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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월호 | 칼럼/학술 ]

[문화재 돋보기 ⑮] 백자청화 꽃넝쿨무늬 합
  •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 등록 2022-05-30 11:20:04
  • 수정 2024-07-05 11: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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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돋보기⑮ | SPOTLIGHT ON NATIONAL TREASURES]

 

백자청화 꽃넝쿨무늬 합


1) 「백자청화 꽃넝쿨무늬 합 白磁靑畵 寶相唐草文 盒」 조선시대 15세기. 높이 11cm 입지름 18cm 바닥지름 15cm


2) 백자합의 바닥부분

조선 초기의 백자청화靑畵白磁는 매우 희귀하다.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비쌌던 청화안료의 수입이 원활하지 못했고 워낙 고가였기 때문에 왕실조차 꼭 필요한 경우에만 청화백자를 주문제작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는 청화백자의 생산량도 적었고 5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보존된 유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조선 왕실이 고가의 수입 청화안료를 대체하기 위해서 국산 청화안료土靑를 개발하고 화사기畵沙器를 번조한 사례와 토청 청화백자의 시험 제조에 관한 기록이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에 나타나지만 청화안료의 개발이 활성화되지 못했고 다만 조선후기인 18세기에는 수입 청화안료와 대등한 국산 청화안료를 개발하여 상용화하게 된다.『용재총화』나 『세조실록』에 의하면 청화백자는 세조世祖때 처음 생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확인된 유물은 없고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청화백자는 세조의 장인인 정정공 윤번의 부인인 인천이씨(1383년~1456년)의 「백자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석」이다. 당시에 그릇의 사용에는 고가의 청화안료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였으나 유교의 영향으로 매장문화를 중시 여겨서 묘지석墓誌石의 경우는 예외로 수입 청화안료의 사용을 허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의 청화백자는 대부분이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의 왕실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도자기의 문양은 도화서 화원의 솜씨로 추정된다. 주로 병, 항아리, 전접시, 연적, 잔, 묵호 등에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산수山水, 사군자四君子, 용龍, 새鳥, 물고기魚, 소나무松, 화당초花唐草, 인물人物 등의 다양한 문양을 그려 넣었다. 대체로 이른 시기의 청화백자는 종속 문양과 주 문양이 구분되고 정형화 된 문양이 주류를 이루며 그 다음으로 산수, 화조문양 등 회화성이 짙은 문양으로 변한다.

(사진1)의 「백자청화 꽃넝쿨무늬 합」은 조선 초기15세기에 제작된 청화백자로 수입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제작한 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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