시작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에 접어들어서는 식민 통치하에서 또 다른 혼돈과 갈망 의 시기를 맞이하며 전개되었다.
특히 한국 도자의 근대화 과정은 그 시발점이 서구열강 과 제국 일본의 영향력으로 형성된 부분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요업활동의 주체와 목적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발생되는 다양한 문제들과 직면하 였다. 우선 근대로의 항해에서 새로운 분기점으로 평가 되는 강화도조약1876년을 통한 개항은 조선백자를 대신할 세계 각국의 도자들이 조선으로 유입되는 계기를 마련하 였고, 이러한 계기를 통해 조선백자의 설자리는 제고提 高되어야 하는 상황에 맞서게 되었다. 이 무렵 일본자기 를 비롯한 중국자기들은 민수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이 제공되었으며, 향후 이를 왕실에서조차 외면하지 않게 되면서 외세자기 사용은 확산되었다. 무엇보다 1884년 분원의 민영화 추진은 백자의 질적, 양 적 생산 및 유통 전반을 새롭게 전환시키는 결정적 요인 이었다. 19세기 이후 관요인 분원은 이미 국가 재정과 체 제 문란 등으로 경영이 위태로웠다. 이 내용들은 19세기 후반에 공포된 『분원변수복설절목分院邊首復設節目』 1874과 『분원자기공소절목分院磁器貢所節目』1894의 기록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두 기록물은 시기적인 차이를 두면서 분원 실태를 파악 할 수 있는데, 우선 『분원변수복설절목』을 통해서는 변수 邊首와 분원의 실 운영 관리를 맡았던 도리都吏, 원역員 役들이 자본을 획득하고 이익 창출을 위해 사번私燔을 활용하는 폐단을 지적했다. 이에 감생청減省廳에서는 분원의 계속되는 각종 폐단을 막기 위해 새로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개혁안을 제기했고, 관련 내용을 『분원 자기공소절목』에 명시하였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관요체제를 400여 연간 이어온 분 원을 해체하고, 이의 경영권을 민간과 상인물주에게 양 도하여 운영방식을 민영으로 전환하되, 원역 가운데 공 인貢人 12명을 공식 채용하여 생산에 직접 관여하도록 하였다.2 이 과정에서 조선 요업은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첫 물꼬를 텄고 실제 제작 구조체제가 일변하게 되 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관요의 시대를 지나면서 백 자의 생산이 이전에 공납되던 고급 왕실자기로부터 벗 어나, 대중적이고 실리적인 생활용품 생산으로 교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는 도자제작 전반을 이권사업으로 변 모시키고, 제품의 질을 동반적으로 하향평준화 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한편 1884년 감생청의 구조조정으로 거듭난 분원공소分 院貢所는 민영 초기부터 경영자들의 미숙한 운영으로 운 영자금과 제작기술, 유통 등에 문제를 발생시켰다.3 예컨 대 분원공소는 자기 제작에 필요한 각종 원료 및 연료경 비들은 여전히 왕실과 관료들로부터 조달받았지만, 그 외 경비는 운영자들이 부담해야했다. 또한 동년同年에 제정된 진상공가進上貢價와 정부 고시가격이 생산품의 시가에 월등하게 못 미쳤고, 그나마도 제때 지급되지 않 은데다 관료들의 중간 수탈이 더해졌다. 여기에 전국 상 인들은 분원에 내려와 어음이나 외상으로 거래하는 경우 가 많아 자금회전은 전반적으로 원활하지 못했다. 재정 문제 이외에도 제작기술의 수용과 도입에 따른 문 제도 컸다. 민영체제 이후 분원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일 본인 기술자들을 고빙하였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 수용 한 기술력은 분원백자의 품질을 향상시키지 못했고, 오 히려 백자 고유의 전통성을 빠른 속도로 하락시켰다. 당 시 분원은 양질백자 보다 저급한 그릇들을 대량으로 생 산하여 영리만을 추구하려 했다. 이에 따라 분원백자는 일본자기 보다 경쟁력에서 밀렸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의 사기점에서 판매되는 지방백자의 수요공급량이 향 상되자 시장 점유율마저 점차 상실하였다.

판매부진으로 인한 운영상의 고충은 생산 실무를 담당하 던 사기장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민영 초기의 불 안정한 운영은 이들의 생산의지를 붕괴시키면서 생계를 위협했다. 결국 분원공소는 1895년경에 이르러 경영 악 화를 이기지 못하고 폐업했다. 분원공소의 폐업 이후 1 년 만인 1896년 새로운 근대적 요업체제를 구축한 번자 회사燔磁會社가 재설립되었으며, 이 회사는 분원공소 출 신 공인이었던 지규식池圭植을 주축으로 운영되었다. 대 한제국 개국을 앞둔 시점, 왕실과 관세가 등이 회사 운영 에 적극 참여하면서 출발은 순조로웠다. 생산품은 관상 용품, 생활용기를 비롯하여 왕실 소용 기명器皿 등이 관 장되었고, 경영 또한 이전과 달리 한성 본사와 경기 분원 의 이원체제를 구축하면서 새로운 영업구조를 취하였다. 그런데 설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재정과 유통문 제에 봉착하며 위기를 맞았다. 회사는 보부상을 통해 유 통망을 확장하고, 채기彩器 제작 및 일본인 기술자 투입 등을 통해 새로운 요업활동의 전개에 고군분투하였으나 이 역시 역부족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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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1년 6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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