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굴 후 박물관에
보관 중인 양구백토
서울에서 홍천을 경유하는 고속버스를 타면 멀미가 없는 이들도 1시간 가량 계속되는 구불구불한 도로에 좌절하게 된다. 수직과 수평의 선 일색인 도심에 스카이라인이 둥그스름하게 뭉게지기 시작하고 하늘의 여백이 많아지면 양구에 거의 도착 한 것이다.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평화로 5182.이곳에는 양구백자박물관이 있다.
“제가 출근하면 개관, 문을 닫으면 휴관이었죠.”
2006년 6월 문을 연 양구백자박물관에서 8년을 보낸 정두섭 관장은 말한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라 도예를 전공했던 그는 고향에 ‘백자박물관’이 건립된다는 기사를 본 후 사학과에 진학했다. 부족한 이론을 채워 박물관에서 일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양구백자 도자사에 대한 연구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시작한지 2개월 뒤, 그는 개관 한달을 앞둔 양구백자박물관에 특채로 임용됐다. “6개월간 혼자 일했어요. 제가 출근하면 개관, 문을 닫으면 휴관이었죠. 차근차근 필요한 사람들을 하나 둘 모으면서 구조를 다지게 됐어요.”
고려시대부터 20세기까지 약 6백여년이나 백자가 생산 돼 온 역사를 가진 지역. 강원도 양구 방산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관청에서 사용되는 자기를 제작하다가 왕실자기를 만드는 경기도 광주의 분원이 설치된 후에는 태토를 보내는 주요 공급지 중 한 곳이 되었다. 숙종실록에는 조선시대 왕실의 음식을 관장하던 사옹원이 ‘양구백토가 아니면 그릇이 몹시 거칠고 흠이 생긴다’고 한 기록이 남아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한 태토를 매장하고 있는 양구백토의 지난 역사를 짐작해 볼수 있다. 백토를 채굴하여 공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양구는 지역 수요의 생활자기를 제작했다. 1940년대까지도 요업이 지속되며 우리나라 근대도자 산업의 실상을 유추할 수 있는 유적지로도 중요한 이곳에 박물관이 설립된 이유다.
박물관의 일상
양구백자박물관은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양구백토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있는 현재성을 지닌 재료라는 것을 알리는 일에 더 집중하고 있다. 매해 기획전과 체험학습을 통해 양구백토로 만든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전문 연구자들과 협업해 연구를 이어간다. 2012년에는 서울대 미술대학과 양구백자와 백토를 연구하기 위한 프로그램 개발 등을 함께 추진해 나가기로 교류협약을 맺었다. 지난해 4월 박물관 내 양구백자연구소가 정식으로 문을 열고 서울대에서 파견연구원으로 이민수 작가가 입주해 개인 작업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양구 백토를 활용한 조형작업이나 실험들을 통해 양구백자의 새로운 잠재력을 확인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전시실, 문화상품판매숍, 수장고, 재료창고, 수비·쇄석·성형 공방, 전통가마 등 다양한 흥미요소를 포함한 공간들이 많지만, 한 번 박물관에 왔던 양구지역민들이 다시 방문하는 경우는 드물다. 한 번 보고 나면 ‘다 봤다’라는 생각인 것이다. 특히 양구에는 박수근 미술관, 이해인 문학관, 천문대, 통일관, 선사박물관같은 문화시설이 몰려있기 때문에 박물관의 주요 방문객들은 이 지역의 명소를 관광하기 위해 오는 체험객이 주다. 일회성 방문객들의 간헐적 방문으로 박물관 운영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지 걱정했더니 한 해 체험인원만 5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박물관 가마 앞에는 체험객들이 만들고 간 도자기들이 자연의 경치만큼이나 당연하게 줄지어 쌓여있다.도예체험에 쓰이는 흙들과 상품제작, 연구에 쓰이는 모든 양구백토의 수비 역시 박물관이 맡고 있는 일 가운데하나다. 박물관 개관 후 처음 3-4년간은 채굴한 흙을 분쇄만 해서 사용했지만 문헌 연구가 진행된 후 현재는 진주백토나 하동지방의 카올린을 섞어서 전통방식의 수비법으로 흙을 만들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양구백토가 사용될 때에는 항상 진주백토와 곤양수을토가 함께 사용됐다. 1200도에서 자화되는 양구백토는 그 이상의 온도에 서 휘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에 안정적인 자화를 위해 알루미나 함유량이 40퍼센트 이상인 진주백토를 섞어 뼈대의 역할을 보충해준 것이다. 진주백토는 1300도가 넘어야 자화가 시작되므로 흙의 흰 살결을 만들어주는 양구백토 60~70%와 진주백토 30~40%의 비율로 흙을 배합해 완성한다.
이렇게 양구에서 채굴하여 수비된 백토는 외부 반출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양구지역에 매장된 백토의 양을 추정만 할 뿐 정확하게 조사하지 않는 것은 자원보존의 목적도 있지만 마구잡이로 반출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역사성을 바탕으로 만든 희소가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현재 인근 지역에서 조선시대에 사용된 주요 원료인 카올린이 채굴 즉시 전량 일본으로 팔려나가고 있지만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도 이유였다. “관권만 있고 굴취허가만 받으면 누구나 채굴이 가능해요. 과거에 도자기 제작에 사용된 주 원료들이 무작위로 반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광산업자는 그것으로 돈을 벌기 때문에 사명감을 가질 이유가 없겠지요. 우리 역사가 담긴 자원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에요.”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1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