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작가 | ARTIST OF THE MONTH]
故 이세용
소풍을 떠난 예술가
「대발」 38.5x37x42cm | 청화백자, 환원소성 | 2004.
계면유영界面游泳
우리가 ‘도자 예술’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창작 양식이 있다면, 이세용은 그에 가장 적합한 작업을 수행한 작가일 것이다. 끈질기게 재료와 기술을 연구한 그는 도자의 본질을 물리·화학적으로 이해하고 능숙하게 활용했으며, 직관적인 입체 조형과 상징적 드로잉을 통해 삶을 향한 애정과 예술적 기질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자신이 다루는 물질과 매체의 본성을 꿰뚫고 있다는 것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이 사용하는 시어나 작곡가의 음”1과 같은 조형 언어를 편협하지 않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예술적 표현을 위한 기술 연구에 오랜 기간 많은 힘을 쏟았다.
이세용은 한국세라믹기술원의 전신인 국가기술표준원 산하 요업기술원에서 연구원으로 14여 년간 재직하면서 유약, 안료, 소지를 연구했다. 연구소 생활에 익숙해진 1984년 가을부터는 경기도 안양의 어느 공터에 임시로 작은 작업실을 지어놓고 퇴근 후 늦은 밤까지 여러 유약을 실제 작업에 적용하는 실험을 이어갔다.2 90년대 초까지 계속된 그 몰두의 시간 속에서 자연히 색채와 입체 조형감각도 함께 진화하게 되는데, 작가는 기술적 지식에 근거한 자기만의 조형적 틀을 구축한 이 시기를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상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와 노하우를 동료·후배들과 나누는 데에도 거침이 없었다. 일례로 그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월간도예』에 <실험을 통한 효과적인 유약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유약의 종류와 성질, 조성과 발색을 구체적인 데이터와 함께 기술한 17편의 글을 연재했다. 또한 자신이 개발한 유약·안료를 보다 많은 작가들이 활용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오랜 기간 축적한 실험 데이터를 동료들과 함께 만든 유약 제조업체에 제공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작가는 백자 표면에 인물을 중심 주제로 한 그림과 부드러운 색채를 자유롭게 얹은 양식을 탐구하며, 관습과 아카데미즘에 구속받지 않는 ‘그림 도자’ 양식의 기반을 다진다. 그러면서 작가의 기질적 분방함은 마치 아르브뤼art brut의 그것과도 같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필치로, 폭발하는 상상력은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풍부하고 즉발적인 표현으로 구체화 된다. 이세용 특유의 화법畵法은 회화의 표현적 특질을 도자의 물질(성) 위에서 구현하는 데서 생성됐다. 드로잉과 색채가 삶과 사회를 향한 그의 애착을 표출하는 매체였다면, 도자는 그림을 입히기 위한 캔버스, 즉 바탕이나 몸이라기보다는 그 그림이 흘러나오는 원천, 그의 작업을 공고히 붙들고 있는 정신이자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작가가 2000년대 중반부터 고유 표현 양식으로서 집중 탐구했던 청화靑畵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백자 기물의 표면을 채운 갖가지 그림의 주 안료로 코발트를 선택했는데, 이는 코발트가 고온의 번조 과정을 거치면서도 농담, 섬세한 선, 바탕과의 대비 등의 효과를 가장 풍부하고 안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안료이기 때문이었다. 드로잉과 여백, 작가의 활력과 질료의 자발적 표현이 구축한 코발트 화면은 시원하게 뻗은 원통형 병, 크고 작은 사발, 직사각형 도판, 둥근 접시, 사다리꼴 모양의 큰 화병, 모서리를 잡아 면을 친 큰 발, 호리병부터 배가 불룩 나온 호까지, 고전적 안정감을 지니면서도 유머가 스민 자신감 넘치는 기형과 함께 일련의 계면界面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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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으로 엮은 삶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7 그래도 우리는 이세용이 작품에 새겨 넣은 모티프에서 그 생의 흔적을 발견한다. 작업실과 산책길에서 만나는 동식물, 동시대를 사는 보통의 사람들과 어쩐지 애잔한 그들의 풍경,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 기사에 떠다니는 사건들과 부조리, 그리고 가족은 작가가 언제나 예민하게 감응하던 대상이었다. 꽃, 곤충, 사람, 도시…. 2000년대 후반부터 작업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이 같은 모티프는 문양처럼 기면을 채우기도 하고 때로는 수묵화나 목가적 풍경화 같은 분위기로, 또 때로는 리얼리즘이나 초현실주의의 어법으로 그려진다. 다양한 양식과 분위기는 개별 모티프를 마치 임의적이고 즉흥적으로 배치한 듯한 ‘비선형적’ 구성으로써 더욱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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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용의 화면에서는 현실의 모티프가 논리적 연관성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는 어떤 풍경 속에 우연히 놓인다. 실상을 벗어난 이들은 모종의 긴장감을 유발하고, 그 자체로 생동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웃음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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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용이 추구한 쾌는 모티프뿐만 아니라 재료와 기법, 형태와 구조에서도 발견된다. 2010년을 전후로 그는 더욱 과감하게 형식을 확장하는데, 청화백자에서는 추상적 모티프와 색채를 특유의 드로잉과 결합시키면서 회화적 풍경을 발전시키는 한편, 산청토, 분청, 진사, 철화, 은채, 흑유, 천목유 등의 다양한 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새로운 양식을 계속해서 발굴해 나간다. 현실과 상상의 계면 풍경은 이제 흰 바탕을 넘어 거대한 소조상, 나무패널이나 캔버스와 도판을 결합한 콜라주, 특이한 구조의 다탁茶卓 같은 도자 가구로도 확대된다. 작은 발로 위태롭게 서 있는 인물들의 어색한 비례, 서랍이 있는 테이블과 합의 결합, 흑유를 입힌 산청토와 청화백자의 대비 등, 작가는 온갖 이질적인 것들의 아상블라주를 통해 “위험하지 않은 긴장감”을 유발하며 희극을 실천했다. “한 작품 안에서 두 개념 간의 대립과 화합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을 구축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의 삶에 스며든 수많은 생을 기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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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가는 길
그리고 2016년 겨울, 원하는 선이 나오지 않는다며 불편을 호소하던 이세용은 2017년 가을에 폐암 진단을 받고 길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시작했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약 1년간은 잠시 병세가 호전되어 재활 치료를 받으며 그동안의 작업을 모아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 시기에 작가가 원형 굽접시와 도판 등의 단순한 기물에 흐트러진 선으로 그린 닭, 개, 사슴, 나무, 소녀, 여인, 애벌레, 꽃, 호랑이는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최소한의 컨트롤로, 하지만 아마도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그래서 본질에만 집중해 그려냈을 이 단순한 ‘자연’은 평생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대상이자, 그가 오랜 기간 추구했던 조탁복박雕琢復朴의 예술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2년 7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 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