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조선시대 양구백토의 생산과 운송에 관한연구(1)
정두섭 양구백자박물관 관장
강원도 양구의 백토는 조선시대 분원에서 사용하던 원료의 주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양구지역에서는 1년에 500~550석石의 백토를 분원이 해체되는 시기까지 꾸준히 공납하였다. 하지만 백토를 세는 단위인 ‘석石’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본 고는 백토의 1석石은 9두斗이고, 1두斗는 16kg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접근한 연구 결과이다.
양구백토의 채굴은 담당 읍인 양구의 민호民戶 500호가 역사에 동원되었고, 백토의 정토正土 선별과 운송은 춘천ㆍ홍천ㆍ인제ㆍ낭천 등에서 담당하였다. 동원된 인력과 운송량은 각 지역별 인구수와 비례되었다. 운송은 육로운송과 수로운송으로 구분되는데, 제 시기에 납입하지 못한 경우와 가뭄이 지속된 경우에 육로로 운송되는 경우가 있고, 그 외에는 일반적으로 수로 운송이 주가 되었다. 육로운송의 경우, 운송에 관계된 읍의 역마驛馬와 사람이 동원되어 등짐으로 300리 정도의 역로를 3일 정도의 시간으로 분원에 운송된 것으로 보인다.
수로운송은 경국대전에 나타나 있는 대ㆍ중ㆍ소선의 규모보다 작은 지토선이나 경강사선을 이용하였다. 배 한척에 25석, 즉 3.6톤 정도를 해당 읍이 할당량만큼 나누어 싣고, 봄ㆍ가을 수량이 풍부한 시기를 선택하여 수운을 시행하였다. 수운은 약 4일 정도가 소요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하천상황과 적재량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본다면 당시 양구백토를 운송했던 배의 규모도 파악되리라 본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필요한 자기를 제작하기 위하여 사옹원이 직접 왕실자기를 제작하는 관요를 운영하였다. 이는 1467년 분원으로 설치되었는데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는 백자를 제작하였다. 관요는 10년 주기로 가마번조를 위한 땔감을 확보하기 위하여 옮겨 다녔고, 1752년에 이르러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게 된다.
금악리 수입천변 백토
이처럼 가마번조에 필요한 땔감은 백자 제작에 꼭 필요한 필수여건 중의 하나이고, 이에 못지않게 백자 제작 원료도 상당히 중요하였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다양한 지역에서 산출되는 원료를 공급 받아서 백자를 제작하였다. 문헌에 기록된 백토의 공급지를 살펴보면 웅천, 이천, 사현, 충청도, 양근, 원주, 서산, 경주, 선천, 진주, 양구, 충주, 봉산, 하동, 곤양, 가평 등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문헌에는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평안도, 황해도 등의 여러 지역이 등장한다. 이 중에서 특히 양구지역은 백토의 중요한 원료 산지로 분원 설치 이후 지속적으로 관요백자 제작의 주원료를 공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역사학 분야에서 백토에 대한 국내 연구는 아직 미비한 상태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발표된 백토에 관한 연구는 2009년과 2010에 발표된 이미숙의 연구가 전부이다. 2009년의 연구는 양구백토의 성분을 통한 특징과 분원 수급에 대해 간략히 다루었고, 2010년의 연구는 문헌 사료에 나오는 백토의 수급지를 살펴본 것이다. 한편 최종일은 「북한강 수운연구」에서 백토의 수송을 다루었으나 간략한 사료분석에 그치고 있다.
이처럼 현재까지는 백자 제작의 원료인 백토가 채굴되어 운송되는 과정이 집중적으로 연구된 바는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생산량, 또는 운송량에 대한 분석도 정확한 단위에 근거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도량형의 기준으로 해석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양구지역을 중심으로 백토의 생산량에 대한 문헌 분석과 해석으로 백토의 채굴과 정토, 그리고 운송과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백자 ´장長´명접시편 - 금악리 1호
백자철화 ´순順´명접시편-장평리6호
양구백토의 생산 - 백토의 채굴
조선시대 백토 채굴량의 기준은 모두 ‘석石’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석石’에 대한 기준부터 정리해야 백토의 채굴량과 운송량에 대한 이해의 정립이 될 수 있다. 현재까지 흙의 양을 재는 ‘석石’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없이 일반적인 도량 기준으로 계산되고 있다. 하지만 사료에 의한 ‘석石’의 개념을 파악하지 않고 일반적인 기준으로 해석하였을 때는 오류들이 발생된다.
