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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4월호 | 칼럼 ]

공예논고-바이올린 제작의 세계적인 거장 진창현 이야기(1)
  • 문옥배 한국공예산업연구소 전문위원
  • 등록 2014-10-31 10:27:10
  • 수정 2024-08-09 16: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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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논고

 

누가 명장을 꿈꾸는가

- 바이올린 제작의 세계적인 거장 진창현 이야기 (1)

  문옥배 한국공예산업연구소 전문위원, 전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진창현陳昌鉉:1929.10-2012.5은 널따란 모래밭 길을 지나면 은어떼가 노니는 감천甘川이 흐르는 곳, 경상북도 김천의 이천마을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되어 일제의 치하에 있을 때, 14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사숙으로 바이올린 제작의 1인자가 되었다. 그는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세계 최고의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의 신비스런 제작기술에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47세 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총 6개 부문 중 5개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세계에서 다섯 명밖에 없는 바이올린 ‘무감사無監査’ 제작자로 인정을 받아 세계 최고의 장인인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한 자리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는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조센징으로 살기를 고집하며, 오직 바이올린에만 일생을 걸었다. 포기를 모르는 끈질긴 집념과 욕망은 마침내 그를 ‘동양의 스트라디바리Stradivari’라는 세계적인 명장으로 만들어 내고 말았다. 

 

국제 콩쿠르 시상 식장에서 그는 졸고 있었다

1976년 12월, 미국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는 미국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는 ‘제2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가 열리고 있었다. 이 행사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에 대한 세공과 음향의 두 부문으로 나뉘어 총 여섯 개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거장을 가리는 큰 대회였다. 행사장인 미국 펜실베니아Pennsylvania대학 강당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작자들이 모두 초청되었고, 거기에는 진창현도 초대되어 직접 만든 악기를 출품하고 있었다. 진창현은 시상식이 거행될 대회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한 부문에도 해당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진창현은 오랜 여행의 피로 때문에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졸기 시작했다.

그가 잠에 빠져들어 꿈속을 한참 헤매고 있는 그 순간에 행사장의 무대에서는 콩쿠르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영예의 금상 수상자가 호명되고 있었다. 이때 진창현은 꿈속에서 일본의 도쿄東京 문화회관에서 개최는 바이올린 연주회의 콘서트마스터 자리에 앉아 연주회를 감상하고 있었다. 한 연주자의 연주가 끝나고 다음 연주자가 소개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지휘대를 바라보니 지휘자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비아바Biava씨였다. 그리고 진창현 자신은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일어나 박수갈채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아닌데 그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참으로 난감한 처지였다.

“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어요!” 아무리 크게 소리를 쳐도 박수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나는, 나는 할 수 없어요.” 그는 한참을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허우적거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이게 또 어인 일인가. 대회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수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얼떨결에 그도 따라 같이 박수를 쳤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도 시상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가는 이가 없었다. 행사장은 소란스러워졌고 청중들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미스터 췡쒠 찐! 미스터 챙휸 찐!” 단상에서는 사회자가 몇 번이고 수상자 이름을 반복해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잘 알아듣기 힘든 중국인의 이름 같기도 하고, 한국식 이름인 것도 같았다. 그는 아마도 동양에서 참가한 어떤 기술자인가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올라오지 않자, 사회자는 당황하며 다음 수상자인 비올라 부문의 수상자 이름을 불렀다. 

“The Winner is Mister 챙휸 찐!” 그런데 이번 수상자도 같은 이름인 것 같았다. 사회자가 또 계속 이름을 불러도 단상에 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박수소리는 계속되었다. 여전히 수상자가 나타나지 않자, 사회자는 다음 첼로 부문 수상자의 이름을 불렀다. 계속해서 또 같은 이름이었다.

“The Winner is Mister 챙휸 찐! Where is 챙휸 찐!” 그때서야 그는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챙휸 찐’은 자기 이름을 영문으로 부르는 미국식 발음이 아니던가. 사회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린 그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로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향해 더욱 열심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 속에 다리를 휘청거리며 단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 간간히 들리던 박수소리는 뇌성과 소나기처럼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게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그의 앞에는 꿈같은 현실이 실재로 펼쳐지고 있었다. 첫 번째 수상을 하고 돌아서려는 그를 자꾸 붙들며 계속 상을 안겨주는 바람에 무슨 상을 어떻게 탔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창현은 이 콩쿠르에서 총 여섯 개 부문 중 바이올린의 음향부문을 제외하고 무려 다섯 개 부문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자리로 돌아와 수상의 감격에 젖어 있으려니,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수도 없이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다니던 시절과, 밤을 지새우며 미친 듯이 바이올린을 만들던 시절들이 한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제일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상의 기쁨을 전하고 사흘 후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행사가 끝난 다음날 그는 일본의 자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한국의 고향땅에 누워 계신 어머니 묘소로 향했다. 어머니는 그가 이 수상을 하기 6개월 전에 돌아가셨다. 마중 나온 누이동생과 함께 묘소에 올라 나란히 어머니를 향해 절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가방에서 다섯 개의 금메달을 꺼내서 어머니의 묘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제가 큰 상을 받아 왔어요. 기쁘시죠? 어머니!” 그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의 묘소를 눈물로 참배하고서 금메달 2개를 어머니 묘소 앞에 묻었다. 

