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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4월호 | 칼럼/학술 ]

미술시평-미술에 인문학적 사고를 입히는 이유
  • 안재영 예술철학박사. 국립 광주교육대학교 미술교육학과 교수
  • 등록 2014-10-31 10:22:53
  • 수정 2024-11-18 17: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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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Story

 

미술시평


미술에 인문학적 사고를 입히는 이유

안재영 예술철학박사. 국립 광주교육대학교 미술교육학과 교수


페르낭 레제는 “색은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평자가 글을 쓰다보면 감성적일 수도 있고 논리적일 때도 있다. 글 한 장 제대로 쓰는 것이 힘겹지만 글은 생명력이 길고 제대로 전달 할 수 있다는 점이 상쾌하다. 사회적 위치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성형하는 작가처럼 때로는 고통스럽게 글을 써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렇게나 글을 쓴다고 해서 유익한 작용이 일어나지도 않고, 잘 쓰려고 노력을 하지 않거나, 그저 풀려나오는 대로 생각을 적는 정도라면 무엇인가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글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하게 만들고 답은 글에서 찾도록 주어지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고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글 쓰는 능력을 기름으로써 지금 나에게 주어진 문제를, 작품의 진로를,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있다. 글을 쓰기 위해 의무적으로 읽어가고 결국 이러한 글쓰기도 평자의 잡다한 사고에서 배출 된다는 것이다. 이 잡다한 사고들인 문학, 철학, 역사, 예술 등을 고급스럽게 한마디로 정의하면 인문학이다.

 

방송에 자주 나오는 최재천崔在天교수는 동물행동학자지만 그의 전공에 대한 왕성한 글쓰기 활동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행동적인 작업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간다. 여기서 우린 생각해 보아야할 점이 있다. 무언가를 인문적으로 안다고 해서 잘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는 것을 쓰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조건의 인문학의 사고만이 답은 아니다. 논설이나 칼럼은 일반 뉴스의 글과는 달리 글을 쓰는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 주관이 분명히 개입된다. 글의 문체에서도 일반 뉴스의 글과는 달리 평가적인 특성이 드러난다. 이것은 판단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각도의 인문학적 지식들을 압축해서 풀어내는 힘과 독자성이 보유돼야 한다는 점이다.

본고의 요지는 미술에 인문학적 사고를 입히는 이유다. 미술작품 하나를 자리에 두고 인문학적으로 작품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미술학과 관련된 인문학이라고 해서 고전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그것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하고 풀어보자는 논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고자 한다.

 

먼저 오늘날 인문학이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은 감성感性의 시대이다. 평자는 재작년再昨年 작고作故한 애플의 창립자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가 자신의 일에 인문학적 요소를 입힌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의 명언 중에 “가슴을 울리는 결과를 내는 것은 인문학과 결합된 기술임을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제품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고 인문학적 요소를 가미해 예술품을 만든다고 시사했던 기억이 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가격이 다소 비싸도 개의치 않는다. 그냥 좋아서, 마음에 들어서, 모양이 예뻐서 등의 느낌으로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제는 제품을 작품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는 것이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인문학이 우리 시대의 대안으로 대두 된 것은 사람들의 욕구가 변했고 시대적 흐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미술도 장르가 무너지고 통합되고 또 다시 새로운 장르가 대두 되듯, 타 장르 역시 마찬가지다. 팝과 오페라가 결합된 팝페라popera가 있고 헤비메탈heavy metal과 오케스트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일반적인 자동차의 성능보다는 디자인과 색상을 중요하게 보는 관점이 많아졌고, 스마트폰smart phone도 감성에 따라 시판 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이 감성적으로 보는 현상들은 지속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감성은 과연 무엇인가? 요즘 사회는 인문학을 자주 거론하는데 쉽게 말해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이다. 사실 인문학은 광범위하고 정해진 답도 없다. 인문학 분야라 하면 철학과 문학, 역사, 예술학, 고고학, 신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가 포함된다. 인문학적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찾을 수 있고, 여러 상황의 측면과 단면을 보이고 들여다 볼 수 있는 눈높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즉, 예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기존의 것을 다른 분야와 연결시키고 삶에 대한 여러 다른 통찰력을 보여준다. 인문학은 미술에서도 시대의 변화 흐름에 따라서 올바른 방향의 역할을 해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문학은 답이 무엇인지 직접 알려 주지 않는다. 사람마다 삶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하고 그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는 어떤 현상에 대해 사회적 운동과 사회적 변화를 주고, 사회적 구조를 가지고 사회적 지속성을 가미해 시간을 두고, 반복되고 회전하기 때문에 더욱 난감하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로 오늘날 박근혜 정부의 미래창조과학부도 생겨난 것이다.