경국대전에 용량을 재는 제도는 10작勺을 1합合으로 10합合을 1승升로, 10승升을 1두斗로, 15두斗를 소곡평석小斛平石으로, 20두斗를 대곡전석大斛全石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흙도 이와 같은 부피로 계산하였을 경우에 몇 가지 의문이 발생된다. 대표적인 한 예로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양구의 백토가 춘천ㆍ홍천ㆍ낭천ㆍ인제ㆍ양구에서 배 한척에 25석을 실어 봄ㆍ가을로 나누어 분원으로 운송하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1석石을 15두斗로 계산했을 때 375두斗가 되고, 20두斗로 계산했을 때는 500두斗가 된다. 이런 계산으로 적용해 보았을 때 흙을 운송한 배가 거대해야 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양구에서 시작되는 뱃길은 수심이 그리 깊지 않아서 배의 규모 또한 크지가 않았다. 따라서 석에 대한 개념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흙의 단위에 대해서는 승정원일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된 두 가지 예 이외에 아직 더 확인된 것은 없지만 백토의 단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첫 번째는 숙종 14년(1688)의 기록이다.
사옹원 관원 송규렴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어 말하기를, “혼전의 제기와 산릉에 진상하는 명기 등의 기물은 지금 별도로 번조해야 하나 연례에 따라 자기를 번조하는 진주와 양구 등의 백토는 본래 미진한데 선천과 경주의 토질과 비교해보면 우열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제기와 명기는 막중하므로 이 품질보다 못한 흙으로써는 결코 정교하게 번조하기 어려우니 선천과 경주의 두 읍에서 백토를 각 2석씩 갑인년(1674)과 계해년(1683)의 전례의 의거하여 본도로 하여금 굴취하고 수비하여 9두斗를 1석石으로 삼아 속히 수송할 뜻으로 이문하여 알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였다. 전교하기를, “윤허한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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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기록은 숙종 27년(1701)의 기록이다.
사옹원 관원 이사영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어 말하기를, “혼전의 제기 및 산릉의 제기가 지금 마땅한 시기에 이르러 별도로 <결락> 하고 올해 <결락> 양구의 흙이 제기를 번조하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매번 선천과 경주 등의 흙으로 굴취하여 번조하였습니다. 지금 또한 갑인년(1674)의 예에 의거하여 두 읍의 백토 각 20석을 수비하고 9두斗를 1석石으로 작정하여 밤낮으로 육로를 따라 운송하여 올려 보낼 뜻으로 경상도와 평안도 등의 감사에게 이문하여 알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였다. 전교하기를, “윤허한다”하였다.
위에서 본 두 기록에서 나타난 것처럼 당시에 백토는 ‘9두斗’를 ‘1석石’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헌에 정확히 숫자로 규정되어 있듯이 백토의 1석石은 9두斗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리라 판단된다.
양구백토의 채굴이 확인된 최초의 기록은 서암사지로 상납하는 백토의 굴취작업을 당시의 임금인 선조에게 상소하여 용전을 주고 사역케했다는 기록이다. 이후에도 여러 사료에서 꾸준히 양구백토의 채굴과 상납에 대해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분원 민영화 이후에도 지속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양구지역의 백토가 채굴된 장소가 어디인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방산면 현리 지역에서 확인된 폐백토더미를 통해서 분원에서 사용되었던 백토가 채굴되었던 지역으로 추정될 뿐이다.
백토 채굴지로는 현재 양구군 방산면 일대로만 한정하여 인식되고 있다. 려말선초의 공납백자편과 확인된 백토더미 등을 종합적으로 미루어 볼 때 방산지역에서 백토가 채굴되었을 가능성은 크다. 하지만 방산면에서 선소로 옮겨가는 거리는 험한 오미령을 넘어 제법 먼 곳으로 옮겨가야만 하는 번거로움과 어려움이 있다.
