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작가 | ARTIST OF THE MONTH]
그의 조각 시점은 흔히 도자공예 장식 공정의 관행을 벗어난다. 일반적으로 조각 공정은 성형을 마친 후 일명 레더 하드leather hard 상태에서 행하지만, 작가가 조각을 허용하는 건조 상태는 이 상태를 훨씬 지난다. 성형 후 기물의 건조 시간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수어 달까지 걸린다. 하얗던 표면이 누렇게 변하도록 일 점 수분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 같은 마른 상태, 거의 무른 돌에 가까운 메마른 몸이 되고서야 기물은 비로소 회전판 위에 올라갈 수 있다.시공간 속에서 산란하고 출렁이는 빛의 사물
이종민
이종민 작가
「무제」 29.5×29.5×44.5cm | 물레성형후 손으로 조각, 투명유, 환원소성 | 2020
1. 도구와 태도
이종민의 작업은 공예작업에서 재료와 도구 그리고 그를 운용하는 작가의 감각과 태도가 얼마나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작가의 도구 사용은 오랫동안 도예가들이 장식에 동원했던 목木, 금金 재질의 조각도 혹은 붓의 선택지1를 모두 벗어난다. 그는 치과에서 쓰일 법한 의료용 도구, 다이아몬드 칼과 소형 모터가 장착된 그라인더, 흡인 부스 등을 사용한다. 그는 생경한 도구들을 이용해 목도구의 희용이나 도칼陶刀 재능을 훨씬 뛰어넘는 간결하고 치밀한 표현을 희구한다. 그는 매일 2평 남짓 공간에 홀로 앉아 마치 깊은 바다로 들어갈 잠수부처럼 머리에는 고글과 방진 마스크를 쓰고, 한 손에는 이질異質의 도구를 쥔다. 다른 손으로는 백토로 성형한 단단한 기물을 부여잡고서 하루 평균 10여 시간을 내리 작업한다. 나는 그의 건강을 염려해 작업 중간에 쉬거나 일日을 건너 작업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권유해보지만, 작가는 대신 ‘작업자의 호흡과 생각은 모두 질료와 칼 놀림에 기록되는 것이니 쉼은 곧 중단을, 멈춤을, 달라짐을 의미한다’고 대답한다. 그가 이토록 철저하게 작업과 일상에 시간의 간극이나 나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표현이 들쑥날쑥하거나 끊어지지 않으며 마치 바람이 불고 물 흐르는 것 마냥 유연하고 자연스럽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다소 무모해보이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작가의 작업 태도는 우리가 장인匠人에게 기대하는 무엇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방식이나 태도를 굳이 장인에 견주지 않아도, 그가 사소한 것조차 모두 기록하고 품는 재료를 선택했으며 재료와 도구, 도예가의 몸과 도구 간의 깊은 상관관계와 숙련도가 곧 아름다움으로 직결되는 공예를, 그중에서도 세밀함과 세심함을 지향하는 작업 유형을 선택했기에 작가가 응당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삶의 방식, 몰입을 위한 자신만의 루틴routine이 아닐까 싶다.
2. 형태 : 완전한 음(-) 혹은 완전한 양(+)도 아닌
이종민은 물레로 형태를 만든다. 흙은 백토만 쓴다. 건조와 소성 후의 수축률을 고려하여 물레로 성형할 형태와 크기를 정한다. 2011년 전후 작업에는 전, 굽 등의 처리에서 항아리, 화병 등 실용 기물로서 용도와 기능에 대한 암시가 있었다. 작가는 용기 표면에 물결, 바람 같은 유기적 선들을 얕은 파고波高처럼 조각하여 패턴화했다. 이종민의 초기 작업은 용기 형태와 수법이 장식미술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공력과 완성도를 추구하는 공예적 태도가 두드러졌기에, 작가의 조형 목표가 전통 백자의 조각 장식을 현대적으로 변용하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작가는 근년간 기물의 입구를 심히 좁히고 굽을 내부로 감추는 형태의 변화를 꾀했다. 기물의 용도와 명칭을 가늠할 만한 요소들 그리고 시선의 이동을 멈칫거리게 하는 요소가 사라지면서 첫째, 입구부터 바닥까지 이르는 기물의 실루엣이 한층 유려해졌고 둘째, 용도와 장식에 가려졌던 기물의 부피와 양감 역시 뚜렷해졌다. 셋째, 조각의 세부와 일루전 효과의 가시성도 훨씬 좋아졌다. 이러한 형태 변화는 시간이 흘러 작업의 공력이 쌓이면서 형태를 바라보는 작가의 미적 선호가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작가가 작업에서 중요시한 바가 ‘공예기工藝器 제작’보다는 ‘조각’이라는 조형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연스럽게 찾아온 이행의 결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작가가 후일 작업할 형태가 더욱 단순하고 간결한 구조적 형태로 귀결할 것으로 예측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작가가 선호하는 형태는 순수한 형태 즉, 완전한 대칭의 구球나 입방체를 향하고 있지 않다. 기물의 부피와 실루엣은 마치 새벽녘 꽃봉오리가 이제 곧 필 듯 말 듯 한 어느 미숙한 순간에 멈춰 있다. 그것은 생물의 내부에서 발생한 생의 에너지가 그 안에서 움틀 거리고 바깥을 향해 이제 막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어느 자연의 순간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완전한 음(-) 혹은 완전한 양(+)의 형태도 아닌 성질이 다른 양가의 기운이 한데 섞인 모호한 형태다. 그는 물레 회전판 위에서 기물의 배나 허리를 불리고 그에 비례해 입구와 바닥의 면적을 좁혀 기물의 형세를 조절한다. 작가는 수평으로 살포시 배부른 채 수직으로 기립한 이 형태가 조각과 결합할 때 운동성이 더욱 극대화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따라서 작가가 물레로 형태를 빚는 것은 단순히 조각의 바탕을 마련하는 일이 아니고 형세를 만드는 시작이다. 그것은 ‘어떤 기물의 형태와 실루엣, 부피감이 조각으로 구현할 이미지의 바탕이자 장場으로서 합당한가?’ 나아가 ‘그것이 빛과 만나 어떤 산란과 시각적 출렁거림과 일루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선택이 시작되는 중요한 단계다.
3. 조각 : 공간을 만들고 불필요한 살을 덜어내는 칼의 운용
이종민의 작업이 지닌 조형미의 핵심은 조각 공정에 있다. 그는 예사 도예가들이 물레질로 만드는 것에 비해 두께를 두껍게 한다. 조각을 베풀 도구가 들고나올 최소한의 안전한 깊이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기벽을 두껍게 제작하면 칼을 운용할 범주는 넓어져도 불필요한 덧살로 그만큼 완성작의 무게가 상당할 것이다. 형태와 조각 효과 역시 둔탁해질 것이니 마냥 두껍게 물레를 차올릴 수도 없을 노릇이다. 성형방법의 특징 상 기물의 가장 두꺼운 부분(허리)와 가장 얇은 부분(입구)의 두께 차이도 상당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무리 작가가 능한 기술과 경험을 가졌고 매번 성형하는 기벽 두께가 일정하다 하여도) 조각도를 기벽에 넣어 찌르고 헤집고 깎는 과정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얼마나 도구를 찔러 넣어야 기벽을 뚫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깊게 찔러 넣을 수 있을지, 얼마나 흙을 덜고 골의 폭을 넓혀야 빛이 기물에 닿았을 때 적절한 그림자의 비율이 생겨 일루전이 명징해질지가 늘 작가가 고민하는 조각의 관건이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2년 6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 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