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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월호 | 도예계 소식 ]

공주시, 이삼평도예관 설립에 대한 단상
  • 이재황 도예가, 공주시 도예명장 1호
  • 등록 2022-10-31 10:24:11
  • 수정 2024-07-22 11: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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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이삼평도예관 설립에 대한 단상

글·사진. 이재황 공주시 도예명장 1호, 이삼평연구회 사무국장



건립부지 현황


유형문화재 철화분청사기와 무형문화재 이삼평을 탄생시킨 계룡산의 도자유적이 있는 충남 공주시는 참 행복한 도자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고미술계에서 ‘계룡산’이란 별칭을 지닐 정도로 독창성을 인정받는 ‘철화분청사기’와 함께 일본 자기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이삼평’은 또 하나의 축복인 것이다. 철화분청사기는 15~16세기 초에 계룡산 학봉리 도자 유적에서 생산되다가 아쉽게 단절되었다. 철화자기가 다시 복원된 곳은 정유재란에 피랍된 청년 이삼평이 일본 사가현 다쿠시에서 첫 주거를 하며 철화자기 다쿠에가라츠를 생산하면서 맥이 이어지게 된다.


이삼평추모제를 주행사로 하는 아리타 도자기 축제는 매년, 4월 29일부터 5월 5일에 개최하여 일주일간 80~150만명이 다녀가는 세계적인 도자문화축제이다. 더불어 공주 이삼평과 남원 심수관, 아리타 백파선미술관(김해)은 복잡한 한,일 관계에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는 도래인으로 역사적으로 조명받는 인물들이다. 그중에서 도예전시관이 없는 인물은 이삼평뿐이며 이는 공주시가 되짚어 보아야 할 콘텐츠인 것이다. 2019년 4월, 공주시는 이삼평도자예술단지의 설립 예산으로 144억을 고시에 띄우며 주변의 도예가와 인근 주민을 모시고 사업설명회를 개최하였다. 후보지 세 곳을 지목하였고 토지구입비와 시설인프라로 이삼평도예관 3층 (1층 박물관, 2층 철화분청판매장, 3층 갤러리 및 청년작가 레지던시 작업실)과 장작가마, 주차장 시설 등을 신축할 것을 공주시가 제안하였다. 이 후, 공주 주민의 설문지와 평가표를 기반으로 자료를 구축해 8월에는 2차 설명회를 가졌고 후보지 중에 최종 1,2지역을 선택하여 두 지역의 장,단점을 설명하며 최종 점수가 높은 국가사적 333호 인근에 있는 반포면 학봉리가 선정되었음을 알렸다. 선정된 배경 중에는 국가사적 333호, 철화 안료 사적지인 구무동굴과 함께 가장 매력적인 점수가 반영된 것은 계룡산 관광으로 일일 평균 600명의 방문객이 저절로  찾아오는 접근성이 크게 작용하였다. 공주에서 이삼평공公에 대한 웃픈 현실은 1990년에 계룡산 조각공원 내에 사가현 아리타초有田町 시민들이 2억원을 모금하여 이삼평현창비를 건립하게 된다. 더불어 1990년부터 시작된 아리타 초등학생들이 매년 200명이 참관해 추모의 글을 쓰며 감상문을 남겼던 때도 이 시기부터이다. 기념비에는 그간의 과정, 추진위원회 명단과 함께 설립 취지문을 기록한 도판이 부착되어 있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 중에서 이삼평공公이 일본으로 ‘건너간’이란 문구로 시비 거리가 발생하였으며 한,일 양국의 커다란 이슈로 변하며 엄청난 회오리를 일으키게 된다. 결국 3차 조정위원회를 거치며 ‘건너가게 되어’라는 용어로 일단락 마무리가 되었으나 이때의 잔상들로 공주에선 도조 이삼평을 30년이란 먼기간 동안, 공황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세월이 지나 2013년, 공주 계룡산 이삼평공원에서 조촐한 헌다례식이 진행되었다. 이삼평연구회 창립기념을 계기로 참석한 30명의 연구회와 도예가 회원들은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며 행사를 진행했다. 순서에 따라 이삼평공에 바치는 헌화와 헌시를 낭독해 주신 풀꽃시인 나태주 공주문화원장과 공주 아리랑 이걸재 충남무형문화재의 공연도 진행하였다. 식순은 연구회 사무국장인 필자의 의해 헌다례가 진행되었고 본인도 역시 헌다완을 올리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공公께서 400년 만의 후손들에 의해 받으시는 찻상과 술상. 당시 차 한잔을 올리며 파르르 떨렸던 감동적이던 손 떨림은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이 후, 매년 헌다례는 공주시의 후원으로 이삼평연구회가 주관하게 되었고 2016년에는 32번 국도 6차선 확장으로 박정자 이삼평현창비가 새로운 둥지인 (학봉리) 구무동길 23번지인 이삼평공원으로 확대 이전하였다. 현창비에는 ‘일본 자기의 시조 이삼평李參平’이란 커다란 글자가 보는 이로 하여금 애국심과 자긍심을 일으키고 있다. 이 비문은 공주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선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커다란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이삼평도자관을 설립하기에 우선 역사적 관점을 가볍게 스쳐가기는 무척 부담스런 일이다. 1,000명 이상의 사기장이 조선에서 피랍되어 평생동안 고향을 그리워하였으나 결국은 회귀도 못한 채 무명도공의 무연탑에 묻히는 사례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도조陶祖라는 명예스런 지휘를 갖는 이삼평일지라도 ‘월창정심거사’라는 법명이 뜻하듯 창가에 서서 고향을 보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조선인으로서 당연한 귀소본능일 것이다. 평생 고향과 이향의 간극에서 이삼평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의문점을 제시해 본다. 1598년 정유재란 중에 청년 이삼평(1579?~1655)은 그의 일행과 산속에서 은거1를 하다가 낙오된 왜군의 의해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영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때 처음 피랍된 곳으로 1936년, 나카지마 히로키中島浩氣의 『히젠도자사고肥前陶磁史考』는 이삼평의 고향을 ‘충청도 금강’으로 표기 하였고 이즈음 전주를 거쳐 김해로 퇴각하는 낙오된 왜군에 의해 “공주 공산성도 일부가 불에 소실되어 이를 복원한 기록”2으로 이를 방증하고 있다. 이 자료를 토대로 1990년 아리타정에서 주관한 한·일 학자 심포지엄에서 이삼평의 고향을 철화분청사기가 생산된 계룡산 도자유적으로 피랍지를 확정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피랍된 청년 이삼평이 가라츠唐津를 거쳐 일본에서 처음 주거한 곳은 나베시마 참모장이었던 사위 다쿠야스토시多久安順1566~1641의 지배령으로 현 사가현 다쿠시多久市이다. 『나베시마 가계세보鍋島直茂 家計世譜』에는 ‘정유년, 조선인이 길 안내를 해주어 데려와서는 金ヶ江三兵衛이라 개명하고 참모장 다쿠야스토시多久安順 집에 머물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더불어 공公이 직접 수기한 고문서古文書에도 이를 확인하고 있다.