 


캠퍼스는 신의 창조 행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인가 

그렇다면 이제는 어느 분야든 앞을 예측하기 어렵고 불안하다. 종래의 여러 틀이 무너지고 새로운 길이나 방향은 아직 이것이라고 확정된 것이 거의 없다. 이른바 선진국에서 수 세기나 수 십 년 전에 내놓았던 방식이나 길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21세기는 융합의 시대라고 한다.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복잡하고 다면적인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바로 학문 간의 융합이다. 어찌 보면 융합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근대과학이 성립되기 전의 학문은 모두 철학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 됐다. 이후 합리성과 경험적 증거를 내세우는 과학으로 분리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 간의 융합과 분리는 필요에 따라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예를 들어 과거 초등학교 교과목을 보면 미술, 음악, 체육, 과학, 자연 등으로 분리 되었지만 요즘은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로 통합교과로 묶어 공부한다. 또한 이것은 빠른 속도로 계속 변천하고 진행 중이다. 그래서 오늘의 답이 내일의 답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찾아 가며 인문학이란 옷을 입혀야 한다. 작가도 기능적인 요소 한 가지를 가지고 승부하는 장인정신을 갖는 작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적 사명감과 의식이 투철한 작가, 과거의 고전적인 작가, 개념적인 작가, 비엔날레적인 작가 등 다양하다. 

 

지금의 미술은 일반인들을 위해 최소한의 설명이 필요하다. 일반인들은 서양화, 동양화, 공예, 서예 정도의 미술만 접하다 큰 비엔날레를 가면 첨단매체를 만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하다. 장인정신을 가지고 홀로 손수 하는 작가도 있지만 비엔날레적인 작가는 스케일 때문에 스텝이 필요하다. 즉 붓 대신 스프레이를 쓰는 사람과 손이 모자라 기계 대신 스텝을 데리고 자신의 생각을 그려내는 사람들처럼, 이제는 작업에 대한 다양한 이유와 해석이 필요하다. 하나의 작품이 한국에서 훌륭하고 우수하다고 평을 받지만 외국이나 타 지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같은 작가의 그림을 바라보고도 여러 해석이 난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역사나 배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짐을 가늠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문학적 요소의 영향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작가 이우환李禹煥의 작품이 해외에서는 설치로 유명하고 국내에서는 회화로 유명하다.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은 미술평론가로서 조각가로서 창작활동을 잘 해냈다. 이처럼 지금은 융합적이고 인문학적인 사고의 전환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시대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제는 하나의 이론만으로 예술을 모두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디자인의 경우 제품만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도 사회도 디자인 한다. 하나의 측면에 대해 설명하면 그것이 때로는 해답이 되고 핵심이 되지만, 반대의 해석으로 설명되지 못할 부분이 많아지기도 한다. 


 

       프랑스 만화가 필리퐁(Philipon)의 도예


이제는 예술가의 고통이, 상대방의 고통이 내 고통처럼 모아져 제도화 되어야 한다. 그래서 비평이 필요하다. 비평을 통해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논객의 의무라 생각된다.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미술기획자, 행정가, 이론가, 평론가 등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 단순히 직업적 차원의 문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교육부에 등록된 상황을 보면 대학교가 200개교가 넘고, 전문대학이 200여 개교가 넘는다. 그 외 대학원 등도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며 제도권을 형성하고 있다. 년도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미술대학 졸업생이 1년에 만 명에 육박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1년에 만 명 정도 실용음악과 학생이 배출된다. 그런데 시장은 아이돌idol을 원한다. 히트hit까지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한번쯤 대중에게 곡을 들려 줄 수 있는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서양화를 전공하거나 순수미술을 전공해서 애니메이션animation이나 미술치료 등의 분야를 미리 개척한 미술인들은 그래도 수월하다. 무언가의 상황을 읽어내는 훈련을 한 사람들이다. 이제는 행정적인 탓하는 것보다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막연히 따라오는 미술이 아니라 어느 장소에 있어도 스스로 상황에 따라 해석해 내고,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며 융합적인 모드mode도 잘 풀고 조립 할 수 있는 능력이 미술인에게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Verdi가 셰익스피어Shakespeare작품에 왜 손을 댔을까. 모든 예술은 연관선상에 있고 서로 통하기 때문이지만 그는 문학文學을 통해 시를 통해 인문학적 요소를 찾았을 것이다.

