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13. ~9. 11. 라니서울
지극한 비움이 일으키는 여백의 파장
배주은은 느릿한 율동감이 느껴지는 비정형의 덩어리와 보름달처럼 완전무결한 형상 사이를 오가며, 단순한 연필 드로잉으로 복잡한 삶의 무늬를 그려낸다. 조성현은 사람의 얼굴을 닮은 순백색의 달항아리를 바탕으로 그만의 섬세한 변주를 이어가며, 무른 성질인 백토를 단단한 사유의 구체로 바꿔놓는다. 인간의 순수한 마음을 투영한 듯 간결하고 담담한 이들의 작품은 무언가를 채우고 주장하기보다, 비우고 침묵하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배주은 作
검은 덩어리와 흰 구체, 그 담백한 형상에 깃든 무위의 기운이 내면 깊은 곳을 건드리며 우리 안의 빛과 어둠을 고요히 응시하게 한다. 두 작가의 둥근 우주가 일식처럼 겹쳐지는 장면을 목도하는 것 또한 이번 전시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가장 낮은 재료인 ‘흙’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 ‘달’로 은유 되는 둥그스름한 형태를 다룬다는 점, 음양의 색인 ‘흑’과 ‘백’을 탐구한다는 점, 한눈팔지 않고 하나의 작업에 몰두하는 구도적 태도 등이 그렇다. 이들의 공명으로 확장된 여백이 개개인의 심연을 비추고, 그 잔잔한 떨림이 자극으로 무뎌진 삶의 통점을 깨워낸다.
허리선 위가 풍만하고 하단이 살짝 날렵한 조성현의 달항아리는 ‘이러저러한 비율의 기형을 구현하겠다’는 야심 없이 작가가 수년간 자기만의 선으로 기울어진 끝에 도달한 미의식의 결과이다. 섬세한 곡선에 유백색의 온기가 더해져 언뜻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 그것은 천성적으로 인간에게 내재한 진실한 면모인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흙의 우둘투둘한 질감과 소성시의 이지러짐을 살려 불완전 함의 미학을 뽐내는 여느 달항아리와 달리 조성현의 그것은 티 없이 매끈한 표면과 얇은 두께를 앞세우는 것이 특징이다. 그 흠결 없는 구체에서 우리는 장인의 자의식을 비워낸 도공의 여백을 본다. 존재를 지우고 장소를 열어젖히는 ‘비움’의 힘을 느낀다. 그렇다고 조성현에게 고집스러운 도공의 면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양손에 담뿍 감기는 소형 달항아리를 비롯해 흑백이 쨍한 대비를 이루는 연리문 기법이나 은은한 금박 장식을 적용한 그의 최근 작업은 우리에게 익숙한 달항아리의 문법을 재치 있게 뒤집는다.
깨진 도자기 조각이 즐비한 그의 흙 공방은 조선 시대 도공의 치열한 일터를 떠오르게 한다. 쉽게 물러지는 백토의 비위를 맞추며 형태를 잡고 높이를 쌓는 사이, 건조된 달항아리는 상온에서, 혹은 가마에서 예사로 갈라지고 부서지며 도예가의 속을 썩인다. 그럼에도 그는 선과 면을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덜어내고 비워내며 단순함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물레로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은 달항아리’라는 믿음 아래, 빼고 또 빼는 작업을 반복하며 물질적 솜씨인 ‘기술’을 정신과 기술이 결합한 ‘기예’의 경지로 덤덤히 끌어올린다.
왼) 조성현 「연리문(무광)」 2024 오) 조성현 「Binary 0&1(유광)」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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