 


여섯 살에 바이올린을 처음 만나다

진창현. 그는 1929년에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김천군 이천마을(현재-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태촌리)이라는 곳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아래서 조선인이 한참 핍박을 받고 있던 때, 시골에서 태어난 창현이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만난 것은 어느 날 두꺼비기름을 팔러 마을을 찾아온 떠돌이 약장수에게서였다. 손님을 끌기 위해 약장수가 켜대는 바이올린 소리의 신비함에 매료되어 하루 종일 약장수 뒤만 따라다녔다. 이때 창현은 6살박이 어린 소년이었다. 

그 때 약장수는 향로장수라고도 불렀는데, 효과도 없는 가짜 약을 파는 사기꾼이라는 이유로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창현은 이런 약장수가 올 때만을 늘 기다렸다. 대체로 보통 사람들은 소리가 좋은가 보다 하고 그냥 지나치는데, 창현은 어린 나이에도 바이올린 소리에 매료된 것부터가 타고난 인연인 것 같았다. 훗날, 이것이 나와 바이올린의 첫사랑 같은 만남이었다고 진창현은 회고했다.

그 후 소학교 4학년 때, 창현의 집으로 하숙을 온 아이카와 기쿠에相川喜久衛 라는 일본인 선생님이 가져온 바이올린이 두 번째 인연이었다. 창현은 선생님 방에서 바이올린의 연주를 듣기도 하고 직접 만지기도 하였다. 아이카와 선생님은 학교에서 퇴근하고 돌아오면 저녁을 먹은 후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바이올린을 들고 마을 앞 감천(경북 김천시를 북동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강) 강가로 나가 바이올린을 켜곤 하였다. 

선생님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창현에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창현은 ‘사쿠라(벚꽃)’와 ‘고조노 츠키(황성의 달)’라는 곡도 이때 배웠다. 이렇게 아이카와 선생님과의 만남은 창현에게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고, 바이올린 인생을 결정짓는 시작점이 된 것이었다. 아이카와 선생님은 초라한 농촌 마을에 찾아와 바이올린으로 어린 창현에게 한줄기 빛을 심어준 특별한 사람이었다. 


진창현 명장이 바이올린 제작시 사용한 도구들


14살에 현해탄을 건너다

창현이 김천중학교에 다닐 때에 창현의 아버지진재기 陳在基는 폭음으로 간이 손상되어 빚더미만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창현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마침 일본에 살고 있는 이복형들로부터 일본의 야간 중학교는 학비가 공짜나 다름없이 매우 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꿈 많은 소년 창현은 중학교 2학년이 되자 형들의 말을 믿고 야간 학교라도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1943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행을 결심하고 홀로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에 건너간 창현은 트럭 운전을 하는 큰형을 따라 조수역할을 하면서 후쿠오카福岡에서 야간 중학교를 다녔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나가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석탄 운반 작업을 하고 비행기 부품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학교는 1주일에 세 번 정도 나갔다. 어떤 때는 분뇨 수레를 끌고, 파친코 가게에서 청소를 하고, 고철장수 등 힘겹고 고된 노동을 하며 학업에 정진했다. 

1945년 창현이 16살일 때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창현은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고향에 가 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창현은 힘들기는 해도 여기에는 미래로 가는 빠른 길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항구에서 하루 종일 석탄을 나르고 저녁에는 학교에 나갔다. 

미군 불도저를 따라다니다가 배운 영어 실력으로 미군을 상대로 린타쿠인력거를 끌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요코하마橫浜에 가서 그 일을 시작했다. 워낙 몸이 허약해서 오르막길에서는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돈벌이에 매달려야 했다. 그래도 영어를 조금하는 바람에 미군들 사이에 인기가 좋아서 좀 더 많은 돈을 벌 수가 있었다.

이렇게 몇 년간 인력거를 끌면서 돈이 모이자 창현은 교사가 될 결심을 하고 메이지明治대학 영문과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이때가 1951년 창현의 나이 22세가 되는 해였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창현은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 3학년 때에 교직과정을 이수해 교사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교사 자격을 따자마자 담당 교수에게서 청천병력 같은 말을 듣고 앞이 깜깜했다. 

“자네는 국적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고등학교 영어교사 자격증을 땄다고 해도 채용이 되지 않아, 그러니까 그 자격증은 쓸모가 없는 거야.” 

