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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월호 | 뉴스단신 ]

1930년대 한국 근대도자 연구 :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1)
  • 편집부
  • 등록 2018-02-10 0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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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화고려소 작업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미술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이하 ‘조선미전’으로 약칭는 1920년대의 일본 제국주의가 무단통치의 한계와 모순을 체감하며 새로운 대응책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1922년 창설되었다. 따라서 조선미전은 일제가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문화정치의 일환으로서 탄생되었다. 관전官展의 창설은 진보적 취지의 미술전람회가 몇되지 않던 1920년대에, 시기적 요구에 부합되면서 동시에 가장영향력 있는 관제행사를 대표한다.1)
조선미전의 총체적인 운영은 설립취지와는 크게 다르게 행보하면서 궁극적으로 근대 미술공예계에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신설 당시 일제는 전문 미술가의 배출을 촉진하고 양적 성장을 유도하겠다고 피력했지만, 실제 의도는 식민통치에 순응하는 미술로 재편시키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었다.
도자공예는 조선미전의 제도개편에 따라 1932년(제11회)부터 공예부가 추가 신설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이 출품되었다. 공예부의 신설은 1920년대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신공예 문화의 정착,그 가운데서도 전통공예에 대한 재인식이 꾸준히 요구되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1920년대 전반의 미술공예계 흐름과 일본 관전의 개최의도가 총체적으로 반영되어 신설된 공예부는2) 한국 근대 공예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될 것으로 내비쳤다. 그러나 공예부 역시 조선미전 본래의 제도적장치에 여러 모순과 반향에 따라 신설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1920년대 말부터 조선적·향토적 미술 양식의 수립을 제창했던조선미전의 개최취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3) 이에 따라 공예부를 통해 도자공예가 창작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나아가 근대도자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은 결과적으로 구축되지 못했다.본고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의 신설배경을 우선적으로 살펴보고 이과 함께 도예작들의 출품경향과 양식을 분석한 다음,이를 통해 조선미전 공예부의 총체적 평가와 한계 그리고 의의에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의 설치와 양상 : 설치배경과 운영실태문화정치의 일환으로 1922년에 창설된 조선미전은 국내 최초로창작의지에 기반을 둔 회화, 조각, 공예분야 등의 등용문이었다.4)조선미전은 신설당시 공모분야를 동양화부와 서양화부 그리고서예부의 3부를 두었다. 그러나 1932년 제11회 부터는 서예부를폐지하는 대신 공예부를 추가 신설하였다. 이때 공예부의 출품은 도공陶工을 비롯한 금공金工, 칠공漆工, 목공木工, 염색공染色工, 초자공硝子工, 지공紙工, 석공石工 등 13개 분야로 세분되었다.
조선미전에 공예부가 설치된 배경은 1920년대 후반 즈음 국내 공예산업의 안정적인 발달과 저변확대가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메이지시대明治時代, 1868~1912 이후의 일본 공예 정책과 강점이후 이러한 정책을 기본으로 하여 형성된 관행이 공예부 설치의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다시 말해 조선미전에 공예부를 신설하는 문제는 식민지배국이 식민지국에 시행했던 문화정치를 바탕으로 하되, 일본의 공예문화와 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관전을 대표하던 문부성전람회文部省展覽會, 이하 약칭 문전나 제국미술전람회帝國美術展覽會, 이하 약칭 제전 등의 제도와 관행을 자연스럽게답습하였음은 물론 관련 도록이 조선에 배포됨으로써 양식 및 출품경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공예의 위치와 개념이 일본과 동일하게 수용되면서 조선미전 공예부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뿌리내린 근대미술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못하고 있었다. 가장 주목되는 문제는 공예가 회화보다 하위개념에 놓여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차원의 대외산업으로서 공예품 개발과 진흥이 촉구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도 공예영역은 이와 동일하게 취급되어 다른 예술과의 격차를 두면서산업적으로 발전을 모색하였다. 이는 1910년 중반경까지만 하더라도 공예의 위치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해 준미술準美術로 구분했던 안확의 글에서도 확인된다.5)
그러나 일본공예는 파리만국박람회(1900년)를 통해 최초로 미술과의 분리를 철폐하자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또한 일영박람회日英博覽會, 1910년에 출품된 전통공예품의 저조한 실적은 상업공예 혹은 미술공예의 발전을 예고했다. 일본은 우선적으로 농상무성주최로 도안 및 응용작품전람회인 <농전農展>을 신설하였고, 이전람회를 시작으로 의장공예에 치우친 공예제작에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1907년에 개설된 문전에서는 여전히 공예부가 배제되었고 회화부만을 운영하여 완전한 공예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같은 전개에 반발한 선각先覺 공예가들은 1919년부터 지속적인 공예부흥운동을 펼쳤으며, 그 결실은1922년부터 제전의 공예부 신설과 국화회의 공예부 설치 및 상공성에 의한 공예지도소 개설 등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192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술과 공예가 동등한 입장에서 취급되고 평가될 수 있었다.6) 그리고 이 시기부터 일본공예는 공예미술, 민예民藝, 산업공예로 세분되어 탁월한 성장을 거듭하였다.그런데 근대 일본의 공예문화 형성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고 또한그 영향으로 탄생된 조선미전 공예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일본 공예계와는 다른 방향으로 관전 구도를 설정하며 운영되었다.가장 큰 격차는 관련 분야의 교육실태와 양식, 심사 및 입상자의선정 등에서 표출되었다.