 

미술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위해 인문학의 옷을 입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독자성이 있어야 한다. 즉, 다른 것과 구별되는 혼자만의 독특한 성질과 자기 존재의 절대적인 독립성인 독자성獨自性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독자성은 어느 정도 거리를 필요로 한다. 인문학은 사고의 힘과 통찰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부분이다. 한 예로 도쿄대東京大, 게이오대, 와세다대 등은 일본 최고의 명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교토대는 지방에 있지만 지방 특유의 여유와 성공을 위한 시간, 보람, 낙오와 실패 그리고 포용을 지니고 있다. 또한 교수가 논문을 내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여유와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독자성이 있어 일본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를 7명이나 배출됐다. 교토대가 가진 인문학적이고 타 대학과의 구별되는 사고의 방식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우수한 의학, 과학, 미술은 단순히 공학적이고 과학적이고 기술적으로만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생각하며 인문학적 시각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독자성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개념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즐거움을 주는 다이나믹한 작품들도 중요하고 그러면서도 예술은 자기목적과 전달성이 분명이 자리하고 있어야 감각적 집합을 창조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 활동하고 종사 하는 미술작가들 입장만 놓고 미술에 인문학의 옷을 입히는 것은 아니다. 초·중·고의 청소년은 현재의 나보다 현대를 산다. 그래서 미술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인문학이 더욱 필요하다. 작년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자료를 참조로 예술교육 관련 사업을 살펴보면 예술교육 선도학교가 77개교, 예술중점 학교가 23개교, 중학생 예술동아리가 100여개, 예술강사 지원 사업을 실행하는 곳이 5700여 개교이다. 보통 교육과학기술부와 문화관광부 지원 사업의 공동으로 예술교육이 크게 확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예술교육 사업이 학생들의 자존감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협력, 소질 개발과 진로 모색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취지 아래 시행하고 있다. 또한 2012년 교과부 초·중등 예술교육 활성화 사업 개요를 보면 문화예술 소외 취약지역과 학교 폭력 발생지역 학교 등을 대상으로 다양한 예술교육 기회를 제공해 인성 함양과 예술적 소양을 개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융합 시대이다. 융합 시대를 선도하는 인재는 과학기술 및 지식뿐만 아니라 상상력과 예술적 감성까지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융합적 사고를 배양하기 위해 과학, 기술, 공학, 예술, 수학을 융합한 창의적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교육과학기술부는 2011년부터 창의 인재와 선진과학기술이라는 취지로 예술융합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다양한 창작 섭렵능력을 묻는다면 

창의적 미술과 감성을 위한 미술도 중요 하지만, 미술과 미술교육이 청소년 학생들의 삶과 폭력 예방에도 어떤 점이 도움 되고 있는지를 인문학적으로 헤아려야 한다. 단순히 미술적 감성이 폭력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미술적 이해와 사고가 필요하고 학생에 따라서 맞는 올바른 미술방법을 적용해 보고 기획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은 청소년 나름대로 접근 하는 방법과 사고하는 방법이 다양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는 미술이 아름다운 것만을 향한 즉, 심미적인 가치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미술이 과거에는 지적이고 미적개발 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이제는 폭력과 기타 등등 인성계발에 치중 될 수도 있다. 예술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이다. 서두에 거론한 것처럼 현대는 감성의 시대이고 지금의 사람들은 과거와 같이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이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것들이 자리 잡고 있다. 단순하지도 않고 이성적으로만 말 할 수도 없고 마치 복잡한 블랙박스 같은 것이 머리와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이것도 미술이다.”라는 인문학적 가치를 풀어주고 규정짓는 것이 미술이 되었다. 미술은 이제 미적체험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정신적인부분, 즉 휴머니티에 가까워졌다. 단순한 미술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관련지어 인문학적 입장에서 보는 미술관 안에서 만의 미술이 아닌 미술관 밖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규정해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한 미적개념만을 요구하는 미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미술에 접근하고, 예방차원에서 청소년에게 인문학의 옷을 입힐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철학에서는 첫 느낌을 직각直覺이라고 한다. 미술 실기나, 글 쓰기나, 작업도 창조다. 모든 미술인들이 직각을 키울 필요가 있다. 단, 요행을 부려서는 안 된다. 호흡을 길게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스스로 점검하고 조절하는 메타meta학습 시기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꽃다발, 화분으로는 안 되고 숲속에 핀 꽃처럼 다양하게 향유해서 인문학적 요소를 찾아 내 것을 정립해나가는 인문학이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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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안재영은 성균관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와 (사)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회원이며, 1998년 월간 한국미술 평론 공모에 당선하고 2011년 미술과 인문학의 해후와 전환으로 미술비평상을(서울아트포럼공모) 수상했다. 현재 국립광주교육대학교 미술교육학과 학과장과 중국요녕미술직업대학 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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