     
1994년 3월 다쿠시 교육위원회에서 발굴 조사하여 실증했던 이삼평일행의 첫가마는 고라이다니가마아토와 당인코바가마아토 등 경사를 이용한 등요이며 학봉리 가마와 같은 구조로 (후後에 이삼평이 아리타에서 신축한 덴구타니가마는 계단식으로 15세기의 고창 용산리 계단 가마형태이다), 길이 16.5m, 넓이 2m, 8개의 소성실이 있던 작은 가마이다. 다쿠시역사민속자료관에는 이곳 도편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가라츠야끼류인 철화도기, 녹유도기, 암녹색 경질도편 등이 있고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백자화 되어가는 정제된 미색 도편들이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백자만을 생산하였기 때문에 계룡산 분토골 백자에 대한 애증과 노하우로 철분 제거를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마침내 앞서 언급한 가마들은 에도시대 말기의 읍지도에도 기록되었고 2016년 아리타 가마개소 400회에는 이삼평이 운영하였던 가마로 인정되어 국가사적으로 지정된다. 이로써 계룡산에서 단절된 철화분청사기는 이삼평에 의해 100년 후 일본에서 에가라츠로 다시 재현하는 형상이 되었다.
당시 다쿠에서 경질도기를 구현한 이삼평에 대해 읍주邑主는 크게 환영하였고 직속된 하위직으로 ‘히캉’이란 도자기 제조를 맡는 관직과 그의 하녀로 하여금 부부의 연을 맺게 하였다. 그러나 백자의 꿈을 이루기 위한 장인정신은 지속적으로 주변을 찾아 헤매였어도 결국 백토를 구하지 못하여 읍주에게 백토 탐색을 위해 사가현 자유여행권을 신청하여 승인을 받게 된다. 다쿠를 떠난 시기는 『히젠도자사고肥前陶磁史考』에 의해 1614~1615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2년이 지나 1616년(광해군 8년) 아리타초有田町 동쪽에 위치한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도석광을 발견한 이삼평은 사가현 초대 다이묘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8~1618의 명을 받고 38세에 18명의 가솔과 함께 시라카와白川에서 덴구타니가마天狗谷窯를 개소하여 도자기를 굽기 시작한다. 모두 계단장연방식등요階段狀連房式登窯로 5기가 발견되며 가마의 규모는 전장이 52m이며 16개의 소성실로 구성되었고 조업연대는 ~1660년까지 추정하고 있다. 백자도토가 발견되면서 『히젠고요분포도肥前古窯分布圖』에는 ‘조선 사기장들이 히젠에서 개소한 가마만 370개가 넘는다.’ 라고 기록되었다. 후에 1647년, 아리타는 활발한 자기 생산지가 되어 이삼평이 총괄 감독한 155기의 가마소가 운영되었고 1천3백 가구에 인구가 5500명까지 달했다고 한다. 1961년 미카미 츠기오三上次男는
덴쿠다니고요지天狗谷 古窯址를 발굴하며 이삼평이 자기를 완성했다고 전해진 1616년 이전에 이미 일본인 도공이 도요지에서 자기가 구워졌음을 밝혔고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 중략)
충남 공주시에 이삼평도예관은 언젠가 ‘꼭’ 설립되어야 한다. 당시 길잡이 청년의 선택은 삶과 죽음에 이르는 결정으로 오랜 세월 동안 부일배로 치부되었다. 청년에게는 덧없는 상황이었고 후회함의 눈물로 회계하였다. 1655년 용천사 법명도, 또한 1917년 연화산 정상의 기념비도, 1990년 공주 비문 파동도, 2022년 이삼평도예관 설립을 반대하는 몇몇의 도예가들로 지속적인 표적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도래인 이삼평을 울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철화분청사기를 복원해 준 동족 할아버지를 왜 우리가 그를 평가하고 비평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공公의 본심도 이해하여 볼 때 이다. 400년간 고향을 그리워했으면 됐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필자는 정한론자가 아님을 밝혀 봄직하다. 훗날, 이삼평도예관이 설립되어 크고 넓게 보는 시야로 양국의 우정과 교류의 가교로서 선봉에 서있길 바랄 뿐이다.




<</span>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2년 6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 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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