우선 일본의 도자공예교육은 1879년 아리타도기학교有田陶器學校가신설된 것을 시작으로 메이지 말기부터는 각 현縣에 도기학교가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7) 이곳에서는 도자의 기술 교육과 실험연구 등이 매우 체계적으로 실시되었다. 즉 메이지 년간부터 도기학교에서 실시한 도자교육은 창작의식을 갖춘 우수한 인력을 배출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배출된 인력들은 이후 소위 도예가의 명분으로 제전 공예부와 기타 전람회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반면 조선은 유사 교육을 양성할 수 있는 전문기관이 거의 부재했다. 전습소, 기능양성소, 강습소 등이 일부 운영되었지만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단순 기능인을 배출하였을 뿐 예술가를 양성시키지는 못했다.
또한 조선미전 도자공예의 양식은 일본 관전 및 일본 근대 도예가들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있었다. 주목되는 점은 근대 조선에서도자기는 매우 중요한 산물이자 공예품으로 취급되어 각종 전람회에 도자기 자체가 출품되는 것은 물론 회화, 조각 등에서도 도자기를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또한 일본 관전의 영향으로 분석된다(사진1). 그러나 정작 도자공예는 일본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목공木工, 漆工을 포함하거나 금공金工에 비해 입상작이매우 적어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여기에 입상자의 대부분은 우수한 일본인 공장에 적을 둔 일본인 기술자들이 차지하는 반면조선인의 참여율은 저조하여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창작도예 실태파악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처럼 조선인 입상자가 희박했던 이유는 경성공업고등학교 교사, 중앙시험소 기사, 미술사학자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을 비롯한 주요 관자계들이 모두 일본인이어서 운영 전반에 편파적인요인이 산재했기 때문이다. 운영상의 병폐에도 불구하고 공예부신설에 대해 일제 당국은 ‘조선공예 부흥에 자극이 될 수 있는 요인’으로 규정지었고, 더욱이 도자공예는 단순 모방작을 거부하고예술적 가치가 담긴 작품이 출품되도록 홍보하였다.8) 이처럼 총독부는 조선미전과 관련하여 허위표방을 일삼았고 이는 1944년종전終展까지 지속되었다.
주지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본다면, 조선미전의 도예 출품은 상당히 많은 문제와 한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출품자와 입상자들은 대다수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선발 기준이 가장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조선미전의 조선인 입상자는 총 4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입상자인 최면재崔冕載와 장규환張珪煥은 특별한 경우로 분류되는데, 우선 회령 출신의 최면재는 조선총독부 부속 중앙시험소 출신이면서 친일파였을 가능성이 높고, 장규환 역시 중앙시험소에서 설립한 여주도자기제조조합驪州陶磁器製造組合을 운영한 실적과 <가정공예품평회> 등에서 수차례 상위 입상하여 유리한 조건을 겸비했다.9) 따라서 국가 정책기관에서 근무하거나 실무경험이 있는 협력자에 대한 예우가 조선미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일본인들은 국내외에 거주한 도자 기술자는 물론이고 노모리 켄野守健,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와 같은 고고학 관련 학자 및미술사학자美術史學者들까지 출품에 참여하여 매우 다양한 입상자들을 배출시켰다.10) 특히 대다수 입상작들은 주요산지에 소재한일본인 경영 도자기제작소에 소속된 일본인 기술자들이 출품한것들이었다.11) 이들의 작품은 전통양식을 재현하면서도 한편으론제전과 문전의 출품경향을 모방하고, 소속 제작소명製作所名을 내세워 상업 수단으로 이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12)
또한 심사위원단의 구성과 심사기준, 즉 선발에 대한 평가는 일본인들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어 공정한 심사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교수인 타나베 타카츠구田邊孝次는 공예부 신설과 함께 각종 공예작품의 심사를 전담하였는데, 이러한 심사기준이 각 분과의 전문화는 물론 심사와 입상의공정성을 결여시킨 근본원인이었다. 특히 도자기의 편파적인 심사기준은 일본취향의 도자양식을 우선하게 유도하였으며 따라서한국적인 미감은 점차 상실되었다.
심사기준과 심사자의 자격이 이러하다보니 입상작의 유형은 일본인에 의해 결정되다시피 했다. 조선미전의 도록을 검토해 보면,입상작의 90%이상이 청자에 치중되었다. 이 같은 출품 경향은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일본인들의 청자애호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가령 입상작을 최다 배출한 곳은 삼화고려소三和高麗燒와 한양고려소漢陽高麗燒, 계월소鷄月燒 등의 유명 청자공방이었고, 따라서 이곳에 소속된 일본인 기술자들이 작품을 출품하여 입상하는 것은 당연했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9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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