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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월호 | 전시리뷰 ]

[전시리뷰] 홍준기 <달>
  • 편집부
  • 등록 2022-10-04 12:53:01
  • 수정 2022-10-04 12: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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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 EXBIHITION REVIEWS]

 

무의식의 흔적에서 건져 올린 견고한 자아

글. 안준형 여주시청 주무관, 문화행정가  사진. 김상범


홍준기 개인전 <달>
2022.8.26.~9.18. 여주도자문화센터
경기 여주시 신륵사길7
T.031.887.3572  H.www.yeoju.go.kr


1969년, 홍준기 작가는 인천 주안에서 태어났다. 도자기 공장에서 도자기를 빚던 아버지, 홍성구 선생의 직장인 중앙도기도 그곳에 있었다. 1976년, 작가는 여주에 발을 들이게 된다. 아버지가 한양요업사로 이직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작가에게 도자기 공장은 아버지의 직장인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굴레이자 이상적 공간이기도 했다.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여주는 온 동네에 도자기를 만들 흙더미가 즐비했고, 흙을 주무르는 것은 재미난 놀이였다. 수십 명의 어른이 물레를 차며 흙을 엿가락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1978년, 한양요업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홍성구 선생은 직접 송백요松白窯라는 도자기 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후에 백암요白巖窯로 상호를 변경한 아버지의 공장에서 당시 중학생이던 작가 역시 일을 거들었다. 지천으로 널린 것이 흙이었고 가업을 거들며 성장한 작가에게 도자기를 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1990년 송정요업에서 청화로 사군자와 문인화를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1992년부터는 물레작업에 매진하게 되었다. 왼손잡이인 작가에게 오른손잡이가 일색이던 물레대장들의 도움은 요원했기에 도시락을 두개씩 싸 들고 다니며 혼자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기량을 갈고닦을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무렵에는 기량이 올라 한준도예(現 이경현도예) 등 여러 도자기 공장에서 프리랜서로 물레대장일을 했다. 당시 여주 도자 산업은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호황이기도 했고 물레대장은 조각사나 화공, 화부(소성 전담)에 비해 처우가 좋았기에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주 도자기 시장이 점차 산업 도자 중심으로 변모하면서 물레대장의 역할이 감소하는 추세였고, 그는 전통 도자 제작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다른 지역 도자기 공장을 전전했다. 1995년부터 전남 순천의 송광도예, 경남 양산의 니산도예와 삼감도예, 대구의 산곡도예 등을 거쳐 2004년 경북 영천에 처음으로 자신의 작업실인 흙마루 공방을 설립했다. 작가는 몇 년간 작업에 열중했지만 녹록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2008년, 작가는 작품 판매와 홍보를 위해 도자 산업이 활성화된 여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방문했던 인사동 어느 갤러리에서 열린 한 일본인 작가가 빚은 손가락 마디 남짓의 작고 정교한 도자기에 매료된 것을 보고 그 작업에 열중해 작품을 팔아보자는 심산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욕심 혹은 바람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2018년, 작업의 방향성에 대한 회의와 소비자의 무반응에 지쳐가던 작가는 우연찮은 기회에 영국 런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여행 중에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보게 된 작가는 마음속 울림을 느끼게 된다. 이역만리 먼 타지에서 보물로 대접받는 조선의 달항아리.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 작가는 도자기를 빼면 인생에 별다를 게 없다고 여기던 중 이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고고하면서도 친근한 기운을 내는 달항아리가 새로운 도전을 북돋는 것만 같았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역시 ‘동시대 현대예술이었던 초현실주의 보다 고대 유물에서 무의식의 흔적을 보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오랜 시간 물레질에 천착한 작가에게 달항아리란 물레 잘하는 이들 다수가 욕심내는 작업으로 스스로 오랜 세월 쌓아온 기량과 독자적 손맛이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귀국 후 한참을 달항아리와 씨름하면서 작가는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구체화하게 된다. 물레 성형 이후 굽을 깎는 과정에서 굽과 전 부분을 제외한 부분은 가공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었다. 물레질을 통해 애써 만들어낸 부분은 마치 사발이 그러하듯 자연스러운 미감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작가는 2018년 이래 집중해온 달항아리 작품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아직 유약과 소성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지만 성과를 점검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작가가 추구하는 달항아리는 전통의 온전한 계승인 동시에 현대적 변용이기도 하다. 안료와 금속산화물로 강렬한 원색을 표현해 차별성을 두고자 했지만 고유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타협으로 역시 한국의 전통 색인 오방색五方色을 차용했다. 오방정색이라고도 하는 황, 청, 백, 적, 흑의 다섯 가지 색은 음과 양의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목·화·토·금·수의 오행을 생성하였다는 음양오행사상을 기초로 한다. 작가는 이를 기반으로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떠오르게 한 ‘달月’이 그리는 1년 12달의 미묘한 표정을 색과 형으로 완성했다.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고되고 힘든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에 관해 물었을 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신 후 유지를 잇고 싶다는 소명감,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도록 곁을 내준 이 일을 업이라 여기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으며 다소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다. 차마 벗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엮인 천형天刑 혹은 숙명과도 같은 삶과 도자기, 그리고 그 결과물을 타인이 어떻게 평가하거나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작가 자신의 관념과 자의식을 넘어 보편적 정당성을 얻게 될 때 많은 이들이 작가의 삶과 작품에 호응하는 동시에 감응하게 될 것이다.

(···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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