죽을힘을 다하여 배운 공부가 이렇게 허사가 되자 창현은 실의에 빠졌다. 결국 교사의 꿈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허탈감과 상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참으로 앞날이 암담했다.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다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아무런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창현은 오전 수업을 마치고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에 어느 강당 앞에서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강연회 간판을 보게 된다. 거기서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글씨에 끌려 그 강연을 듣게 되는데, 그 강연회는 도쿄東京대학의 생산기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이토가와 히데오糸川英夫’ 교수가 세계 최고의 명기로 불리는 바이올린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의 소리는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그 소리는 신비이며,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인간이 로케트를 만들어 달로 쏘아 보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제작 기술은 20세기 최첨단으로도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이유로는 300년 전과 같은 재질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제작 기술을 제자는 물론이고 자식에게 조차도 전수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대학 4학년인 창현은 그 ‘불가능’이라는 말에 온몸에 전율을 느끼는 큰 자극을 받았다. 그래,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에 도전해 보자.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에 대한 도전이라면 일본도 그 누구도 나를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이 일은 내 일생을 걸고 착수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가야할 길은 오직 이 길뿐이라고 마음속에 굳은 결심을 하였다.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결심이 서자, 그 길로 대학 앞의 시모쿠라石橋 악기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가 산 바이올린 스즈키 4호는 핸드메이드가 아니고 기계로 찍어낸 바이올린이었다.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서서히 음감을 채득해 나갔다. 바이올린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는 창현의 말에 악기상은 이런 말을 해줬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면 모르지만, 그 걸로 밥 먹고 살기는 힘들 걸세. 바이올린 장인은 꽤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이름이 알려지고 성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네. 나머지는 모두 생활하기도 어려운 형편일 걸세.” 창현의 의지가 굳은 것을 알고 그 악기상은 장인 명부를 보여 주었다. 그 악기점에는 바이올린 제작자 협회의 회원 명부가 있었는데, 엄청난 제작자들이 있음을 그때 알았다. 

 

조선인이라는 벽은 너무도 높았다

그 다음부터 창현은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이타바시板橋의 오오야마大山에 사는 85세의 장인이었다. 시모쿠라 악기 상점에서 선생님께 찾아가 보라고 추천을 해줘서 왔다고 했다. 사실은 악기를 사러 온 것이 아니고 제자가 되어 바이올린 제작을 배우겠다는 말에 그 나이 든 장인은 매우 반가워하였다. 

“이제 나는 얼마 남지 않았어. 자네가 제자가 되어주면 도구들과 재료를 모두 자네에게 주지. 괜찮다면 내 제자가 되어 주게나, 그런데 자네 고향은 어디인가?” 창현은 너무나 기뻐서 솔직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태어난 곳 말입니까? 태어난 곳은 조선의 김천이라는 곳입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미소가 가득 번져 있던 노인의 얼굴색이 갑자기 흐려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구들을 다 주겠다고, 이곳에서 함께 지내면서 일을 배워도 좋다고 흔쾌히 말하던 노인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나는 이제 너무 늙어서, 제자를 받아들이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네, 미안하네.” 노인은 금세 말을 바꾸었다. 이후 이런 일은 다른 바이올린 장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그는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했다. 단지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거절당한 것이었다. 

1955년 26살에 창현은 마침내 대학을 졸업했고, 취직자리가 없어서 파친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가끔 요코하마橫浜를 찾아가 ‘하와이’라는 다방에서 ‘지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창현은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이 곡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때마침 아사히신문朝日新聞 3면의 기사를 보고 ‘바로 이거야!’하며 속으로 환성을 질렀다. 한 농부가 신슈信州 나가노현長野縣 나카노中野시에서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문에는 이 사람에 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 사람은 징병되어 하얼빈으로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소총을 메고 거리를 걷다가 아름다운 음색이 귓속을 파고들어 발길을 멈추었다. 소총을 맨 채로 소리 나는 집을 방문하자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유태계 러시아인은 무장한 병사가 방문하자 혹시나 체포당하는 것은 아닌지 깜짝 놀라면서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그가 떨면서 내민 바이올린은 세계적인 명기로 알려져 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였다. 그 바이올린은 러시아 황제의 궁전에서 사용하였던 귀족의 바이올린이었다. 그 이후 그 병사는 그 집을 자주방문하면서 그 바이올린 형태를 종이에 복사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 복사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바탕으로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창현은 하늘로 뛰어오를 듯이 기뻤다. 창현은 이런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나를 거절하지 않겠지 생각했다. 그날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배낭과 침낭을 짊어진 채 나가노로 향했다. 정말 그 사람은 농촌에서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창현은 다시 또 다른 바이올린 장인을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마쓰모토松本지역의 아사히쵸旭町에 사는 ‘스즈키시로鈴本四郞’라는 장인을 찾아갔다.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은 어딜 가나 거절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그 장인은 지금까지의 사정을 듣고 안됐다고 생각했는지 창현에게 공작용 칼과 작은 대패를 한 개씩 내주었다. 그리고 그는 창현에게 기소 후쿠시마木曾福島에 있는 스즈키鈴木 바이올린 공장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고맙게도 그 장인은 소개장도 써 주었다. 

창현은 기소의 스즈키 공장으로 가기 전에 신슈 근처를 유랑하다가 마지막으로 공장 몇 군데를 더 찾아가 봤다. 역시나 모두 허사였다.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는 정말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 본고는 진창현의 저서 “세계의 명장 진창현”과 “천상의 바이올린”등에서 발췌하여 엮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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