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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월호 | 칼럼 ]

[소소담화⑨] ‘사진 찍기 좋은 미술관’과 한국 공예 전시
  • 홍지수 공예평론가
  • 등록 2022-10-04 16:42:19
  • 수정 2024-07-05 11: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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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담화⑨ | CRITIC IN CONVERSATION]

 

 ‘사진 찍기 좋은 미술관’과 한국 공예 전시

글. 홍지수 미술평론, 미술학 박사 

예술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미술이라는 것이 고매한 작가의 정신세계를 드러내고 일상의 규범, 목적으로부터 분리된 자유로운 존재를 표현하는 정신의 산물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근대의 소산이다. 미술관 역시 일상으로부터 예술을 보호하고 가치를 수장하려는 목적에서 벗어나 대중의 미적 체험과 교육의 공간으로 빠르게 탈바꿈하고 있다. 미술관, 갤러리가 갈수록 대중들을 위한 즐기는 공간이 되다보니 기획자들은 스스로 난해하거나 어려운 요소는 제하고,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들를 수 있는 미술관, 전시를 만들고 있다. 최근 미술계에서 부쩍 소리, 빛 그리고 시각효과가 함께 어우러져 우리의 ‘시각’, ‘청각’과 ‘후각’등의 말초신경을 공감각적으로 자극하는 전시가 유행하는 것은 한층 확장된 현대미술의 층위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지만, 반면 시각, 간접체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관객들을 위한 일종의 ‘자극점 따라잡기 전략’의 결과이기도 하다. 최근 전시 홍보는 관람객이 즐기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기획과 연출이 이슈몰이가 필수다. ‘천재’, ‘비운의’, ‘90세 할머니’ 등의 레토릭한 수사를 붙인 전시들이 언론과 셀럽을 위시로 이슈몰이를 하고 미술관과 기획자의 인지도를 덩달아 높이는 일석이조를 거두다보니, 정작 미술관이 해야 할 일들-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긴 호흡으로 연구를 가져가야할 진중한 기획과 연구 성과는 부족한 편이다. 다소 무모하고 아방가르드할 지라도 매체의 역사나 관습을 타파하려는 작가들의 실험과 도전이 가장 뜨겁게 수행되어야할 레지던시 보고전마저도 뜨거움, 실험 정신이 부족하고 상업적이며 편안하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예산이나 인력운용 면에서 사립에 비해 비교적 운신의 폭이 덜한 공립미술관, 박물관, 레지던시에서 더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공예 관련 미술관들은 대부분 2000년대 이후 태생이다. 대부분 단발성 문화이벤트로 기획되었다 생존한 지자체 주도의 비엔날레, 기획축제 등을 모태로 하고 있다. 단발성 문화행사일 때는 하드웨어인 건축물이 필요치 않았지만, 장기화로 하면서, 회를 거듭할 때마다 발생하는 성과를 보관하고 운영 인력이 상주하며 사업을 수행할 건축물 즉, 하드웨어와 막대한 예산이 필요해졌다. 문제는 우리나라 지자체 미술관·기관 운영이 그렇듯 초기 하드웨어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장기적으로 투입해야할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운영에는 소홀하다는 점이다. 운영, 사업예산이 크고 지자체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은 산하기관일수록 이 문제는 치명적이다. 경기가 좋아 세수확보가 쉽고 지자체장의 행사, 기관운영에 대한 의지와 관심이 크면 문제가 크지 않지만, 이것이 용이하다 해도 지자체의 방만한 사업 확장과 예산투입을 경계비판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도 커지는 추세에서 쉽지 않다. 작가를 비롯한 종사자들에게 예술은 크고 위대하지만, 대중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시각에서 예술의 지엽은 여타 첨예한 사회경제문제에 비해 덜 시급하다. 여기에 민심과 시대흐름에 따라 지자체의 정치 지형도가 바뀌면, 기존 사업에 대한 추진력은 대부분 떨어지고 관련 기관들은 개혁과 혁신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혁신 요구 중에 하나가 재정 자립이다. 그러나 대부분 비영리문화단체인 국공립미술관이나 기관들은 독자적으로 영리 목적의 사업을 벌이기 어렵다. 그렇다고 고객이자 협력자이기도한 예술인을 상대로 시장경제논리에 따라 사업비용을 현실화하거나 이득을 취할 수도 없다. 결국 이들이 치중하는 전략은 대중, 지역 예술인으로부터 얻는 지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한국 공예분야의 확장성과 연구 심도는 일단 차치하고, 관람객의 마음을 열어주고 함께 즐기는 오락과 유흥의 장을 제공한다는 명분이라도 얻어야 미술관에 대한 관객의 만족도와 관계 산업 종사자들의 지지가 높아진다. 대중의 호응과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지자체는 예산과 지원을 줄이거나 끊을 수 없다. 그러나 미술관이 신성한 예술 감상의 공간을 포기하고 ‘인생샷 찍기 좋은 공간’1, ‘고상한 문화생활’이라는 키워드를 지향하며 미술관의 개방성과 대중성을 노린 체험형, 교육형 전시를 기획하고 연출을 하면 관객은 뜨겁게 호응하고 지자체는 더 많은 예산을 기관에 지원하며 생존과 자립이 가능할까? 

작품의 감상이나 전시 기획자의 의도를 간파하기보다 인증용 사진을 찍는 것이 더 중요한 대중들의 생각, 유행을 거슬러 국공립 미술관이 고상하고 진중한 문화적 행위, 사업만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고상함과 진중함을 고수하는 행위가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퇴행시키는 고집이나 아집이 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미술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오히려 작가, 기획자들은 예술제도의 고집과 아집의 허구, 불완전함을 지적하고 비판하며 새로운 예술, 형식, 제도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미술관이 대중들을 위한 공간, 사진 찍기 좋은 공간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것은 숙제다. 미술관은 ‘왜?’라는 질문이 가장 성행해야 하는 공간이다. 의문하지 않고 새로운 생각과 사유, 관점을 촉발할 수 없다면 미술관은 그저 놀이터, 얄팍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건축에 불과하다. 기획자, 연구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고민하고 공들여 만들어낸 전시와 연구 성과, 동시대 예술가들이 그 속에 참여하며 동기 부여되고 영감을 되돌려 받는 풍부한 소프트웨어가 부재한 미술관은 공허하고 생명력이 짧다. 대중들은 호응하지 않는다. 대중이 말초적인 것, 쉬운 것, 유행하는 것에 쉬이 그리고 뜨겁게 반응할 것 같아도 좋은 것을 알아보는 관객의 눈은 매섭고 정확하다. 기획자는 좋은 기획으로 마중물을 만들고 관객은 입소문의 물길을 만든다. 기획자와 연구자들이 오랜 시간 협력하여 공들여 만든 기획 전시가 입소문을 타고 흥행몰이를 한 예는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한 <조선의 승려 장인>전이나 <이건희 컬렉션-어느 수집가의 초대>전이 대표적이다. 이 전시를 향한 대중들의 관심은 사람들이 그간 얄팍한 것, 가벼운 것들에 지쳐 있던 안목을 높이고 ‘시대를 가리지 않는 좋은 것’, ‘의미 있는 것’을 찾아보려는 자발적인 문화적 욕구가 있음을 보여준다. 대중의 호응을 우선하기보다, 기존과 차별화된 관점, 오랜 연구와 준비, 전시 기획의도에 부합하는 좋은 작품의 섭외와 배치를 우선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전시들이다.

(···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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