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담화⑤ | CRITIC IN CONVERSATION]
현대 공예의 ´지속가능성´
공예가의 창작은 인류의 삶 속에 지속가능한 문화를 만드는 중요한 행위다. 하지만 그 역시 지구의 속살과 그 위를 흐르는 지류를 소비하는 생산 행위다. 공예는 ‘생산’이자 ‘산업’이다. 지금 한국 공예의 문제는 지나치게 공예를 예술로만, 문화로만 여긴다는 점이다. 공예를 예술화, 고급화하고 정치사회적 캐치프레이즈 도구로 이용하려는 시도들이 공예를 낯설고 어렵게 만든다. 공예가 사물이 아닌 예술을 비롯한 다른 것들과 닮아갈수록 공예의 실체와 본분, 존재할 이유는 모호해진다.
이 현상은 공예가들 스스로 사물 생산자,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고 예술가로만 여기게 한다. 공예가가 예술가로만 생각하면, 공예품은 순수예술처럼 한 개인의 자기표현, 재기 발휘의 결과물이 된다. 공예가가 예술가처럼 소비자의 니즈보다 자신의 선호, 개념, 주장을 우선하는 순간, 공예의 ‘상호성’ 즉 쌍방향 소통의 장점과 저력은 상실된다. 고급화와 시장 확대 그리고 공예가 예술에 준하는 위계를 갖추려면 공예가 지금보다 예술화, 고급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동안 공예가 ‘공예다움(공예성)’을 버리고 추종해온 일들이 현대공예의 위상과 지위 향상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음을 굳이 재환기할 필요가 있을까? 이럴 때일수록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공예가 ‘사물’이요, 공예가가 ‘사물 생산자’라는 점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유용한 물건을 좋은 솜씨로 만드는 것만으로는 공예가의 역할을 만족할 수 없다. 흔히 공예는 사회적 소통으로 낳은 산물이기에 공예·공예가를 수식하는 ‘좋은’ 혹은 ‘훌륭한’이라는 형용사 안에는 매우 복잡한 의미와 사회적, 윤리적 요구가 담겨있다. 공예가가 작업장에서 행하는 ‘창작’에만 집중하고 정작 공예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역할하다 소멸할 ‘제 2의 생’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공예가는 아이를 세상에 낳아놓고도 책임지지 않고 방치한 무심한 어미가 되는 셈이다. 이것은 좋은 공예품이 가져야할 ‘지속가능성substantiality’과도 연결된다. 지속가능성은 오늘날 전 지구적인 최대화두이다. 지구상 어떤 물건, 존재도 지속가능한 세계, 지속가능한 가능한 발전, 지속가능한 미래를 거스를 수 없다. 공예가가 좋은 재료로 새로운 창작을 하는 것 이외에 미래 지속가능한 공예 창작, 소비로 관심과 활동을 넓혀야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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