현재 확인된 가마터 중 양구읍 상무룡리 일대에도 9기의 가마터가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그 지역은 이미 수몰되어 있는 지역이어서 자세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으나 여러 개의 가마터가 확인되었고, 일부 가마터에서는 조선초기의 백자편도 확인된다. 이들 가마터에서는 멀지 않은 곳에 백토 채굴지를 두고, 백토를 생산하여 작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상무룡리 9호 가마 전방 20m 지점에서도 백토가 확인되기도 한다. 또한 담수되어 있는 상무룡리 일대를 배를 이용하여 이동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강가에서 하얀 도석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분원운송 백토의 채굴지역을 방산면으로 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러 가지 운송 여건을 보았을 때에도 상무룡리 일대에서 양질의 백토가 채굴되었다면 보다 쉽게 선소로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원으로 운송된 백토의 채굴지는 양구군 방산면을 비롯해 양구읍 상무룡리도 대상지로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래의 표는 사료의 기록 중에 채굴량과 채굴시기, 그리고 운반시기가 나타난 것을 정리한 것이다. 단편적으로나마 당시의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출 전 |
연도 |
채굴량 |
채굴시기 |
운반시기 |
승정원일기숙종 20년 2월 10일 |
1694 |
200석 추가 굴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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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숙종 22년 7월 13일 |
1696 |
500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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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숙종 22년 9월 6일 |
1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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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 |
봄 |
승정원일기숙종 23년 7월 26일 |
16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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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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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숙종 24년 7월 14일 |
1698 |
500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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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숙종 31년 3월 6일 |
1704 |
20석(진연 시 별번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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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숙종 33년 9월 11일 |
1707 |
200석 굴취, 300석 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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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숙종 37년 7월 27일 |
1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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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금년 봄 상납 |
승정원일기숙종 39년 7월 20일 |
1713 |
500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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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숙종 39년 7월 20일 |
1713 |
500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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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숙종 40년 8월 23일 |
1714 |
500석 |
수개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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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영조 8년 4월 22일 |
1732 |
500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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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가을 |
승정원일기영조 11년 1월 13일 |
1735 |
500석 |
|
봄, 가을 |
승정원일기영조 12년 9월 15일 |
1736 |
500석 |
매년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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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영조 15년 9월 26일 |
1739 |
500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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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영조 17년 6월 4일 |
1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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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7월내, 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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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 행장 영조 17년 6월 |
1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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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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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영조 17년 9월 11일 |
1741 |
500석 |
초 가을 |
가을 수확 후 |
승정원일기영조 19년 1월 18일 |
1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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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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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정조 19년 8월 18일 |
1743 |
550석, 이후 40석 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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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에서 나타나듯이 년 간 채굴량은 500~550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확인한 1석을 144kg으로 환산하면 약 72~79.2톤에 이른다. 이 흙을 캐기 위해서는 양구의 민호民戶 5백호가 동원된다. 한 호戶에 1명씩이 동원된다 하여도 500명 정도가 백토를 캐기 위해 동원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한 이 계산으로 본다면 1인당 1석을 채굴하는 셈이 되고, 약 144kg이 이에 해당한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당시에 양구는 1,430호에 인구는 6,379명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약 30%가 넘는 양구의 호수戶數가 채굴에 동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채굴 시기는 춘궁기 농사철에는 백성을 동원하여 굴취하기 어려우므로 주로 농사가 끝나가는 겨울 전의 가을철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봄철에, 또는 심지어 추운 겨울에도 채굴이 이루어졌다.
운송 시기는 봄과 가을로 두 번 나누어 운송되고, 봄철에는 얼음이 녹아 물이 불어나는 해빙기를 이용하고, 가을에는 장마 등이 끝나고 불어난 물을 이용하여 운송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호에 계속)
필자 정두섭은 강릉대학교 산업공예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강원대학교 사학과에서 문학박사를 마쳤다. 조선시대 백자와 양구지역 백자요지, 태토 등 관련 연구논문 7건을 발표했으며, 작가로 활동하며 13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강원미술대전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로 활동 중이며 양구백자박물관 관장직을 맡고있다. 이메일은 ttodami@hanmail.net이다.
01 양구백토
02 금악리 수입천변 백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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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백자 ´예빈사禮賓寺´명접시편 - 송현리5호 (필름 테두리 지워주세요)
05 백자철화 ´순順´명접시편-장평리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